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겸손 아는 두 名將
이승건기자
입력 2015-04-13 03:00:00 수정 2015-04-13 09:16:33
졌다, 내 책임이다… 선수들아 고생시켜 미안
‘8連覇 실패’ 프로배구 삼성화재 신치용 감독
이겼다, 선수 덕분이다… 꼴찌때의 기억 잊지 말자
‘3連覇 달성’ 프로농구 모비스 유재학 감독

○ 우승 감독만 아는 비애
▽신 감독=우승을 축하한다. ‘만수’(萬手·만 가지 수)라는 별명대로 정말 대단하다. 2020년까지 5년 재계약을 한 것도 축하한다.
▽유 감독=그런 말씀 마시라. 선배님은 그야말로 전설이다. 다음 시즌에는 다시 정상에 오를 것이다.
▽신 감독=우승에 실패한 뒤 사흘 동안 집에 있으며 생각했다. 이번 시즌 우리는 ‘원 팀’이 아니었다. 외부에서 영입한 선수들이 팀에 녹아들지 못했다. 다 내 책임이다. 선수들에게 그랬다. ‘고생만 시키고 우승 못 시켜 미안하다’고.
▽유 감독=좋은 신인들을 뽑지 못하고도 정규리그 1위를 한 것은 대단하다. 우승은 운도 따라야 한다. 개막하기 전에 실력은 있지만 분위기를 해치는 외국인 선수를 퇴출시킬 때만 해도 우승할 생각이 없었다. 다행히 새 외국인 선수가 잘 따라줬다.
▽신 감독=우승을 못한 건 충격이었지만 편한 것도 있다. 일단 귀찮은 일들이 줄었다(웃음). 무엇보다 욕을 덜 먹은 것이다. 우승할수록 욕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엄청난 스트레스다. 그건 여러 번 우승해 본 감독들만 안다.
▽유 감독=선배님은 주로 우승만 했으니 그럴 것이다. 나는 다른 팀에서 꼴찌도 했고, 이 팀에서도 8위, 9위를 해 봤다. 그래도 무슨 말씀인지 안다. 겸손한 자세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 감독을 을로 보지 말라
신 감독은 21년째 같은 팀을 맡고 있다. 1998∼1999시즌 사령탑에 데뷔한 유 감독은 2004∼2005시즌부터 모비스를 맡고 있다. 실업배구 시절 8연패를 달성했던 신 감독은 프로에서도 8회 우승했고, 유 감독은 5회 우승했다. 각 종목 최다 우승 감독이다. “겸손해야 한다”고 몸을 낮췄던 두 사람이 갑자기 “감독은 을(乙)이 아니다”라며 한목소리를 냈다.
▽신 감독=감독은 구단, 선수, 심판에 치인다.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은 다 진다. 유 감독이나 나는 우승을 몇 번 해서 ‘을 중의 갑’은 되지만 감독은 정말 힘든 자리다. 모비스나 삼성화재는 그렇지 않지만 어떤 팀은 감독을 소모품으로 여긴다.
▽유 감독=맞다. 구단을 제대로 운영하려면 유능한 감독을 영입해 성적을 내야 하는데 요즘에는 말 잘 듣는 감독을 선호한다. ‘감독은 을이고 구단은 갑’이라고 생각한다.
▽신 감독=지도자로서 중요한 건 정도(正道)를 가는 것이다. 구단이 감독을 을로 여기면 감독이 소신 있게 정도를 걸을 수 없다. 정도를 가는 감독이 성공하게 돼 있다.
▽유 감독=선배님은 팀 운영뿐만 아니라 평소 사람 관리를 잘하는 것 같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다. 싸울 때는 싸우더라도 구단과 사이는 좋아야 한다. 그래야 선수들의 운동 여건이 나아진다.
○ 멈추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
▽신 감독=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인지 요즘처럼 아내(전미애 대한농구협회 이사)와 사이가 좋은 적이 없다. 시즌 도중 “감독 하기 너무 어렵다”고 하니 “돈 벌어야지”라고 농담을 하면서도 “힘들면 그만두라”고 하더라. 고마웠다.
▽유 감독=14년째 기러기 아빠다. 감독 생활 초반 성적이 부진할 때 혼자 많이 울었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고, 같이 있을 시간도 없어 가족을 미국으로 보냈다. 그때만 해도 연봉이 많지 않았다. 힘들다고 할 때 아내가 “접시 닦을 각오가 됐으면 언제든 오라”고 했다. 농구에 전념할 수 있게 아이들을 잘 키워준 아내가 고맙다.
▽신 감독=나도 한국전력 코치 시절 어려웠는데 유 감독도 그런 시절이 있었네. 얘기했지만 유 감독을 시기하는 목소리가 많아질 거다. 그럴 때면 연락해라. 소주나 한잔 하자.
▽유 감독=선배님도 이제 여유를 좀 가지시라. 지금까지의 업적만 해도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 미애 누님(유 감독은 농구계 선배인 전 이사를 이렇게 불렀다)께도 잘해 주시고.
대화는 5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테이블 위에 술병이 수북이 쌓였지만 두 명장은 끝까지 흐트러짐이 없었다. 자리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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