9. 신라김씨유래
대보공(大輔公) 휘 알지(閼智)의 후손들이 갖고 있는 김씨(金氏) 성(姓)을 함께 일컬어서 신라김씨(新羅金氏)라 한다.
이 말은 일연선사(一然禪師)가 편찬한 <<삼국유사>>에 나타난다.
[..인김궤이출 내성김씨(因金櫃而出 乃姓金氏)..신라김씨자알지시(新羅金氏自閼智始)]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김씨라 하였다...신라김씨는 알지로부터 시작되었다."
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신라김씨는 계림에서 탄생한 대보공의 후손들이 갖고 있는 김씨성씨를 함께 통틀어 일컫는 말이 되는 것이다.
현재 일천만의 후손들이 각기 본관을 다르게 하고 있지만 근본은 신라의 김씨로 한 혈족이라 할 것이다.
김씨는 우리나라 성씨 중에서도 많은 인구를 가진 대성으로 문헌상의 기록을 보면 [동국만성보]에 623 본, [증보문헌비고]에 499 본으로 나타나 잇으나 그중 시조가 뚜렷이 밝혀진 것은 100여 본이다.
이들 여러 김씨는 신라의 알지 계통과 가락국 수로왕 계통으로 대별되며, 현존하는 거의 모든 김씨가 이 두 계통중 어느 한쪽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신라김씨 시조인 대보공 휘 알지의 탄생설화에는 우리민족의 운명을 암시하는 상징성이 매우 깊게 담겨 있다. 시조께서 이 땅에 탄강하실 때의 기록은 우리 나라에서는 가장 오래 되었으며 유일한 역사기록이라 할 수 있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확실하게 찾아볼수 있다. 다만 두 기록에서 다른 점이 있다면 누구에 의해서 발견되었는가와 그 시간과 계절이 다를 뿐 그 외에는 거의 일치하고 있다. 삼국사기외 삼국유사의 기록을 차례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서기65(탈해9년)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 서편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새벽에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거기 나뭇가지에 금빛 나는 작은 궤가 걸려있고 그 밑에 흰 닭이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그대로 고하자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 궤를 가져다 열어 보니 그 속에 조그만 사내아이가 들어 있는데 그 외모가 출충하였다. 왕이 기쁘하여 좌우에 일러 가로되 '이는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준것이 아니냐' 하고 거두어 길렀다. 차차 자람에 총명하고 지략이 많으니 이름을 '알지' 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 이라 하고 또 시림을 고쳐 '계림' 이라 하여 국호를 삼았다. 영평 3년 8월 4일에 호공이 밤에 월성 서리를 가는데 크고 밝은 빛이 시림의 하늘로부터 땅에 뻗치어 그 구름 속에 황금색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 큰 광명은 궤 속에서 나오고 잇었는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 모양을 보고 호공이 이것을 그대로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친히 숲에 나가서 그 궤를 열어 보니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곧 일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의 고사와 같으므로 그 아이를 '알지' 라 이름하였다. 알지는 우리말로 아이를 뜻한다. 왕이 그 아이를 안고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기쁘하면서 춤을 추고 뛰어 놀았다. 왕이 길일을 택하여 태자로 책봉했으나 알지는 그 자리를 파사대왕에게 물려주고 왕위에는 오르지 않았다. 그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 이라 하였다. 알지는 열한을 낳았고 열한은 아도를 낳고 아도는 수류를, 수류는 욱부를 낳고 욱부는 구도를, 구도는 미추를 낳았는데, 미추가 왕위에 올랐다. 신라김씨는 알지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 사서의 기록으로 보면 우선 탄강의 시간대가 5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밝힐 수 있는 자료를 찾기에는 불가능하고 봄과 가을의 계절, 즉 시간이 다른 점은 주목할 일이라고 본다. 하나는 씨뿌리는 계절이고, 다른 하나는 수확의 계절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크게 상반되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신라의 역사나 김씨의 후예들이 보여주는 삶의 족적에 대한 상징적 암시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아야 하겠다. 대보공이 출현한 시기는 신라가 건국하고도 1백여 년이 지난 시기이다. 공은 바로 왕위에 나아가지 않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7세손 미추가 왕위에 나아가고 또 그 뒤 1백여 년이 지난 뒤인 내물대왕에 이르러 김씨의 왕위 세습의 시대가 비로소 열린다. 또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민족의 대통합의 결실을 맺게 되는 주역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신라김씨는 개국이나 건국 등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과 결실과 수확의 성격을 보여주는 두 가지 의미가 다함께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대보공의 탄생을 단순히 김씨의 시조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당연히 3월 (봄 : 파종, 시작의 개념)의 상징이 더 큰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한 3월과 새벽이라는 시점이 그것을 강력히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새벽에 닭울음 소리를 듣고 금궤를 발견하게 되니 어두운 밤에 닭이 울고 있음은 새벽을 알림이요 새벽은 밤의 어두움을 열고 새로운 시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가 아니던가!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보면 결실과 수확의 계절인 가을에 호공에 의해 금궤가 발견된다. 여기서도 우리는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일반 범인이 아닌 왕의 손에 의해 금궤가 열려졌고, 누었던 아이가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 스스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혁거세대왕과 탈해대왕의 탄생설화와 달리 이미 지혜와 그것을 풀어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간으로 출현하였다는 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을 수확과 결실을 상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요인들의 상징적인 사실을 보면 신라김씨의 생명력이 지닌 특성을 단적으로 파악할 수가 있다. 그러한 특성은 신라시대는 물론 고려와 조선의 모든 시대에 걸쳐 신라김씨의 인물들이 보여준 생존 방식과 역량, 남긴 족적들에 잘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들은 대보공의 탄생에서 신라김씨의 생명력이 지닌 특성을 두 가지 기록에 나타난 상징적인 암시, 바로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원형을 읽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분들의 후예들이 살아온 2천여 년의 유구한 삶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보여준 특성은 바로 대보공의 탄생에서 나타나는 예시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의 왕계를 보면 역대 56왕중 김씨가 38명이며 최초의 김씨왕은 신라 13대 미추왕으로 알지의 7세손이 된다. 알지계는 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거쳐 오면서 무려 6백여 관향으로 분적 되었으나 그중 뚜렷이 현존하는 본관은 대략 80여 본으로 추정되며 이중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후손에서 가장 많은 후손들이 나왔다
경순왕에게는 아들 아홉 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넷째 아들인 은열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여 구안동, 청풍, 김녕, 도강, 전주, 익화, 영광, 안산 김씨 등이 모두 은열의 후손인 것으로 전해지며, 이밖에 선산, 의성, 언양, 울산, 나주, 상산, 안로, 연안, 순천, 고령 등이 알지의 후손으로 전해진다.
또한 알지계에서 타성으로 갈려나간 후손으로는 김행이 안동 권씨로, 김순식은 강릉 왕씨로, 궁예의 후손 순백은 광산 이씨로, 세광은 감천 문씨로, 은열의 13세손 영규는 수성 최씨로 각 각 개성 하엿다.
이렇게 역사의 흐름 속에서 명문거족으로 가문의 번성을 이룩하여 온 범 김씨는 많은 명신, 대유, 석학들을 배출시켜 나라에 공헌하고 명문의 긍지를 심어 신라와 근대를 잇는 역사적인 사건 속에 김씨들의 입김이 닿지않은 일들이 없을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특히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구한말에 죽음으로써 나라와 가문의 기백을 지킨 인물들과 일본의 압제정치 속에서 독립운동으로 민족의 자립정신과 굳건한 투혼을 불살라 온 독립투사들의 거룩한 발자취는 가문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현대에 와서도 많은 김씨들이 조국의 발전과 가문의 번영을 위하여 명문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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