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문학/책 속의 향기

내 인생의 뒤통수를 치는 상쾌함

淸潭 2007. 3. 17. 10:04
내 인생의 뒤통수를 치는 상쾌함
분홍 리본의 시절 권여선 지음|창비|251쪽|9800원
권여선<사진> 소설의 매력은 소설거리가 되지 않을 듯한, 무미건조한 등장 인물들의 지리멸렬하면서도 구질구질한 일상을 헤집어서 보석처럼 빛나는 언어감각으로 아, 비루한 인생이라도 이토록 상큼하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는 것이다. 권여선 소설은 그런 의미에서 범속한 일상의 소설적 배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권여선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마음은 고독한 사냥꾼’들이다. 스스로 타인과 세상을 향해 마음의 빗장을 걸어잠근 채 냉소적 포즈를 취한다. 그러나 그 위악적 자폐는 외부로부터 상처받기를 두려워하는 삶의 방어 본능에 따른 것이란 점에서 삶에 대한 작가의 연민어린 시선을 느낄 수 있다.

단편 ‘분홍 리본의 시절’의 주인공 연희는 신도시에서 한때 사랑했던 대학 선배와 해후한다. 유부남인 선배를 향한 애정의 잔상은 은근히 남아있지만, 그녀는 선뜻 그 잔상을 조립해 욕망의 스크린에 새 영상을 투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가을, 선배는 한 여자를 데리고 나타난다. 가정의 울타리에 갇혀 착한 남편의 역할에 충실한 듯 했던 그 선배는 이미 여러번 그 여자의 몸에 씨를 뿌렸다가 거두지 못한 채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여자는 남자의 잘못이 아니라고 한다. 그녀가 콘돔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란다. 남자는 그래서 콘돔에 대한 냉소적 몽상에 빠진다. ‘내 불만은 말이지, 콘돔이 왜 과일 맛이나 바닐라 맛 따위만 있냐는 거야. 우리가 애들이야? 갓 구운 마늘빵 맛이라든가 조개 넣고 끓인 시원한 된장국 맛이라든가 새우튀김이나 게찜 맛 전복죽 맛. 이런 콘돔 진짜 죽이지 않겠어?’

한국소설에서 콘돔에 관한 한 가장 재미있는 묘사가 될 이 장면에서도 권여선 특유의 아이러니 미학은 빛난다. 여성의 미각에 맞는 다양한 콘돔을 꿈꾸는 남자가 사랑하는 정부(情婦)는 체질적으로 콘돔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꿈과 결핍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지만, 권여선 소설의 여자들은 항상 꿈을 실현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결핍을 선택해서 주저앉는다. 뒤에서 껴안아주는 남자는 ‘달고 격한 느낌’(‘위험한 산책’)을 일으키지만, 꿈 속의 남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왜 떠나는지, 왜 돌아올 수 없는 지 알려주지 않는다. 소통과 화해를 거부하는 권여선 소설은 욕망의 붉은 상처를 햇볕 아래 드러내면서 욕망의 집착을 조롱한다. ‘내가 내 뒤통수를 내려찍는 이런 상쾌함이 없다면 나란 존재는 과연 무엇이겠는가’라는 것이다. 
글=박해현기자 , hhpark@chosun.com 사진=이덕훈기자 , leedh@chosun.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