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昌慶宮)궁궐배치에 담긴 비밀
창경궁(昌慶宮)은 조선 후기 역사적 사건이 가장 많이 발생한 궁궐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은 숙종 시대 장희빈이 사약을 받은 장소이면서,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한 비운의 현장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명칭을 격하시키는 동시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고, 일본의 국화인 벚나무를 대량으로 심어 밤 벚꽃놀이 장소로 활용하기도 했다.
아쉬운 것은 해방 후에도 휴식공간이 거의 없었던 시대적 상황 때문에 창경원은 최고의 위락공간 및 놀이동산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1980년 중반 정부는 민족정기의 회복 차원에서 ‘창경궁 복원 사업’을 단행했다. 먼저 그 명칭을 창경원에서 창경궁으로 환원했으며, 동물원은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심었던 수많은 벚나무는 모두 국내 수종인 소나무, 느티나무 등으로 교체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재정비 작업을 통해 궁궐로서 면모를 갖춘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적 제123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창경궁은 당초 생존해 계시는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세종이 지은 ‘수강궁(壽康宮)’이라는 궁터였으나, 성종 15년(1484)에 살아 계신 세 분의 대비를 위해 그 터에 주요 건물인 명정전, 문정전, 통명전 등과 같은 주요 전각들을 완공하면서 이름도 창경궁이라 명명했다. 그 후 보완공사를 거쳐 궁궐다운 규모를 갖추게 된 창경궁은 창덕궁의 부족한 기능을 보완하는 궁궐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창경궁은 궁궐로서 독립적인 규모를 갖추기는 했지만 당시에 왕이 기거하면서 정사를 보는 궁궐이라기보다는 왕실의 대비들이 거주하는 내전 기능이 강한 일종의 ‘대비궁’ 역할을 담당한 궁궐이라 할 수 있겠다.
- 조선의 궁궐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1616년)이며, 동향이 특징인 창경궁 명정전. 국보 제226호. / 조훈철
그러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과 함께 불타 버렸다. 이후 광해군 8년(1616) 창경궁은 복구가 되었지만 몇 차례의 대화재로 인하여 내전 구역의 많은 건물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건물은 화재에서 살아남은 것들과 순조34년(1834)에 다시 지은 건물들이다. 이들 가운데 명정전(明政殿)은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창경궁 배치의 핵심은 그 좌향(坐向)에 있다. ‘군주는 남면’이란 유교 예제에 따라 기존에 조성한 궁궐인 경복궁과 창덕궁은 모두 남향(南向)을 하고 있다. 그러나 창경궁은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을 동향(東向)으로 배치를 했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되어버린 창경궁을 복구할 때 광해군은 명정전의 좌향을 남향으로 할 것을 어명으로 내리지만 유교 예제에 정통한 유학자들조차 정전 건물의 남향배치를 반대한다는 상소들이 조선왕조실록에도 언급되어 있다. 남향을 반대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밝히고 있지 않지만 치열한 풍수 논쟁이 실록에 기록되고 있는 것을 감안해볼 때 결국 유학의 이론과 반하는 풍수에서 그 답을 찾는 유학자들의 고뇌가 읽혀진다. 이런 현상은 조선 초기 남대문을 서쪽에 치우치게 건설해 놓고 실록에서 도성 축조와 각 문의 이름을 언급할 때 ‘정남(正南)은 숭례문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처럼 언급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