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름은(3)
위는 송병순이 이병철(李柄喆)에게 지어준 글이다. 이병철은 자가 희언(希彥)으로, 생몰연대 및 행적은 자세하지 않다. 다만 작자의 형 송병선(宋秉璿)의 『연재집(淵齋集)』 연보를 보면 송병선의 자질(子姪) 혹은 문인(門人)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송병선을 중심으로 한 인맥 속에서 작자와도 비교적 가까운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작자는 먼저, 침묵을 극단적으로 지향하는 설선(薛瑄, 1389~1464)의 말을 제시한다. 그러나 곧 침묵으로만 일관하는 것은 불가(佛家)의 적멸(寂滅)에 가깝고, 말해야 할 때는 말하고 침묵해야 할 때는 침묵해야 한다며 설선의 말을 비판한다. 작자가 생각하는, 말과 침묵을 시의적절하게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대상은 하늘이다. 하늘은 평소에는 고요하지만 때가 되면 우레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인간의 영역으로 넘어오면 하늘과 가장 비슷한 속성을 가진 성인이 있으니, 바로 공자이다. 작자는 주자의 시를 인용하여 공자가 말을 하려 하지 않는 이유를 암암리에 말이 없는 하늘에게서 찾고 있다.
그렇다면 설선의 침묵과 공자의 침묵 중 어느 쪽을 배워야 할까. 작자는 설선의 침묵을 비판하면서도 침묵에 관한 수많은 격언 중에 왜 하필 설선의 말을 인용한 것일까. 설선의 침묵은 그저 입만 닫는 것이고 공자의 침묵은 말할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공자는 학문과 도덕이 완성된 성인이기에 때만 기다리면 되지만 범인들은 다르다. 성현의 경전에 침잠하여 그 가르침을 몸소 체험해야 한다. 또 마음을 항상 일깨워 외물의 유혹을 끊어내야 한다. 이병철이 성인의 침묵을 지향하면서도 이름만 칭탁할 뿐 실질에 대한 노력은 하지 않을까 우려한 작자는 이 때문에 설선의 침묵을 끌어온 것이리라.
실질을 갖춘 침묵은 작자가 살았던 시대에 더욱 필요한 덕목이었을지 모른다. 당시와 같은 격변기에는 수많은 가치가 혼재하고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저마다 목소리를 드높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러한 때에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보아야 혼란에 더 큰 혼란만 가중시킬 수 있다. 학문과 도덕을 갖추고 묵묵히 시대와 타인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는 사람의 진가는 이때 더욱 발휘된다. 작자가 이병철에게 글을 써준 의미가 이에 있지 않았을까.
시대와 사람이 달라졌어도 말과 침묵에 대한 고민은 현재에도 유효해 보인다. 여전히 수많은 가치가 혼재하고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저마다 목소리를 드높이기 때문이다. 필자 또한 사람이기에 삶의 수많은 지점에서 말과 침묵의 욕구와 마주한다. 말할까 고민하다 침묵해도 후회하고, 침묵할까 고민하다 말해도 후회하곤 하는데, 돌이켜보면 후자의 빈도가 더 많은 듯하다.
‘침묵[黙]’이라는 말을 새삼 되새기다 보니, 자신을 빛내기 위해 떠들어대는 사람들 속에서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침묵을 견지하며 홀로 무광으로 빛나는 사람을 주변에서 가끔 보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공자가 말한, 하지 않는 바가 있다는[有所不爲], ‘견자(狷者)’가 이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필자가 감히 사람을 가려 사귀겠는가마는,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들일 것이다. |
'글,문학 > 古典散文'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얘야, 좀 더 있다 가려믄 (0) | 2021.06.09 |
---|---|
어버이의 마음 (0) | 2021.05.05 |
목숨과 바꾼 비단 (0) | 2021.03.17 |
생명이 오는 자리에서 (0) | 2021.03.10 |
근본적인 대책 강구 (0) | 2021.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