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결사, 4종정 7총무원장이 나오다/성철큰스님 평전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 | ▲ 봉암사 대웅전에서 예불을 올리는 스님들의 모습. 예나 지금이나 스님들의 여법함은 다르지 않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
“대중을 무섭게 다그친 만큼 성철은 자신에게 엄격했다. 결사 중에도 생식을 계속했다. 쌀 두 홉을 물에 담갔다가 간을 하지 않고 씹어 먹었다. 일체 찬도 없었다. 성철은 이때도 장좌불와(長坐不臥)를 계속했다. 성철의 방엔 목침이 없었다. 누구도 이불 위의 성철은 본 적이 없었다.”
봉암사는 희양산 흰 바위만큼이나 높이 솟았다. 봉암사에서 일어난 일은 금방 퍼져나갔다. 선승들이 전국에서 찾아왔다. 부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절 살림은 어떻게 꾸려가야 하는지, 선방에서는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알고 싶고 보고 싶었다. 봉암사 스님들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대로 본보기였고 기준이었다. 객들은 그들의 수행정진에 자신을 빗대보기도 했다.
신도들과 일반 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졌다. 지게 지고 줄지어 나무하러가는 스님들의 행렬마저 반듯하게 보였다. 누더기를 걸쳤지만 얼굴에 구김이 없었다. 오히려 어떤 자긍심 같은 것이 서려있었다. 마을 아낙들의 입에서 전에 없던 말이 튀어나왔다.
“아이구 저 스님은 인물도 훤하네. 사위 삼았으면 좋겠네.”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이 성수 스님에게서 들은 얘기)
“스님들이 전부 누더기 차림이고 얼굴은 벌건 게 참으로 멋있게 보이더라구. 이전의 대처승들하고는 딴판으로 보이더구만. (…) 깨끗한 스님들을 보니, 은근히 나도 출가하고픈 생각이 들었지.” (혜명 스님)
종단에서도 봉암사 결사를 비상하게 지켜봤다. 청담의 제자 정천이 봉암사에 오게 된 과정을 더듬어보면 불교계가 봉암사 결사를 주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천은 가야총림에 머물며 봉암사로 떠난 스승 청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스승은 오지 않았다. 대신 봉암사 결사 소식만 들려왔다. 정천은 봉암사에서 반듯하게 살고 싶었다. 이를 눈치 챈 효봉 스님이 물었다.
“너도 가고 싶으냐?” “예, 스님.”
효봉은 봉암사 결사를 기특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길 안내를 해줄 비구니를 붙여 정천을 봉암사로 보냈다. 효봉은 친히 일주문까지 나와서 정천과 작별했다.
“중노릇 잘하거라.”
이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가야총림이 있지만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겠다는 봉암사 결사를 효봉이 인정한 것이었다. 아직도 대처승들이 절 살림을 장악하고 있는 큰 절은 봉암사 결사를 따라갈 수 없었다. 모두가 존경했던 효봉이 정천의 의중을 떠보고 길잡이 비구니를 딸려서 봉암사로 보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광식 지음 ‘아! 청담’ 참조)
봉암사에 끊겼던 신도들이 찾아들고, 사방에서 대중공양이 들어왔다. 경(經)만을 읽어주는 데도 재를 지내 달라며 줄을 섰다. 성철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봉암사에) 사는 사람들이 스님 같고 귀신을 맡기면 천도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하나씩 둘씩 재 해달라고 들어와요. 우리 법대로 ‘금강경’이나 ‘심경’을 읽어주는데, 그만 재가 어떻게나 많이 드는지, 왜 그런가 들어보니, 무슨 탈이 나가지고 무당을 데려다 굿을 한다, 별짓을 다해도 천도가 안 되는데, 봉암사에만 잡아넣으면 그만이다, 이것입니다.” (성철 ‘방장 법어’)
성철 이름 또한 높아졌다. 하루는 부산지역 신도들이 찾아와 법문을 해달라고 졸랐다. 향곡을 따르는 무리였다. 성철이 난색을 보이자 향곡까지 나서서 청했다. 거절할 수 없었다. 성철은 진정한 불공에 대해서 설했다.
불공은 절집이 아닌 세상 속에서 행해져야 하며 부처님이 얘기한 불공은 결국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 일렀다. 승려란 부처님 법을 배워 불공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고, 절은 불공을 가르쳐주는 곳이어야 했다. 일체 중생이 다 불공 대상이었으니 불공의 대상은 오히려 절밖에 있었다. 부처님도 ‘나에게 돈 갖다 놓고 명과 복을 빌려하지 말고, 참으로 나를 믿고 따른다면 내 가르침을 실천하라’고 이르셨다. 배가 고파 길가에서 죽어가는 강아지에게 식은 밥 한 덩이를 주는 것이 부처님께 만반진수를 차려놓고 수천 만 번 절하는 것보다 훨씬 공이 크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성철이 말했다.
“불공이란 남을 도와주는 것이지 절에서 명도 주고 복도 준다고 목탁 두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절이란 불공 가르치는 곳이지 불공드리는 곳이 아니란 얘기지요. 불공은 절 밖에 나가 남을 돕는 것입니다.”
성철은 확실히 달랐다. 복 받으려면 부처님 앞에 재물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던 신도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내 감동했다. 성철은 인간의 참모습이 부처와 다름없음을, 만물은 일체가 장엄하고 숭고하다는 것을 일깨웠다. 자신이 존귀한지 모르고 스님의 축원으로 복을 받으려는 행위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알렸다. 법문을 듣는 사람들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날 법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신도들은 옷깃을 여몄지만 정작 절집에서는 아우성이 일었다. 부산, 경남 지역 사찰의 승려들이 들고 일어났다. 성철의 법문이 결국 절에 돈 갖다 주지 말라는 것 아니냐고 흥분했다.
“우리 중들은 모두 굶어 죽으라는 소리냐. 승려와 신도를 갈라놓는 것이 결사이고 혁신이란 말인가.”
파문은 서울까지 번졌다. 총무원에서도 경위를 따져 물었다. 그러나 성철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산이 떠나갈 듯 일갈했다.
“부처님 말씀 전하다 설사 맞아죽는다고 한들 무엇이 원통할까. 그건 영광일 뿐이지. 천하의 어떤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해도 나는 부처님 말씀 그대로를 전할 뿐 딴 소리는 할 수 없다.”
승려는 결국 부처님 말씀을 중간에서 소개할 뿐이니, 신도들이 부처를 봐야지 부처가 아닌 승려들만 보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훗날 성철은 참된 불공에 대해 설했다. 내용은 봉암사 법문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어떤 도적놈이 나의 가사장삼을 빌려 입고 승려 탈을 쓰고 부처님을 팔아 자꾸 죄만 짓는가. (云何賊人 假我衣服 裨販如來 造種種業) 누구든지 머리를 깎고 부처님 의복인 가사장삼을 빌려 입고 승려 탈을 쓰고 부처님을 팔아서 먹고사는 사람을 부처님께서는 모두 도적놈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승려가 되어 가사장삼 입고 도를 닦아 도를 깨우쳐 중생을 제도하지는 않고, 부처님을 팔아 자기의 생활도구로 먹고 사는 사람은 부처님 제자도 아니요, 승려도 아니요, 전체가 다 도적놈이라고 ‘능엄경’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철 ‘방장 대중법어’)
대중을 무섭게 다그친 만큼 성철은 자신에게 엄격했다. 결사 중에도 생식을 계속했다. 쌀 두 홉을 물에 담갔다가 간을 하지 않고 씹어 먹었다. 일체 찬도 없었다. 성철은 이때도 장좌불와(長坐不臥)를 계속했다. 성철의 방엔 목침이 없었다. 누구도 이불 위의 성철은 본 적이 없었다. 수좌들은 성철의 장좌불와가 얼마나 됐는지 손가락을 꼽아가며 헤아렸다. 6년이다, 아니 8년이다, 아마 10년은 됐다며 서로 우겼다. 그러나 누구도 이를 성철에게 묻지 못했다. 성철은 봉암사에서도 상좌를 들이지 않았다. 아직 제자를 둘 나이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봉암사 대중은 누구도 새벽 예불에 빠질 수 없었다. 예불 때에는 이산혜연선사 발원문을 읽었고 108배 참회를 했으며 능엄주를 독송했다. 또 자장율사의 게송을 외웠다. 신라 시대 자장은 나라에서 벼슬을 맡으라고 여러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왕이 칙명을 내려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고 했다. 자장은 선덕여왕에게 시를 지어 자신의 결의를 전했다.
“차라리 부처님 계율을 지키며 하루를 살다 죽을지언정, 계율을 어기며 백 년 동안 살기를 원치 않는다.(吾寧一日持戒而死 不願百年破戒而死)”
대중이 자장의 시를 합송하면 당시의 결기가 살아난 듯 봉암사 경내가 자못 비장했다.
초하루와 보름에는 포살을 했다. 그동안 승려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를 고하지 않았다. 더러는 불교가 참회의 종교임을 알고 있었지만 범계(犯戒)를 어떻게 씻어야 할지 몰랐다. 봉암사의 포살은 청정비구의 길로 나아가는 귀중한 의례였다. 자운이 계를 설하고 모두가 1000배씩 절을 했다. 그렇게 한없이 낮아지고 맑아진 후에 도반 앞에서 죄를 고했다.
“기억나는 것은 금강산에서 온 비구니스님이 참회를 할 때인데 연지, 즉 손가락을 태우고 참회할 때에 청담 스님이 그 방법을 일러주고, 목탁을 치면서 진두지휘하던 장면이 선하지.” (‘아! 청담’ 혜명 스님 인터뷰)
청정한 법의 구름이 도량을 덮고 있었다. 봉암사 결사는 현대불교가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부처님 법대로’ 살아봤기에 현 조계종의 기틀이 잡힌 것이다. 지금도 그 치열함을 후학들이 기리고 따르니 불멸의 족적임이 분명하다. 성철은 하루에 한 장씩 찢는 일력에 봉암사 결사의 소회를 밝혔다.
“고불고조의 유칙(遺勅)을 완전하게 실행한다함은 너무도 외람된 말이기는 하였지만 교단의 현황은 불조 교법이 전연 민멸(泯滅)되었으니 다소간이나마 복구시켜 보자는 것이 주안점이었다. 그리고 교법 복구의 원칙하에 나의 수시 제안이 있을 것인 바, 그 제안에 오점이 발견되지 않는 한 대중은 무조건 추종할 것을 새삼 다짐하고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성철의 제안이란 바로 ‘공주규약’이었다. 봉암사 대중은 이를 실천하여 성철의 표현대로 ‘그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대중 전체의 과감한 노력으로 그 성과는 일취월장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불교사에 큰 획을 그었다. 이로써 한국불교는 봉암사 결사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봉암사 참여 대중을 다시 헤아려 본다.
비구: 성철 청담 자운 우봉 보문 향곡 종수 혜암 월산 응산 홍경 도우 청안 일도 성수 법전 보경 보안 영신 정천 만성 지관 혜안 보일 혜명 혜정 혜연 혜조 의현
비구니: 묘엄 지원 재영 묘찬 응민 오선 혜민 지용 혜일 원명 지현 혜해 수진 묘각 묘명
봉암사 결사에 참여했던 사람 중에서 4종정(청담, 성철, 혜암, 법전)과 7총무원장(청담, 월산, 자운, 성수, 의현, 법전, 지관)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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