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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는 마음을 나타내는 그림

淸潭 2016. 12. 14. 18:30


서자심화(書者心畵) / 신석정(1907~1974)
    
모필을 잡고 글씨랍시고 써 본 것은 열 살 전후의 일이고 보니, 본격적인 글씨 공부를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어려서 할아버지께서 매일같이 한적(漢籍)을 베끼시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 일이 있고,  좀 숙성한 뒤에는 형님이 동기창의 체첩을 놓고 글씨 공부하는 것을 눈여겨 본 일이 있어

왕희지(王羲之)가 명필이니,옹방강(翁方綱), 악구(岳究), 미불(米芾, 우거질 불), 안진경(顔眞卿)이 어떠니 하는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들어 알게 되었고,

추사(秋史)니 이광사(李匡師)니 이삼만(李三晩)이니 하는 이름도 그 무렵에 귀에 익히 들었던 것이다.
 
집안에 상사(喪事)라도 났을 때에는 부고(訃告) 봉투 한 장 쓰는데도 쩔쩔매던 나의 악필에
자못 이맛살을 찌푸리시고 못마땅해 하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차마 바라보기가 민망스러울 정도였으니 나의 악필도 무던한 편이었다.

그 뒤 악필의 누명만이라도 면해 볼 심산으로 때로는 서투른 대로 붓을 들어 편지 나부랭이를 써보는 만용을 부려보기도 하고, 더러는 당시(唐詩) 줄이나 베껴보기도 했지만 좀체 글씨는 <제 틀>이 잡히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름 있는 서예가의 쳇줄이라도 놓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 보았다면 모르지만, 만년필을 들고 내두르는 식으로 쓰고 보니 천생 글씨가 될 턱이 없다.

한석봉(韓石峯) 같은 명필도 칡뿌리를 가지고 바위에다 글씨 공부를 했다는데
그런 각고(刻苦)의 공정도 없이 글씨가 될 리 없다.

왕희지의 장강(長江)의 물줄기처럼 구김살 없는 전아(典雅) 웅경(雄勁, 굳셀 경)한 필법이야
입신(入神)의 경지에서 비로소 나오는 신운(神韻)이니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동기창의 청수한 운필(運筆)이나 악구의 자유분방한 필법은 그대로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 나는 듯 흘러내려 삼천 척이 되네.
곧  거침없이 써내려 간 멋진 글씨를 과장한 표현임)’의 호기가 엿보일 뿐이다.

어찌 그뿐이랴.이광사의 걷잡을 길 없이 휘두르는 초서(草書)는 그대로 가야금의 잦은 머리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가락이요, 이삼만 또한 왕희지의 계통에서 나온 트집 잡을 데 없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신운이니 오직 재탄 삼탄을 금할 길 없다.

[글씨나 그림을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삶에 큰 즐거움을 추가하는게 아닐까?]

서투른 대로 어느 정도 서예의 오묘한 멋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붓을 들기란 무슨 죄나 저지르는 것만 같아 섣불리 붓을 들어 선뜻 써낼 수 없는 것을 터득하게 되었다.

3년 전에 처음으로 광주에서 시화전을 열게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서툴러도 자작시에 자필로 쓰는 것이 의의가 있으리라 싶어,
내 딴에는 용기를 내어 40여 점을 자필로 전시했다.

시화전을 열던 다음날, 광주방송국에서 대담(對談)의 요청이 있어 그 후의가 고마워 나가게 되었다. 아나운서와의 30분 동안 대담을 예의적으로 그렁저렁 끝내고 난 뒤 여담으로 들어갔을 때, 아나운서가 하는 말이, 이번 시화전은 대단히 호평인데도 글씨가 너무 어려워서 관람자들이 읽기에 힘이 든다는 이야기였다.다행히도 글씨 쓴 사람을 묻지 않아서 그런대로 안심이 되었으나 내심 나는 몸둘 바를 몰랐었다.

40여 점의 작품이 모조리 나가고 모자라서 5, 6점을 추가했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그 작품을 걸어 놓고 때로 읽어나가다가 모르는 글자에 부딪히면
글씨 쓴 나에게 책임을 돌리기에 앞서 무슨 명필이나 대하는 듯이
몰라보는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릴까 싶어 민망한 생각이 떠오를 때가 많다.
 
한 번은 부산에 계신 K시백(詩伯)을 괴롭힌 일이 있다.

중국산 옥판선지(玉板宣紙)를 서울에서도 구할 길이 없어 부탁 편지를 낸 일이 있었는데,
그 뒤 전주에 찾아준 K시백의 하는 말이, 그때 보낸 편지는 두세 번 읽었는데도 한 자만은 지금도 알 수가 없더라는 이야기였다.

다행히 한 자를 몰랐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저녁 굶은 초(草; 편지)가 됐던들
옥판선지는커녕 편지도 구할 수 없을 뻔했다. 작년 이맘 때 일이다.
수필집을 보내 온 K여사에게 사례 회신을 띄웠더니, 다시 그 편지에 회답이 오기를

“선생님의 옥필을 틀에 넣어 제 방에 걸어 놓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사연이었다.
 
하찮은 편지 몇 줄을 틀에 넣어 걸어 놓겠다는 그 구절을 막상 읽었을 때,
나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하게 상기되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보다는 차라리 냉한서말(冷汗식은땀三斗),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나 해 둘까......

이렇게 되고 보니 글씨란 함부로 끄적거릴 게 못 된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느꼈을 따름이다.
 
‘언자심성(言者心聲)’이란 말이 있다.
<말이란 바로 그 사람의 마음의 소리>라는 뜻이리라.

말을 조백(早白; 검은색과 흰색을 아울러 이르는 말. 옳고 그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교양>을 말하는 것이다. 서예에 있어서도 글씨를 가리켜
‘서자심화(書者心畵; 글씨는 마음을 나타내는 그림)’라 하니, 어찌 섣불리 붓을 들어 함부로 내두를 수 있겠는가 말이다.
 
요컨대 그 사람 됨됨이 속되지 않으면 글씨 또한 속기(俗氣)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잘 쓰고 못 쓰는 것은 그 천품과 공정에 맡길 일이되 탈속의 경지에 이르기란 지난(至難)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에 추사(秋史)의 행서(行書) 몇 폭을 구하게 되었다.
평생의 숙원을 이루게 되어 나 혼자 환호작약한 일이 있다.

가끔 좁은 서실에 걸어놓고 볼 양이면, 왕희지의 귀족적 서체보다 차라리 앞선
그의 탈속한 필법에 다만 망연자실할 따름이다.
 
그러기에 초기에 동기창의 필법을 따르다가  옹방강을 거처
추사체를 정립했으니, 추사옹의 <청정강직(淸靜剛直)한 인격>이
일자일획에서 생동하는 것을 볼 때, 과연 ‘서자심화’ 그대로가 아닌가 싶다.

곧 병풍으로 꾸며 <그 괴석 같은 글씨>에 의지하고 앉아서
창 밖에 눈오는 소리라도 들으면서 조용히 여가를 달래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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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정(1907~1974)

전북 부안 출생, 본명은 석정(錫正).
아호는 석정(夕汀, 물가 정).

1924년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하면서 시작(詩作) 활동을 개시함.
작품집으로 <촛불> <슬픈 목가> 등이 있음.

거의 줄곧 향토[전북]에서
시작(詩作)과 교육, 후진 육성으로 한평생을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