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홍장과 성덕 설화
옛날 백제 때 충청도 대흥에 원량(元良)이라는 장님이 살았다.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였던 그는 어찌어찌 하여 나이 사십이 다 되어서야 늦장가를 들게 되었다. 앞을 못 보는 원량을 측은하게 여긴 마음씨 착한 처녀가 원량에게 시집을 온 것이다.
늦복이 터졌는지 아내는 곧바로 잉태를 하였고 딸까지 낳았다. 백제 고이왕 11년(274년)의 일이다. 딸의 이름을 홍장(洪莊)이라 지은 원량은 비록 앞을 보지 못하여 사랑하는 아내와 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하루하루가 꿈길을 걷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얻은 것 같던 원량을 시기하였는지 하늘이 그만 아내를 먼저 데리고 가버렸다. 홍장을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원량은 슬퍼할 틈도 없었다. 젖먹이 딸을 데리고 젖동냥을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키운 홍장은 용모가 뛰어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때로는 앞을 못 보는 아버지의 눈이 되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가 되어주기도 하였다. 어린 나이에도 홍장은 삯바느질을 해가며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어느 날 원량이 동네를 지날 때였다. 길을 가던 스님이 그를 보고 느닷없이 큰 절을 올렸다. 앞을 보지는 못하지만 평생 감각으로 살아온 터라 원량은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훤히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아니 뉘신데 이러시오. 내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소.”
그러자 스님이 말하였다.
“소승은 성공(性空)이라 하외다.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오늘 동네에서 장님을 만날 텐데 그가 장차 대화주(大化主)가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화주라니, 화주라면 스님이나 절에 물건을 바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스님의 말을 들은 원량은 손을 크게 허공으로 내저으며 말하였다.
“아니오, 아니오, 스님. 뭔가 크게 오해가 있는 듯싶습니다. 저는 제 한 몸 어찌하지 못하는 가난뱅이입니다.”
원량이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설명하였으나 스님은 한사코 그에게 화주가 되어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렇게 스님과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온 원량은 근심이 태산 같았다. 비록 가난한 처지이지만 부처님께 공양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가련하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안색이 좋지 못한 것을 눈치 챈 홍장이 연유를 물었다.
“아버지, 안색이 안 좋아보이시는데, 혹 무슨 일 있어요?”
홍장이 묻자 원량은 하는 수 없이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하고 말았다.
아버지 말을 들은 홍장 역시 걱정이었다. 가난하였지만 불심이 깊었던 홍장은 무엇이든 공양을 하고 싶었지만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자신으로서는 가진 것이 몸뚱아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아버지 눈을 뜨게 해달라고 매일 관세음보살께 기도를 하였던 홍장인지라 아쉬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천 개의 손, 천 개의 눈을 가졌다는 관세음보살께 기도하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그날 밤 홍장은 밤새 관세음보살께 다시 기도를 드렸다. 가진 것 없는 자신의 몸이라도 드릴 테니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오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대거 원량의 집으로 찾아왔다. 얼핏 보기에도 중국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원량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하였다.
자신들은 중국 진(晉)나라에서 왔는데, 어느 날 진나라 혜제(惠帝)가 자신들을 부르더니 명을 내렸다고 한다.
“나의 새 황후가 될 사람이 동국에 있을 것이니 그 곳으로 가보라.”
그리하여 배를 타고 이곳 백제 땅에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이끌려 홍장의 집까지 왔다고 한다.
하늘의 뜻이라 여긴 원량 부녀는 사신이 가지고 온 예물을 받아 그대로 성공스님에게 시주하여 절을 짓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눈물로 아버지와 헤어져 중국으로 간 홍장은 진나라 혜제의 황후가 되었다.
황후가 된 홍장은 착한 마음씨로 인해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백제에서와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관세음보살께 기도를 드렸다. 홀로 계실 아버지 눈을 뜨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불심이 깊어도 아버지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홍장은 불상과 나한상 등을 만들어 배에 실어서 백제로 보냈다. 홍장이 보낸 배는 감로사(甘露寺) 앞 나루에 닿았으며, 감로사에 봉안되었다.
훗날 홍장이 다시 관음상을 주조하여 금박을 한 후 돌배에 실어 백제로 보냈다. 홍장이 보낸 배가 낙안포에 도달하였는데, 이번에는 이를 수상히 여긴 수졸들이 다가왔다. 그러자 배가 저절로 그 곳을 떠났다.
홍장이 태어난 지 10년 째 되던 어느 날 옥과에 사는 김씨 집에 딸이 태어났다. 재산은 넘쳐나는데 혼인한 지 10년이 되도록 아이가 없어 김씨 부부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는 아예 체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해 말 부인이 꿈을 꾸었는데, 꿈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다.
“곧 딸을 낳게 될 것이다. 딸을 낳으면 이름을 성덕(聖德)이라 짓도록 해라.”
마치 친정어머니처럼 인자한 모습의 관세음보살은 그 말을 하고는 곧 사라졌다. 꿈에서 깬 김씨 부인은 곧 잉태를 하였고 이듬 해 초가을에 정말 딸을 낳았다. 그리하여 꿈속에서 관세음보살이 일렀던 대로 이름을 성덕이라 지었다.
성덕이가 16세 되던 어느 해, 강가를 거니는데 멀리 배 한 척이 보였다. 놀랍게도 배는 저절로 성덕에게 다가왔다. 사람도 안 보이는데 배가 저절로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오자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배가 성덕이 앞에까지 오더니 멈춰서는 것이 아닌가.
배 안을 살펴보니 놀랍게도 관음상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깜짝 놀라 무릎을 꿇은 성덕은 관음상을 인연의 땅에 모시기 위해 부모님과 함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당시 성덕이 가족이 관음상을 옮기는 도중 쉬었던 곳마다 정자를 세웠는데 대취정, 연봉정, 샘정, 미타정, 율목정, 불휴정, 흥복정, 현정, 삽정, 구일정, 운교정 등이 그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지금의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에 이르러 관음상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그래서 그 자리에 관음상을 봉안하고 관음사를 창건하였다. 백제 분서왕 3년(300년)의 일이다.
원홍장 설화는 심청전의 모태설화로 알려져 있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출처] 원홍장과 성덕 설화|작성자 월간 설화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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