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강에서 달을보다]보현사신협 상임이사장 지성 스님
- 매서운 설한풍인들 수좌 선기 흔들 수 있겠는가
- 2010.11.15 11:44 입력 발행호수 : 1072 호 / 발행일 : 2010-11-15
1959년 혜진 스님 은사로 출가
토굴 정진 통해 무상-공 체득
2004년 동화사에서 열린 ‘담선대법회’는 참으로 신선했었다. ‘선을 놓고 왈가왈부 따지는 게 아니다’라는 통념을 완전히 뒤집었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와 남·북종선, 육조단경 등의 사상과 실천, 조사선과 간화선의 성립과 수행체계에 대한 집중적인 논의가 이뤄졌다. 한국 간화선 수행에 대한 문제점을 짚고 나아갈 방향까지 밝혀 한국의 선사상을 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한 큰 걸음이었다.
당시 주지직을 수행하던 지성 스님의 원력이 아니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일이었다. 이 뿐인가. 담선대법회 직전에는 ‘화엄논강무차대법회’를 열었고, 담선대법회 직후에는 ‘계율대법회’를 열었다. ‘계정혜’에 대한 나름대로의 고민에서 비롯된 ‘야단법석’이 세 번의 대법회였던 것이다. 은해사 주지도 역임한 바 있는 스님이 동화사 주지를 맡으며 이러한 대법회를 연 것은 무엇보다 출가본사에 대한 애정에 기인했다.
지성 스님은 1959년 동화사에서 혜진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주지’하면 ‘사판’이라는 예단에 지성 스님이 수행을 등한시 했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판이다. ‘사판’에 뛰어들기 전에는 그 누구보다 은산철벽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판’의 ‘수좌’였다. 출가 직후 불영사에서 첫 결제를 마친 스님은 오대산 백석산으로 향했다. ‘희석산’이라고도 불렸던 이 산에서 스님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암자 하나를 발견했다.
“암자라 하기에도 초라하지만 한 칸짜리 송판 집에 주먹 크기의 부처님을 모셨으니 절입니다.”
스님은 장터로 가 톱이나 낫, 괭이 등의 장비와 냄비 하나, 간장 한 되, 쌀 한 말을 등에 지고 암자로 올라와, 물을 구하기 쉬운 곳에 다시 터를 잡았다. 땅을 고르고, 나무 몇 개를 칡넝쿨로 이리저리 엮어 기둥을 세웠다. 그런 다음, 쇠풀로 지붕을 덮었다. 그리고는 앉았다. 주변은 말 그대로 적막강산이요, 세상에서 홀로 뚝 떨어져 나온 느낌이었다. 누추한 토굴이지만 이름만큼은 멋지게 지었다. ‘염화실’이다.
동짓날이 되자 주변 환경이 급속히 변했다. 사흘간의 매서운 설한풍에 눈은 무릎을 넘었다. 그러나 동장군의 기세라도 수좌의 선기를 꺾지는 못했다. 설한풍의 칼날 같은 바람소리도 화두 앞에서는 한 여름 산사에 부는 청량풍일뿐이었다. 그러나 한파가 극도에 이르자 상황이 달라졌다.
“한파에 우물이 고갈되었던 겁니다. 좌선만 할 수 없게 된 셈이지요. 매일 물과의 싸움을 한판 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눈 많은데 물 걱정은 왜 하냐?’ 하겠지만 아닙니다. 솥에 눈을 한 아름 넣어 녹여봐야 가뭄에 여우비 지나가듯 요만큼 나와요. 주변 여건에 선심(禪心)이 무너지려 할 때마다 석우 스님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화엄-담선-계율주제 법회 화제
계정혜 실천 위한 고뇌 속 결실
동화사에서 석우 스님을 모실 때 일이란다. 삭발날 노스님의 등을 밀어드리다 깜짝놀랐다. 엉덩이 한 곳이 유난히 딱딱하고 까칠까칠했다. 가죽과 살이 엉덩뼈에 말라붙어 딱딱해진 것이다.
“선요에 칠표파단(七標破斷)이란 말이 있습니다. 좌복 일곱 개가 구멍이 나고 살이 터지고 뼈가 으스러져도 신심은 호리(毫釐)만큼도 동요치 않고, 참구에 참구를 거듭해야만 삼매에 든다는 의미입니다. 석우 스님의 수행력을 찬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동결제를 마친 스님은 다시 ‘독수리가 알을 품은 형국’이라는 연유로 이름 지어진 축서사로 향했다. 퇴락한 법당 한 채와 세 칸짜리 요사채만 있었다. 수좌에게 공손히 인사를 건넨 주지는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수행정진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의사표시다.
“다 떨어진 누더기에 한 사발의 밥과 간장으로 주림을 가리는 것이 수행인이지만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무한한 자유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스님은 스스로 백장청규에 입각해 직접 호미를 들고 밭을 일구며 2년을 보냈다. 이후 반용사에서 『화엄경』을 공부하고, 심적토굴에서 도반 석우 스님과 함께 정진했다. 찧은 밤가루가 주식이었고, 토굴 방바닥엔 가마니 두 장이 고작이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공부를 하려면 삼도 즉, 도를 가진 선지식과 도량 그리고 도반을 만나야 한다고 했는데 수승한 도반 석우 스님을 만났으니 그 환희야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겨울 어느 날, 지성 스님은 밤나무를 오르다 떨어졌다. 어깨가 으스러지는 듯했다.
“화두는 도망가고, 정말 이토록 어려운 구도행각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깊은 회의가 자리를 대신 했지요. 극심한 통증에 며칠을 누워 있어야만 했습니다. 며칠 뒤 석우당의 한 마디가 떨어졌어요.”
석우 스님이 지성 스님에게 물었다. “무릎이 깨져 선혈이 낭자할 때 감정의 추이가 어떠합디까? 비(悲)에서 희(喜)로 아니면 허탈에서 체념으로, 아니면 좌절에서 초극으로,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단무심(但無心)이었습니까?”
“고행이 꼭 필요한가라는 회의와 함께 그런 회의에 빠진 제 자신이 모멸스러웠지요.”
“스님은 좀 더 철저하게 고행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스님의 고행은 고행이 아닌 희생에 불과해요. 위선입니다.”
문득 부처님이 단식고행을 거둔 상황이 스쳐갔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더 강했다. ‘최소한의 육체적인 조건에 응하면서 최대한의 정신적인 계발을 도모해 보려는 것이 토굴생활’이라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상호간의 탁마가 아닐 수 없다.
어느 여름날. 약초를 캐고 돌아오는 길에 석우 스님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간신히 부축해 토굴로 돌아왔으나 토굴에는 비상약이 없었다. 맥은 이미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산은 이미 어둠으로 가득했지만 산을 내려가 약국으로 달려갔다. 자리를 비운 사이 석우 스님이 세상을 뜰 수 있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석우당! 아직 가면 안 돼요. 해야 할 공부가 얼마나 많은데….’
돈이 없으니 품속에 간직해 두었던 회중시계를 맡기고 약과 주사를 샀다. 토굴에 도착 해 보니 다행이도 석우 스님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학생 때 배운 기억을 되살려 주사를 놓았다.
“삶 속에 죽음이 내포되어 있음을 새삼 알게 되었지요. 삶이 죽음을 거느리고 있음을 망각하지 않는 것도 수행이라는 사실 하나를 깨달은 하루였습니다.”
회중시계! 지성 스님이 석우 스님의 약값을 위해 맡길 수밖에 없었던 회중시계에는 은사 혜진 스님의 제자에 대한 사랑과 가르침이 스며있었다. 처음으로 토굴정진을 위해 길을 떠날 때 은사 혜진 스님은 산문 밖까지 배웅해 주며 품속에 간직하던 회중시계를 꺼내주며 당부했다.
“투철한 신심과 발심이 없는 수좌가 토굴생활을 하면 타락하기가 십중팔구일세. 하지만 무용의 용(用)에 입각해 무제약의 제약을 자득할 수 있다면 견성할 수 있을 걸세. 혹여 나태와 해이가 생길 때마다 이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초침이 돌아가듯 자네도 간단없이 정진하길 바라네.”
시계는 일정한 시간을 두고 태엽을 감아야 하듯, 제자도 일정한 시간을 두고 항상 점검해 보라는 당부였던 것이다.
“은사 스님은 ‘시계를 들여다 볼 필요가 없어졌을 때, 그래서 시계를 들여다보는 시간까지 정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수좌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회중시계는 지금 제 마음 속에 있고, 초침은 지금도 돌고 있습니다.”
500억 원 자산 규모 보현사신협
10년 후 불교은행으로 성장 발원
토굴 생활 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은사 스님의 가르침대로 잘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지성 스님의 선기는 오랜 동안의 토굴정진을 통해 형성됐음을 알 수 있다. 지성 스님의 선적 직관력과 추진력은 은해사와 동화사 주지를 비롯한 사판의 길에서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올해로 20주년을 맞은 ‘보현사신협’이다. 현재 500억 원 규모의 자산을 확보하고 있으며, 조합원만도 8000여 명에 이른다. 20년 신협 역사에서 500억 규모의 자산이 ‘큰 규모’는 아니라고 볼 수 있겠지만 교계 현실을 감안하면 이는 대단한 성과다.
지성 스님이 신협 창립을 제기할 때 사람들은 ‘스님이 고리대금업까지 하냐’는 비난과 ‘스님이 신협해서 성공하겠느냐’는 힐난까지 들었었다. 하지만 한 번 옳다고 결정하면 끝까지 밀어붙이고 마는 지성 스님의 선기가 있었기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현사신협’의 태동은 스님이 은해사 주지 당시 결성했던 ‘팔공승가회’와 연관이 깊다.
당시 대구에는 ‘사암주지연합회’가 있었는데 불교 일을 한다 해도 연합회가 허락하지 않으면 진행할 수 없는 일이 많았다. 이를 그냥 두고만 볼 지성 스님이 아니었다. 팔공산을 중심으로 한 대구 지역의 조계종 공찰 주지 스님과의 긴밀한 협의를 통해 ‘팔공승가회’를 조직해 회장을 맡고는 조직적인 포교활동에 들어갔다. 당시 유행처럼 번졌던 방생법회도 한 번 하면 버스만도 200대를 동원해야할 정도였다.
규모가 큰 방생법회였던 만큼 몇 년 동안 진행해 놓고 보니 ‘1억 원’이라는 큰돈이 모였다. 이 돈의 용처를 팔공승가회 스님들과 논의 한 결과 ‘신도 분들이 낸 돈이니 신도에게 다시 회향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대구에 불교대학을 설립했다. 아마도, 대원불교대학과 전북불교대학에 이은 세 번째 불교대학일 것이다.
팔공승가회도 해체 위기를 맞았다. 공찰 주지 모임이다 보니 스님이 자주 바뀌고, 이견도 돌출됐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원각 스님이 ‘불교신협’을 설립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신협을 통해 교계 발전은 물론 사회역할에도 이바지 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마음이 닿아 밀어 붙였다. 기존 신협들의 고발이 잇따르고, 비난과 힐난에 많은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스님이 먼저 반대하니 도와주려 했던 신도분들도 적극 나서지 않았습니다. 신뢰성이 없는데 그 누가 돈을 맡기겠습니까.”
하는 일 마다 불공드리는 마음(事事佛供)으로 정성을 다할 뿐이었다. ‘만인이 한 사람을 위하고, 한 사람이 만인을 위하는 것이 신협정신’이라는 진심을 사람들에게 전했다. 조합원 8000여명은 그렇게 모였다. 지성 스님의 참다운 원력과 이를 뒷받침한 도반, 신협 임직원이 마음을 모아 일궈낸 쾌거다. 불사를 하다가 재정난에 부딪힌 전국의 사찰이 보현사신협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보현사신협 설립취지를 거스른 적이 없었기에 지난 20년의 역사가 가능했다. 부처님의 자리이타 정신을 우리 지역에서 실현하는 것, 지역불교 나아가 한국불교의 발전에 이바지함은 물론 지역 사람들의 생활안정과 경제적 자립에 이바지 한다는 대원칙을 지금도 고수하고 있다. 지성 스님은 단호하게 말한다. “주식, 채권, 부동산 투자는 하지 않습니다. 물론 큰 수익을 올릴 수 있겠지만 이는 우리 설립 취지와 맞지 않습니다.”
보현사신협은 앞으로 10년 후인 30주년 즈음엔 자산 1000억 규모의 ‘불교은행’으로 거듭나겠다는 당찬 포부를 갖고 있다. 그렇다고 욕심을 내겠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저희는 주춧돌을 놓고자 할 뿐입니다. 이 기반을 토대로 명실상부한 불교은행이 태동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좋은절 개원해 이주노동자 지원
수행-포교, 후순위 있을 수 없어
지성 스님은 또 하나의 길을 걷고 있다. 한·몽골불교협회를 통해 해외포교에도 남다른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스님은 이를 확대시켜 ‘함께하는 세상’을 열었다.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공간 ‘이웃절’을 열어 다문화 가정을 위한 ‘마음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한국과 몽골, 스리랑카 3개국 석가모니불을 모신 이웃절은 이주민의 불심을 더욱 돈독히 하는 것은 물론, 직장알선과 치료, 법률구조 등의 실생활까지 뒷받침 하고 있다.
지성 스님의 지난 50년 출가 여정을 들여다보면 이를 관통하는 게 하나 있다. 회중시계에 태엽을 감듯, 늘 ‘출가의 본분을 잃고 있지 않는가’라는 자문을 끝없이 하며 그에 따른 실천을 올곧게 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출가자가 나태하면 쌀 한 톨에 죄가 일곱 근’이라는 의미를 행동으로 보이고 있음이다.
청허당의 서산 스님의 시 한수가 지성 스님을 대변한다. ‘눈 내린 들판을 밟아갈 때는 그 발걸음을 어지러이 하지 말라.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지성 스님은 ‘99%는 양보하고, 1%엔 목숨을 건다’는 인생관을 갖고 있다. 무엇을 양보하고, 무엇에 사명을 다할 것인지 우리 모두 자문해 볼 일이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지성 스님은
1959년 동화사에서 혜진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1966년 부산 범어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은해사 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한 후 동화사 금당선원을 비롯해 오대산, 지리산 등의 토굴에서 정진했다. 대성사, 은해사, 동화사 등의 주지와 조계종 7~10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 했다. 현재 조계종 볍계위원이며 보현사신협 상임이사장, 함께하는 세상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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