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은 기념일뿐인가
한글을 만들 당시인 조선조 초기에 한글창제를 반대한 이도 여전히 당대 최고의 선비들이자 학자들이었다. 한자를 진서(眞書)라 하여 떠받드는 반면, 한글은 언문(諺文)이라 하여 여성들의 '암클(안글)'이나 무지렁이들의 뒷글 정도로 취급하였다. 요즘도 그때나 크게 다를 바 없다. 배운 사람일수록 외국어를 진서처럼 떠받들고 있다. 글깨나 읽은 선비들이 한문 좋아하다가 한글만 익힌 무식한 사돈한테 당한 이야기를 한 번 보자.
옛날 어느 시골에 두 형제가 살았는데, 아우의 딸이 혼인을 해서 상객을 가야 할 처지였다. 이때 형이 나서며, 아우는 무식한 탓으로 상객을 가면 집안망신을 시키기 꼭 알맞다는 것이다. 그래서 형은 자기가 아우 대신 상객으로 가야 한다고 나섰다. 그러나 아우는 형의 제안을 듣지 않고서,
“내 딸을 내가 시집보내는데 내가 상객으로 가야지 형님이 왜 가십니까? 그것은 안되게 습니다.”
하고, 기어코 아버지 노릇을 하겠다며 상객을 갔다.
사돈댁 사랑에 들어가니 선비들이 한 방 그득히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어영부영하다가는 크게 당할 것 같아서 인사를 마치고 자리를 잡고 앉자말자 먼저 선수를 치기로 하였다.
“보아하니 사돈 일가에는 글깨나 안다는 선비들이 많은 모양인데, 우리 문자 알아 맞추기 시합이나 한번 해봅시다.”
안 그래도 좌중의 선비들은 새 사돈을 욕보일 작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참인데, 역시 좋단 말이지.
“그것 참 좋은 제안이요.”
“그럼 제가 먼저 질문을 하겠습니다. 그 입 구(口) 밑에 한 일(一)한 글자가 뭔 자요?”
이놈 선비들이 아무리 머리를 짜내 봐도 알 수 없고 옥편을 뒤져봐도 그런 글자는 없단 말이지. 그러니 묵묵부답일 수밖에는.....
“아니, 초보자들이 배우는 글자도 모른단 말이요. 마먀머며 모묘무뮤 멀며믈므하는 ‘므’자가 아닙니까.”
이 사람들이 할 말을 잃었거든. 글자라 그러면 으례 한자인 줄 알았는데 한글 뒤풀이에 나오는 초보적인 글자를 물을 줄은 몰랬지. 무식한 아우는 '옳구나, 됐다!' 싶어서 다시 질문을 했다. 이번에는 두 번 째니까 좀 어려운 문제를 내겠다고 하면서,
“여섯 육(六) 밑에 한 일(一)한 글자가 뭔 잡니까?”
그러니 좌중에서 얼른 눈치를 채고서 즉석에서 답이 나왔다.
“아 그건 한글 뒤풀이에 차챠처쳐 초쵸추츄 츠치할 때 '츠'자입니다.”
“이런 선비님 네들 큰일났구만요.”
“큰일이라니요? '츠'자가 맞지 않습니까?”
“허허 한자로 물으니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은데, 내가 그럼 한글로 다시 물어보지요. '오' 밑에 '요'한 글자가 뭔 잡니까?”
더 어렵거든. 도저히 알 수 없단 말이야. '여섯 육' 밑에 '한 일'한 글자나 '오' 밑에 '요'한 글자나 같은 글자란 말인데 알 수가 있어야지.
“한글을 물어도 모르고 한자를 물어도 모르니 그래가주고서 무슨 선비랍시고 글 자랑들을 하시겠습니까.”
“도대체 그게 무슨 글자요?”
“허허 참! '설 립(立)'자 아닌가요. '여섯 육' 밑에 '한 일'해도 '설 립(立)'자요, '오(ㅗ)' 밑에 '요(ㅛ)'해도 설 립(立)자!”
그렇그만. 딱 맞단 말이지. '설 립'자도 모르고 엉뚱하게 '츠'자라고 했단 말이야. 선비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거든. 이 때다 싶어서 얼른 말귀를 돌렸다.
“한글 자모도 모르고 한자 문리도 터지지 않은 어른들하고 무슨 글 시합을 하겠습니까. 고만 술이나 한 잔씩 합시다.”
하고서는 어색한 글 시합 판을 술자리 판으로 바꾸어 버렸다. 이렇게 상객 노릇을 잘 하고 집으로 돌아와 자초지종 이야기를 하니 형은,
“자네가 내보다 낫네. 공부만 시켰으면 나보다 훨씬 나을텐데 ....”
하고서 탄복을 거듭 했다.
무식한 것으로 알려진 아우가 한글로 터득한 지식만으로도 한문에 통달했다는 선비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럴 수 있는 근거는 한글 자모의 과학성에서 비롯되었다. 20여개의 한글 자모의 조합으로 무궁무진한 문자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한자도 두 개 이상의 문자로 회의자(會意字)를 이루는 경우가 있긴 해도 상당히 제한적이다. 따라서 일일이 수많은 한자를 익혀야 하며, 필요에 따라 복잡하고 어려운 문자를 계속해서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이런 이치를 알고 있으면 한글의 사무자동화 작업은 간단하되 한자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야기 속의 아우는 한글의 이치를 쉽게 터득한 터이므로 어려운 한자에 끄달려 있는 유식한 선비들을 마음껏 제압하였다.
무식한 아우가 유식한 선비들을 당당하게 제압할 수 있었던 힘은 그의 삶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남들이 무식하다 하여도 한글 정도는 익숙하게 익힌 터이므로 선비들 앞에 꿀리지 않는 자부심이 있었으며, 비록 무식하여 망신을 당할지라도 딸의 아버지 구실을 포기할 수 없다는 마음가짐이다. 사돈댁네가 선비집안이라고 하여 아버지 구실을 마다하고 다른 선비를 상객으로 내세우는 것은 순전히 위선이자 체면치레일 뿐이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주체성을 포기하고 단순히 사돈댁 사정에 맞추어가는 종속적인 삶이 되고 만다. 그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다. 과감하게 선제공격을 하여 좌중을 제뜻대로 휘어잡은 힘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한글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도 무식한 아우의 마음가짐과 슬기에서 본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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