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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의망언(得意忘言) 뜻을 얻고 나면 말은 잊는다.

淸潭 2024. 11. 11. 13:01

득의망언(得意忘言) 뜻을 얻고 나면 말은 잊는다.

 

통발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도구이니,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잊어라.

올가미는 토끼를 잡기 위한 도구이니, 토끼를 잡고 나면 올가미는 잊어라.

 

말은 뜻을 담는 도구이니, 뜻을 얻고 나면 말은 잊어라.

어찌해야 뜻을 얻고 말을 잊어버린 사람과 더불어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

《장자(莊子)》 잡편(雜篇) 〈외물(外物)〉편

 

언덕을 오르려면 뗏목을 버려라.

목적을 다 이루고 나면 쓰임을 다한 것에 더 이상 집착하지 말라.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이르기 위한 수단은 잊어버려라.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잊어라. 得魚忘筌 득어망전

언덕을 오르려면 타고 온 뗏목을 버려라. 捨筏登岸 사벌등안

 

​사벌등안(捨筏登岸)은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법(法)에 집착하지 말라고 한 가르침이다.

그대 비구들은 나의 설법을 뗏목의 비유로 알아야 한다.

법도 마땅히 버려야 하는 것인데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

《금강경》

 

이 세상[차안(此岸)]에서 강을 건너 저세상[피안(彼岸)]에 이르려면, 뗏목이 있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法門)이 필요하다. 하지만, 강을 건넌 뒤 언덕에 오르려면, 타고 간 뗏목을 버려야 한다.

뗏목을 지고는 산꼭대기, 즉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할 수 없다.

 

부처님의 설법과 비유는 일종의 방편이고 수단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죄다 잊어버리고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중생들은 뗏목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이 세상[차안(此岸)]의 것들에 대한 집착과 욕심에서 헤어나지 못하듯이.

 

뿐만 아니다.

부처님을 뵙기 위해서는 언덕을 올라야 한다.

하지만, 어리석은 중생은 뗏목을 버리고 언덕을 오르기는커녕 그 뗏목을 신줏단지처럼 모신다.

부처님이 아닌 부처님의 말씀에 매달리곤 한다.

자구 하나하나를 풀이하고 해석하는데 몰두한다.

 

나아가 자신들 나름의 해석을 옳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견해를 배척하며 공격하기도 한다.

각자의 주의(主義)와 주장(主張)을 담은 이념도 마찬가지다.

이념이라는 것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수단이자 도구인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정작 '더 좋은 세상'이라는 목적은 깡그리 잊어버린 채 이념이라는 도구에만 집착한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보려 한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이다.

 

바둑을 둘 때 하는 얘기다.

바둑을 두기 위해서는 정석을 외워라.

바둑을 더 잘 두기 위해서는 외운 정석을 모두 잊어라.

정석을 배운 다음 잊어버려야 입신(入神)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내 편은 옳고, 상대편을 그르다?

성심(成心; 굳어진 마음)을 좇아 스승[사(師)]으로 삼는다면, 누군들 스승이 없겠는가?

《장자(莊子)》 내편 〈제물론(齊物論〉

 

​장자(莊子)가 성심(成心)을 절대적인 것으로 삼고 맹종하는 어리석음을 가르치며 한 말이다. 성심(成心)은 '굳어진 마음', '이미 만들어진 생각'이다. 분별심에 사로잡힌 마음, 편견이나 선입견이다.

 

사람은 남과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나기 때문에 생각이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편견이나 선입견과 같은 '나만의 생각'을 갖게 된다.

문제는 그걸 절대적인 것으로 받들고, 남에게까지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장자의 표현으로는 '성심을 스승으로 삼음[사성심(師成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