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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사월의 미, 칠월의 솔'―서귀포

淸潭 2014. 3. 22. 21:26

그대, 희망 없는 사랑에 몸 던져본 적 있는가

 

백영옥·소설가

 

입력 : 2014.03.22 03:40

소설 '사월의 미, 칠월의 솔'―서귀포


	 [Why] [그 작품 그 도시]
제주도의 봄은 샛노란 유채꽃으로 가득하다. 김연수 단편 ‘사월의 미, 칠월의 솔’주인공 ‘팜’이모는 유부남 감독과 제주도 서귀포에 살림을 차린다. 해외여행이 어렵던 시절 제주도는 두 사람이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었다. / 조선일보 DB

친구 대부분이 미혼이다. 하지만 결혼한 친구 중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결혼했지만 아이를 낳지 않은 여자는 이 나라에선 노처녀만큼이나 별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살면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양육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이는 또 얼마나 예쁜지에 대한 장황한 연설을 들었으니까 말이다. 그때마다 내게도 할 말이 있었다. 노후를 위해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엄마에겐 아이가 보험이냐고 따졌고, 외로움 때문에 아이가 필요하단 친구에겐 우리가 노인이 될 때쯤이면 실버타운이 활성화돼 탁구나 테니스 등 노인들의 체육 활동이 더 활발해질 거란 얘기로 못을 박았다. 그런데 김연수의 단편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의 이 구절을 읽다가 문득 목이 탁 막혀 버렸다.

"죽는 순간에 마지막으로 보게 될 얼굴이 누구의 얼굴일지 나는 정말 그게 궁금했어.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이 말이야. 뱃속에 있는 아기들도 그런 생각을 할 게 아니겠니? 밖에 나가면 도대체 어떻게 생긴 작자의 얼굴을 제일 먼저 보게 될까? 양수 속을 뒹굴다가 그런 의문이 들겠지…. 어쨌든 그러면 내가 걔네들이 있는 배에다 대고 말해줄 수 있어. 왜, 태아들도 다 듣고 있다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면 좋아하고, 밉다고 말하면 싫어하고, 이렇게 말할 거야. 일단 거기서 건강하게 나오는 게 제일 중요한데, 나오고 나면 좋든 싫든 네가 처음으로 보게 되는 얼굴이 있을 것이야. 그게 누구냐면 바로 네 엄마란다. 그 엄마는 죽을 때 아마 제일 마지막으로 네 얼굴을 보게 될 거야. 인생은 그런 식으로 공평한 거란다…. 그러니까 죽는 순간에 마지막으로 보게 될 얼굴이 평생 사랑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면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더라도 그건 불행하다고 할 수밖에 없어. 그러니 무조건 결혼을 하고, 그다음엔 아이를 낳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전부야."

특히 "죽는 순간에 마지막으로 보게 될 얼굴이 평생 사랑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면…"이란 구절에서 나는 꽤 심란해졌다. 이혼도 재혼도 흔한 요즘, 남자와의 영원한 사랑을 믿는 사람은 없어졌지만, 아이만큼은? 다를 것 같았다.

뉴욕으로 유학을 떠난 여자. 그녀 없인 안 되겠다 싶었던 남자는 3개월 후 비행기를 잡아타고 뉴욕 플러싱에 있는 그녀의 하숙집으로 달려간다. 학교에서 돌아온 그녀의 비명! 사랑은 그렇게 다시 한 번 불타올랐다. 그해 여름 그는 그녀와 함께 뉴욕에서 렌터카를 빌려 미국의 95번 도로를 질주했다. 플로리다의 세바스찬에 사는 '팜' 이모네 집에 가기 위해서였다. 이틀 동안 젊은 연인들은 모텔에서 잔 시간을 제외하면 끊임없이 이야기했고 쉴 새 없이 운전했다.

사실 이 이야기는 팜 이모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지금은 플로리다에서 췌장암 말기 선고를 받은 미국인 남편과 결혼해 살고 있지만 젊은 시절 한때 영화배우로 활동했던 이모는 당시 영화를 찍던 유부남 감독과 정분이 나 그만 제주 서귀포시까지 내려가 살림을 차린다.

"그때는 외국으로 나갈 수가 없었던 시절이니까 나름 갈 수 있는 한 가장 먼 곳까지 간 셈이지. 그렇게 서귀포시 정방동 136-2번지에서 바다를 보면서 3개월 남짓 살았어. 함석지붕 집이었는데 빗소리가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우리가 살림을 차린 사월에는 '미' 정도였는데 점점 높아지더니 칠월이 되니까 '솔' 정도까지 올라가더라. 그 사람 부인이 애 데리고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시' 정도까진 올라가지 않았을까?"

감독은 시한부 인생. 조용조용 수줍음 많은 사람이 애인과 야반도주할 용기를 낸 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안타까움 때문이었는데, 감독의 본부인이 내려와 서귀포의 '덕성원'에서 함께 짬뽕 한 그릇을 먹기 전까지 이들의 불안하면서 행복한 동거는 계속된다.

사람은 두 부류가 있다. 희망 없는 사랑에 몸을 던져본 적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랑에 목숨 건 체험은 분명히 그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흔들었을 것이고, '선택'이란 말의 본질을 바꿔놓았을 것이다. 그런 사랑을 겪어낸 사람이라면 '선택이란 선택하지 않은 것을 감당해내는 일'이라고 말할지 모를 일이었다.

팜 이모는 그런 인생을 살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죽는 소박한 꿈조차 이루지 못했던 삶. 사랑했던 사람이 모두 자기보다 먼저 죽는 삶 말이다. 어쩌면 그녀는 "불륜녀니 말로가 저리 돼도 싸다"는 주변 입방아의 자장(磁場) 안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런 질문이 가능해진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뿐이다. 단 한 번뿐인 인생 앞에서 도덕은 무엇이며, 또 윤리란 무엇인가. 어쨌든 팜 이모는 누구의 인생도 아닌 스스로 선택한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았고 그 삶을 책임지고 감당했다.

아이를 낳는 것 역시 선택이다. 아이를 낳지 않은 삶을 감당하는 것 역시 선택인 셈이다. 누구에게나 유독 취약한 계절이 있다. 내겐 벚꽃이 피는 4월이 그렇다. 4월이면 집 안에 앉아 있을 수가 없을 지경으로 마음속에서 바람이 분다. 그래서 나는 4월이면 제주도에 갔다. 생각해보니 서귀포의 덕성원에서 꽃게 짬뽕을 먹은 적도 있다. 불행히도 내겐 기억나지 않는 맛이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었으니 올 4월, 제주에 간다면 덕성원에 한 번 더 가볼 거란 건 분명하다. 팜 이모가 먹던 바로 그 짬뽕 맛을 기억하려고 애쓰면서!


	 [Why] [그 작품 그 도시]

●사월의 미, 칠월의 솔―김연수의 단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