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이것 저것

이것이 우리나라 1호

淸潭 2007. 4. 22. 20:16

 

 

이것이 우리나라 1호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 예고된 순종어차

현존하는 1호를 찾아라. 현존하는 최초의 승용차가 문화재로 재탄생한다.
이 승용차는 다름아닌 임금님 부부가 타던 어차(御車). 문화재청은 최근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純宗, 1874~1926)과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가 사용하던 어차를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이번에 등록 예고한 어차는 미국 GM사의 1918년식 캐딜락과 영국 다임러사(DAIMLER)의 1914년식 다임러로 색깔도 비슷한 커플룩이다.

이밖에도 우리주변에는 문화재로 등록된 ‘1호 자장면집’을 비롯해 문화재로 등록은 되지 않았지만 당시의 사회와 문화를 조망해 볼 수 있는 ‘1호 도량형법’ ‘1호 등대’, ‘1호 자장면집’ ‘1호 대중가요’, ‘1호 다목적댐’ ‘1호 화폐’, ‘1호 선교사 묘지’, ‘1호 공원’등이 남아 있다.

◆ 순종황제와 황후가 타던 ‘외제승용차’

순종과 황후가 사용한 어차는 각각 1918년식 캐딜락과 1914년식 다임러로 차종은 다르지만 둘 다 고급스런 마론색(검붉은 색)의 7인승 리무진급 차량으로 비슷한 형태다. 특히, 이 두 차량의 옆문에는 황실의 상징인 이화문(李花紋/오얏꽃 무늬)의 금도금 장식이 붙어 있는데다 내부에는 이화문으로 된 황금색 비단이 붙어 있고 바닥에는 고급 카펫이 깔려 있어 누가 보아도 황실의 최고급 차량임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품위있게 제작됐다. 또한 차체 역시 현대의 자동차들과 달리 철재가 아닌 목재로 되어 있는데다 외부 도장도 칠(漆)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등 전체적으로 마차와 비슷한 모양의 초기 자동차 모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어차는 원래 세월이 흐름에 따라 부품 일부가 없어지고 군데군데 녹이 스는 등 자연 부식과 훼손현상이 많아 1997년부터 국내외 전문기관의 복원 작업을 통해 원형을 되살리는데 성공했다. 복원된 어차는 지난 2001년도부터 항온항습 시설이 마련된 창덕궁 빈청에 전시되어 일반인들도 쉽게 관람하고 있다. 순종과 순종효황후가 탔던 승용차는 문화재청이 관장하는 동산(動産) 형태의 첫 등록문화재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 대한제국 법률 1호 ‘도량형법’과 ‘서양식 도량형기’

대한제국의 법률 1호는 무엇일까? 그것은 ‘도량형법’이다. 이 법은 근대기(1905년-1945년)에 국가 표준으로 제작·사용되었던 도량형기를 통용케하는 법적 근거를 제공한다. 이 당시 사용되었던 자 · 저울 등 154건 331점의 도량형기가 문화재로 등록예고된다. 도량형기(度量衡器)란 길이와 용량(부피), 중량(무게)을 측정하는 도구를 말한다.

 


지역마다 다른 도량형기를 국가표준으로 규정한 '도량형법'이 대한제국 법률1호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도(度)’란 자로 길이를 재는 것을 의미하며, ‘양(量)’은 되로 부피를 재는 행위, ‘형(衡)’은 저울을 이용해 무게를 재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들의 각종 생활에 큰 영향을 주며 기준이 없을 경우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발생한다. 그러나 과거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는 도량형기가 지역마다 달랐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도량형을 정비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한제국이 성립(1897년)된 이후 근대적인 도량형을 도입하기 위해 1902년(광무 6년)에 평식원(平式院)이라는 담당 관청을 설립, 서양식 도량형제(미터법)를 일부 채택하고 1905년(광무 8년)에는 대한제국 법률 제1호로 도량형법을 정했다.

당시 고종은 법률 제1호로 도량형법을 제정할 만큼 이에 각별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 예고된 도량형기들은 도량형 제도의 변천을 실물(유물)로 한 눈에 보여주는 것들로 이 모두가 당시에 ‘국가의 표준 도량형 용기’로 또는 ‘도량형기 단속 표준기’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희소성이 크다.

◆ 국내 최초 자장면의 발원지 ‘공화춘’

인천시 중구 선린동 38번지에 소재한 공화춘은 1930년을 전후해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 전면에 타일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점, 평인방을 사용해 창들이 사각형으로 만들어진 점, 경사 지붕을 가리기 위해 외벽상부에 파라펫을 설치해 평 슬래브 건물처럼 보이게 한 점 등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 이 건물이 보존대상이 되어 수리를 하게 되면 상량문 등을 찾아 정확한 연혁을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참고.인천남부 종합학술조사 314쪽~315쪽 인천광역시립박물관 발간자료).

 


중국에는 없는 중국음식 자장면을 팔기 시작한 공화춘

자장면이 언제, 누구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는지를 밝혀줄만한 관련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화교들이 '청요리' 가 인기를 끌자 부두 근로자들을 상대로 싸고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생각하게 됐고 이렇게 해서 볶은 춘장(중국 된장)에 국수를 비벼서 먹는 '자장면' 을 만들어 팔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식으로 자장면이란 이름으로 음식을 팔기 시작한 곳이 1905년 개업한 공화춘이라는 것. 지금은 당시 화려했던 옛 건물의 자취만 남아있고 부근에 공화춘이란 신축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 곳에서 자장면이 성황리에 팔리고 있다. 구 공화춘 건물은 얼마전 등록문화재 246호로 등록됐다. 인천 중구청은 현재 화교 두명이 소유하고 있는 이 건물을 사들여 자장면 박물관을 건립할 계획이다.


◆ 인천 앞바다 내항ㆍ외항 구분하는 분기점 ‘팔미도 등대’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 등대. 인천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40호

인천 앞바다 ‘팔미도 등대’. 우리나라 최초로 불을 밝힌 등대는 인천시 중구 무의동 374번지에 소재한 팔미도에 있는 등대다. 팔미도는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8km 지점에 있는 바위섬이다. 서해안에 흩어져 있는 1백여 개의 무의도 가운데 인천항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 등대는 이 섬 해발 71m 정상에 하얀 몸매로 서 있다. 등대가 세워진 것은 1903년. 그 빌미는 인천항이 개항된 1883년 일본과 서구 열강 제국들이 인천항을 원활하게 이용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삼으면서부터 비롯됐다.

등대가 들어서기 전엔 물론 갈매기들만이 지키고 있던 작은 섬에 불과했다. 당시 인천항은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심할 뿐만 아니라, 해안선이 복잡해 입출항 자체가 용이하지 않았다. 이에 일본인들은 프랑스 표지 회사의 기술을 이용해 착공 1년 1개월 만에 등대를 설치한 것이다. 일본사람들은 이 등대를 러일전쟁시 이용하기도 했다. 당시 이 등대는 내항과 외항을 구분하는 분기점 역할을 했다. 섬의 면적은 0.17㎢로 작은 섬에 불과하지만 이곳에 세워져 있는 등대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등대의 높이는 7.9m. 일본인들이 세웠을 당시 90촉광짜리 석유등으로 등대를 밝혔다고 한다. 일본사람들이 이 등대를 만든 궁극적인 이유는 선박들의 안전운행을 위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용 가치가 있는 인천항을 수월하게 드나들 수 있는 동서남북의 방향을 알리는 역할이 필요했던 것. 팔미도 등대가 규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광복 후 교통부에서 인수하고 9년 후 렌즈의 내경이 300mm, 초점거리 150mm인 백열등이 자가발전 시설로 설치해 9천 촉광의 밝기를 보였다. 또 처음으로 안개 신호기를 설치함으로써 비로소 제대로 된 등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후 1963년 이 등대에 무선표시국을 설치했고, 1967년에는 무선전화와 등명기를 백열등에서 수은등으로 교체 하는 여러 차례에 걸려 등대의 현대화를 위해 시설개조를 진행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처음에는 단순히 방향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설치되었지만 지금은 항로표시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시설물이나 기기를 관리하는 기능까지 맡고 있다. 또한 기상 관측과 연안지역의 해양 관측까지 해 여객선은 물론 화물선, 어선 등의 입출항에 없어서는 안 되는 등대가 된 것이다. 이 등대는 인천상륙작전 수행에도 한몫을 담당했다, 등대수들이 피난을 가지 않고 석유램프를 켜놓은 채 등명기를 손으로 돌려 위치를 알려줌으로써 상륙에 도움을 준 것이다.

◆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희망가’

“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앉아서 생각하니 / 세상만사가 춘풍 중에 또다시 꿈같도다.” 너무나 유명한 이 대중가요는 실은 외국곡. 단지 우리의 노래로 알고 있는 것은 그 곡과 가사가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바뀌어 불렸기 때문이다. 흔히 대중가요로는 1925년 발매된 ‘조선 소리판’에 실려 있는 도월색의 '시들은 방초', 김산월의 '장한몽', 그리고 1926년에 윤심덕이 불러 크게 히트시킨 '사의 찬미' 등이 있다.

그러나 '희망가'는 이보다 수년 전부터 대중 속에 급속히 퍼졌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3ㆍ1만세운동의 물결이 지난간 뒤인 1923년 무렵. 당시 대중의 마음은 허탈감과 죄절감 그 자체였다. 민족의 염원은 수포로 돌아갔고, 일제는 문화정책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겉과 속을 달리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런 시대상황에서 애조 띤 노래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그 노래를 '희망가'라고 했다. 가사가 한국어로 되어 있으니까 그 작사자와 작곡자가 분명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누가 지은 것인지도 알려지지 않은 채 널리 불려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댐 '섬진강 댐'

◆ 국내 최초 다목적댐 ‘섬진강 댐’

다목적댐으로 국내 최초로 건설된 댐은 섬진강댐이다, 공사가 착수된 것은 1940년, 그리고 준공한 때는 1965년. 25년 만에 준공된 섬진강댐은 격동기의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건설된 댐이다. 이 댐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댐은 관개용으로 건설됐다. 가뭄에 대비해 미리 물을 가두어두었다가 필요할 때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이때의 댐은 대부분 흑으로 막은 것이었고, 그래서 높이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인구가 증가하고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물은 관개용만이 아닌 식수, 공업용수 등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댐이 다목적용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것. 댐 높이 64 m. 제방길이 344.2 m. 저수용량 4억 6600만 t. 동진강(東津江) 하류지역의 수리불안전답과 계화도(界火島) 간척지에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호남지방의 전력난(電力難) 해소에 도움을 주고 있는 댐이다. 이 댐의 완공으로 연간 1억 6634만 7000 kWh의 전기와 연간 2억 2500만 m3의 각종 용수를 공급하게 되었으며, 초당 1,400 m3의 홍수조절 능력을 가지게 됐다.

 


1백원짜리 조선은행권

◆ 수염 긴 노인이 도안된 국내 최초 지폐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사용된 지폐는 어떤 것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고종 30년 1893년에 만들어진 지폐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바로 호조태환권이라는 지폐. 지폐 제조를 관장했던 부서가 호조였다는 것을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는데, 50냥ㆍ20냥ㆍ10냥ㆍ5냥짜리가 있었다고 한다. 정부에서 이 지폐를 만든 것은 당시 화폐로 쓰고 있던 엽전을 회수하여 새로운 화폐제조를 정착시키기 위해서였다. 태환(兌換)이라는 말은 바로 그렇게 통용되고 있는 화폐와 바꾸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폐는 만들어놓기만 했지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못했다. 화폐 업무를 담당한 일본인들의 운영권 다툼 때문. 만약 그 문제가 해결돼 새로운 화폐로 쓰였다면 호조태환권이야말로 한국 최고의 지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 지폐는 한 장도 사용되지 못한 채 모두 소각되고 말았다.

이후 나온 지폐는 모두 식민지 시대에 발행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때의 지폐는 우리나라의 돈이라 할 수 없다. 한국의 지폐로 최초인 것은 당연히 광복 이후 맨 먼저 한국인들이 화폐로서 사용한 것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때 맨 먼저 사용된 지폐는 1백 원짜리 조선은행권. 1945년 9월 1일부터 사용됐다. 광복이 된 나라에서 발행하여 사용한 지폐이기 때문에 이 돈은 분명 우리나라의 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화폐업무를 담당했던 사람들은 모두 일본인들이었다. 일제는 한국인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광복이 되었을 때 우리의 손으로 그 일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것. 광복이 된 상태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지폐는 그렇기 때문에 액면도, 모양도, 도안도 모두 일본사람들의 주도하에 만들어졌다. 액면 1백 원은 고액이었다. 통화 조절을 명분으로 남발한 것이었다.

도안도 1915년부터 일제가 각종 지폐에 공용으로 쓰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크기는 가로가 162mm, 세로가 93mm, 조선서적주식회사에서 옵셋 인쇄로 제조되었다. 화폐를 인쇄할 수 있는 시설은 일본에 있었는데, 그렇게 국내에서 인쇄한 것은 일제가 전쟁 말기 수송상태가 마비될 것을 염려하여 시설을 서울로 공수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지폐는 아직까지도 수집가들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다. 다름 아닌 탐스러운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어느 노인의 모습이 인쇄되어 있는 도안인데, 그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 때문이다. 화폐 도록에는 이 노인이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으로 되어 있고, 그렇게 알려져 왔다. 그는 한일합방 후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벼슬을 받은 반면, 조선 독립의 청원서를 보내기도 한 인물이다. 실제로 그의 사진을 보면 도안의 노인과 비슷하다.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관보에 그 도안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1947년도 이런 논란 때문에 한 시민이 중앙방송국에 문의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조선은행 영업부 부지배인 최기룡 씨는 그 도안의 주인공이 운양이 아니고, 가공적인 수복신(壽福神)이라고 해명해주었다. 이런 사실은 그 프로그램의 질의응답 내용을 책으로 엮은 ‘상식독본’에 실려 있다. 위조 방지를 위해 수염이 있는 인물화를 도안으로 사용하는 것은 흔한 방법이라는 설명을 했던 것. 즉 수염 긴 노인 도안은 수복신 상징. 이 지폐는 정부수립 직전까지 사용되었다.

◆ 국내 최초 근대묘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마포구 합정역 근처 바른 편에는 천주교 절두산 기념교회가 왼쪽에는 개신교 외국인 연합교회가 소재해 있다. 두 교회는 공히 양화진이라고 하는 한국적 역사와 맞물려 고난 속에서 역사의 분수령을 넘다가 붉은 태양처럼 몸을 태우며 숨을 거두고 잠들었다는 특징을 간직한 곳이다. 합정동 2호선 전철이 지나는 육교 옆 바른쪽으로 넓게 트인 공원이 있는데, 외국인 묘지다. 10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성장위주의 개발논리에 밀려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온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우리의 소중한 근대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묘지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사진 =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 기념 교회 www.yanghwajin.net)

마포구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는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많은 저명한 외국인들이 그들이 자녀와 함께 안장되어 있으며, 17개국의 약 430여기의 묘가 조성되어 있어 근대 묘지 형성 과정 및 비문의 변천사를 연구할 수 있는 역사 학습의 장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묘원들은 서양 영화 속에서 쉽게 보이는 묘지 형태와 별로 다르지 않다. "여기 주를 사랑하는 종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누워있다" "한국을 사랑하여 한국인의 영혼을 어루만지다 숨진 아무개가 여기 누워있다“ 어느 묘지 뒷면에는 “우리는 결코 한국인을 위해 쏟은 당신의 사랑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글귀도 새겨져 있다. 하나같이 평토장이고 희미한 봉분이 형태만을 드러낸 애장도 꽤 많다. 일반적인 묘지와는 차별성이 있는 이 묘원은 외국인 선교사로서 고향을 떠나 낯선 이국의 땅에서 옳은 신념을 위해 묵묵히 봉사하다 순교한 순교자들의 숭고한 정신이 깃들어 있기에 가치가 높은 유산이다.

◆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 '자유공원'

인천광역시 중구 송학동1가·전동·북성동3가에 걸쳐 있는 공원.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 인천 앞바다와 인천항, 인천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응봉산에 조성된 공원으로 면적이 6만4480㎡ 에 이른다. 1883년 인천의 개항과 함께 응봉산 일대에 일본·청나라를 비롯한 미국·영국·러시아 등 여러 나라들이 어울려 형성한 '만국지계'가 들어서게 되자, 5년만인 1888년 11월 이들에 의해 만국공원이 공동명의로 조성됐다. 그러나 일본 세력의 확장으로 각국 거류지가 철폐되고 공원 관리권이 1914년 인천부로이관되어 서공원이라 불렸다. 그후 1957년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세워지면서 자유공원으로 개칭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 '자유공원'

인천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자유공원은 민족상잔의 뼈아픈 기억을 되살리며, 인천시민의 안식처로 각광을 받고 있다. 공원 정상의 맥아더 동상과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을 비롯해 자연보호헌장탑, 충혼탑, 자유의 여신상, 연오정, 석정루 등이 세워져 있으며, 학익동 언덕에 묻혀 있던 선사시대의 유물인 지석묘를 옮겨놓았다. 그밖에 10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인천시립박물관과 교육청·측후소 등의 문화기관이 들어서 있다. 각종 시민을 위한 행사도 열리고 있다. 또 매년 4월이면 자유공원으로 오르는 길은 벚꽃으로 만발한다. 이를 기념해 벚꽃축제가 이곳에서 열린다.

공원 정상에서 인천항과 월미도를 바라보는 맛도 그만이다. 늦은 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인천항의 밤 경치는 연인들의 데이트코스로도 유명하다. 인근에 중국인촌, 신포동시장, 인천백화점, 올림포스관광호텔 등이 있다. 약간 멀리는 연안부두, 월미도가 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내려오는 길에 홍예문을 보고 오는 것도 좋다. 일본인들이 자국의 조계와 축현역(현 동인천 역)을 연결시키려고 응암산 줄기를 뚫어 1905년착공했다. 1908년 준공했는데 고개문의 형태가 무지개와 같아 홍예문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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