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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 유람기〔游淸潭記〕

淸潭 2024. 2. 11. 11:52

청담 유람기〔游淸潭記〕

 

경오년(1870) , 어성집(魚聖執)에게서 그의 선조 기원공(杞園公)의 책을 빌려 읽다가

 〈청담동부기(淸潭洞府記)〉를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뻤으니 이름난 선비를 뵙는 듯해서였다.

청담이란 곳은 나의 외가 별장이 있는 곳으로 삼각산의 북쪽, 도성문에서 40리 거리에 있다.

샘과 바위로 유명하지만 오랫동안 황폐해진데다 지역 또한 극히 외져서 유람 오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세상에 그곳을 거론하는 사람이 없다. 내가 한번 감상하러 가리라 마음을 먹은 지가 또 10년이 되었다.

이에 서여심(徐汝心)에게 편지를 써서청담에 가자고 약속한 지가 오래되었네. 자네와 함께 가고 싶네.”라고 했다.

그때 마침 여심은 바야흐로 옥천산방(玉泉山房)에서 글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3월 무인일에 성집(聖執)과 홍제원(弘濟院)을 나서니 여심은 이미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진관사(津寬寺)에 이르자 바위와 샘과 꽃과 나무가 자못 그윽한 운치가 있었다.

밤이 깊어 달이 밝은데 묘향산으로부터 온 승려를 만나 《금강경(金剛經)》을 얘기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삼각산 발치를 감싸고 서쪽으로 갔다. 시내를 따라 10리쯤 가서 그 북쪽에 이르자 공손하게

여러 봉우리들이 인사하며 맞이하는 것이 보였다. 산의 입구에는 붉은 살구나무 백여 그루가 난만하여

노을 빛 비단 같았고, 두어 채 초가집은 말끔하여 은사가 사는 집과 같았다.

여기서부터 이 골짝은 더욱 깊어지고 바위는 더욱 희게 닳아 있고 물은 더욱 맑게 흘러갔다.

인수봉(仁壽峰)으로부터 흘러 온 것이 모든 길에서 함께 쏟아져 폐부처럼 흩어지고 모여 끝없이 이어지니

스스로도 그 깊숙이 들어감을 알지 못했다. 비스듬한 길을 몇 번 돌아드니 홀연 골짜기를

가로질러 끊어 놓은 크고 울퉁불퉁한 바위가 있는데 색깔이 눈같이 희었다.

맑은 여울이 그 위를 평평히 달려가다가 부딪쳐 내리찧고 뿜어져 뛰어 올라 아래로 흘러 주옥(珠玉)같은

연못을 이루었다. 우리는 머뭇거리다가 서로 돌아보며, “여기가 이른바 청담이라는 곳인가?

어찌 이처럼 얕은가? 어쩌면 혹시 아직 이르지 못했는가?” 하였다. 재촉하여 앞으로 나아가니

물소리가 더욱 우렁차져서 패옥 소리 같은 것은 금과 슬을 타는 듯, ()을 치는 것 같은 것은 바람 불고

우레가 이는 듯하고, 물이 고인 곳은 거울 같고 쏟아져 내리는 곳은 주렴을 드리운 것 같았으나,

웅덩이가 깊은 곳도 오히려 무릎을 잠기게 하진 못했다.

또 백여 보를 가니 푸른 병풍이 그윽하게 둘러쳐 있고 아름다운 나무가 무성한데 동북쪽

여러 봉우리들이 서로 더불어 비치어 옥순(玉筍)과 금부용(金芙蓉) 같은 산봉우리를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곳은 겹겹이 큰 바위가 모여서 백옥 계단이 되었는데 대부분 깎고 새긴 솜씨를 더하여

경계 구분이 평평하고 발라서 밭두둑의 도랑 같았다. 모두 백 사람이 앉을 만했으니,

생각에 필시 포금대(抱琴臺)ㆍ산경대(散經臺)인 것 같았다. 남북 골짜기의 물줄기가

이곳에 이르러 합쳐져서 바위의 형세를 따라 그 변화를 다하여 움푹한 곳은 못이 되고,

솟아나온 곳은 대가 되고, 부딪쳐 흐르는 곳은 폭포가 된 것이 바둑판처럼 펼쳐져 있다.

가운데 작은 언덕이 있어 헤엄치는 용처럼 구불구불 흘러 내려 남과 북의 물을 경계 지었는데

오래된 초석(礎石)이 그 위에 뒤섞여 있으니, 와운대(臥雲臺)ㆍ농월대(弄月臺)의 터이다.

그 등성에 올라 좌우를 굽어보니 바위틈에서 흘러나온 물이 협곡으로 달려가 각각 한 골짝을 이루었다.

이에 기원옹의 기를 취하여 그 명칭과 형상을 증명해보며 여러 번 오르내렸으나 막막하여 조사해볼 수가 없었다.

이에 성집과 길을 나누어 들어가서 성집은 그 북쪽 끝까지 살펴보고 나는 그 남쪽 끝까지 살펴보았다.

거친 잡목을 헤치고 여울의 징검다리를 건너서 바짝 가까이 몇 바탕을 가보니 그곳은 깊고

가파르고 험하여 나무꾼도 가지 못할 곳이었다. 어지러운 물과 겹쳐진 바위 사이를 배회하다가 결국

아무 소득 없이 우울하게 돌아와 셋이 포금대 위에 앉아 물가에서 물결을 희롱하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지으니 정신이 깨끗하게 맑아져 마치 군옥산(玉山)의 골짜기에 들어온 것 같았다.

해가 저물어 돌아올 길을 탐색하다가 비로소 북쪽 절벽에 대로(大老 송시열)가 지으신 절구 한 수를 찾았다.

그 밑이 바로 내가 처음에 와서 배회하던 곳이니 비로소 이곳이 청담(淸潭)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청담동부기(淸潭洞府記)〉에 쓰인 대로웅덩이는 검고 푸른 하늘 잠겨 신물(神物)

잠복해 있는 듯하다고 한 것과는 매우 유사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그 모래 언덕이 무너지고

쏟아져 오랜 세월동안 막혀서 그런 것이리라. 예를 들면 적취강(積翠岡), 분뢰협(噴雷峽), 양화뢰(漾花瀨),

수륜석(垂綸石), 침수대(枕漱臺), 영대(靈臺), 건라벽(蘿壁), 탁영담(濯纓潭), 명경담(明鏡潭),

백운담(白雲潭), 소월담(素月潭) 같은 곳도 생각에는 또한 누각 터의 아래나

이 청담의 주위에 있을 듯 했지만 알 수가 없었다.

옛날에 우옹(尤翁 송시열)께서 독락재(獨樂齋) 구씨(具氏)의 초당(草堂)에 놀러와 청담 가에서 시를 지으셨다.

나의 외 선조이신 홍충경공(洪忠敬公)과 정혜공(靖惠公) 두 분이 이어서 와운루(臥雲樓)

농월루(弄月樓)를 건축하셨고, 또 삼연공(三淵公)과 기원공을 따라 이곳에서 강학하셨다.

골짜기의 승경이 크게 여러 공에게 감상할 거리가 된데다 여심은 구씨(具氏)에게 또한 미생(彌甥)이니

세 사람이 함께 온 것이 참으로 우연이 아니다. 그 자취를 어루만지며 감개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바야흐로 이 산에 오지 않았더라면 어지러운 산과 거친 시내, 깊은 숲과 허물어진 절벽,

독사가 잠복해 있고 새와 짐승이 우는 곳에 높다란 갓을 쓴 명공(名公)과 석인(碩人)이 술을 마시며

시를 읊고 배회하던 화려한 누정이 있었음을 어찌 알았겠는가? 또 어느덧 사라져 황량한

안개와 떨기 진 잡목 속에 다시 나무꾼과 목동들이 노래를 부르는 곳이 되어버려

선인들의 풍류를 아득히 찾아볼 수가 없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사물의 이치가 차고 기우는 것이 끝없이

서로 이어지니 후일의 일을 또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우리들은 모두 늙지 않았으니 이 산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D001] 청담(淸潭) :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계곡 일대에 해당한다. 《고양군읍지(高陽郡邑誌)》에 의하면 이곳에 참판 홍석보(洪錫輔)의 와운루가 있는 것으로 나오는데,한장석의 이 글과 어유봉의 〈청담동부기〉에 설명한 것과 위치가 일치한다.

[-D002] 어성집(魚聖執) : 어윤중(魚允中, 1848~1896)으로,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성집, 호는 일재(一齋),시호는 충숙(忠肅)이다. 1869(고종6) 정시(庭試) 문과에 합격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온건개화파로서 1894(고종31) 갑오개혁 내각에서 탁지부대신이 되어 재정ㆍ경제 부분의 개혁을 단행했다.갑오개혁 후 예전 산송(山訟)문제로 원한을 품고 있던 정원배 등의 무리들에게 살해되었다.1910(융희4)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종정연표(從政年表)》 등이 있다.

[-D003] 기원공(杞園公) : 어유봉(魚有鳳, 1672~1744)으로, 본관은 함종(咸從),자는 순서(舜瑞), 호는 기원이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 1734(영조10)에 호조 참의,이듬해 승지에 이어 찬선(贊善)을 지냈다. 문집에 《기원집(杞園集),저서에 《경설어록(經說語錄), 《오자수언(五子粹言), 《논어상설(論語詳說),《어류요략(語類要略), 《대월첩(對越帖), 《풍아규송(風雅閨誦)》 등이 있다.《기원집》에 〈청담동부기(淸潭洞府記)〉가 실려 있다.

[-D004] 서여심(徐汝心) : 서응순(徐應淳, 1824~1880)으로,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여심, 호는 경당(絅堂)이다. 유신환(兪莘煥)의 문하에서 심기택(沈琦澤)ㆍ민태호(閔台鎬)ㆍ김윤식(金允植)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1870(고종7) 음보(蔭補)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ㆍ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ㆍ영춘 현감(永春縣監)을 역임하고, 간성 군수(杆城郡守)로 부임하여 임지에서 죽었다.

[-D005] 옥천산방(玉泉山房) : 옥천암(玉泉庵)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 있는 사찰로, 자세한 연혁은 알 수 없다. 1868(고종5)에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으로 정관(淨觀)스님이 중창하였다고 하며 그 이후 여러 차례 중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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