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千江에서 달을 보다] 조계종 원로의원 월서 스님
- 언제까지 빈둥빈둥 자빠진 원숭이처럼 살텐가
- 2010.09.07 15:06 입력 발행호수 : 1063 호 / 발행일 : 2010-09-07
지금 자리서 한 마음 돌려야
청정무구 심성서 지혜 발현
실천법력-수행정진 있어야
법 설하는 자-듣는 자 계합
서울 정릉 삼각산 자락에 자리한 봉국사는 도심 사찰이지만 고즈넉했다. 산사 경내를 휘돌며 옷섶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은 참으로 청량했다. 대웅전을 지나 몇 걸음 더 내딛어 보니 염화실이 눈에 들어온다. 1956년 출가한 후 50여 년 동안 ‘이뭣고’ 화두를 들어온 월서 스님의 주석처다.
스님은 올해 『거울 속 성불의 길』이란 책을 선보인 바 있다. 보통 책 제목은 출판사가 결정하는 게 상례지만, 월서 스님의 의지가 깊게 배인 듯 제목 자체가 예사롭지 않다. 스님이 말하고자 하는 거울은 무엇이며 그 거울 속엔 어떤 성불의 길이 비춰져 있을까!
스님은 이 책에서 “항상 자기 내면을 탐구하고 거시서 발견되는 종교적 진리를 체득하여 지식 이전이나 경험 이전의 자기, 곧 거울과도 같은 청정무구한 심성을 두고 대원경지라 한다”고 설파했다. 분명 ‘거울’과 관계된 듯 보이지만 이 대목만으로는 거울 자체를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월서 스님이 전하고자 하는 거울의 의미를 파악해 볼 수 있는 단초가 또 하나 있다. 월서 스님의 은사 금오 스님과의 인연이다.
월서 스님은 1953년 이른바 ‘빨치산 소탕 작전’에 뛰어들은 바 있다. 이념문제보다는 단순히 자신의 고향 함양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전투경찰에 입대했지만, 17세의 그의 앞에 펼쳐진 현실은 참혹했다. 세상이 무너져 내릴 듯한 총격전이 지나면 지리산 골짜기마다 시체가 즐비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지만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죽고 말 것’이라는 공포가 더 무서웠다.
군복을 벗은 뒤에도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고 매일 밤 악몽으로 다가왔다. 어느 날 실상사 약수암에서 우연히 금오 스님을 친견하게 됐다. 처음 본 스님이지만 문제를 해결해 줄 것만 같은 생각에 자신이 겪은 일들과 공포를 털어 놓았다.
이 때 금오 스님은 “나고 죽는 것은 풀잎 위 이슬처럼 허망한 것이다. 대자유를 얻고 싶다면 출가해 보라”고 했다. 그 뒤 청년은 화엄사를 찾아 금오 스님을 친견한 후 출가했는데, 이 때 금오 스님이 그에게 전한 일언이 있었다.
“깨끗한 유리창에는 만상이 깨끗해 보이고, 더러운 유리창에는 모든 사물이 더럽게 보인다.”
월서 스님이 내어 보인 거울과 금오 스님이 내어 보인 거울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월서 스님은 미소를 머금으며 일러 주었다.
“『진각국사어록』에 있는 한 구절을 음미해 보세요. ‘몸은 곧 허공장이라 원래 사대의 모습이 아니고, 마음은 곧 대원경이니 본래 네 가지 망상이 없네. 몸과 마음이 뚫리면 시방의 찰망을 용납하네.’ 어떻습니까?”
월서 스님과 금오 스님은 한결같이 ‘대원경(大圓鏡)’, 즉 ‘대원경지(大圓鏡智)’를 내어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대원경이란 망상분별이 없는 깨끗한 마음, 부처님의 지혜를 비유한 말이다. 대원경지 역시 굳이 말하자면 부처님이 갖춘 네 가지 지혜를 이른다. 월서 스님은 이 책을 통해 누구든, 한 번 쯤이라도 지혜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불의 길이다. 하지만 한 순간에 어찌 망상분별을 없앨 수 있겠는가.
월서 스님은 산사를 찾을 때 마다 무엇을 처음 보느냐 물었다. 물론 ‘일주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일주문을 묻는 것은 아닐 것이기에 ‘알음알이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답했다. 스님은 “내려놓은 다음에는”하고 다시 물어왔다.
“속계와 진계가 처음으로 구분되는 지점이 일주문입니다. 문밖에 서 있을 때는 어떻습니까? 망상에 허덕이다 보니, 생사의 파랑에서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표침만 할 뿐이지요. 일주문 안으로 들어 온 순간 바뀌어야 합니다. 모든 번뇌와 망상을 가라앉히고 청정무구한 본래면목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신을 반조해야 하는 겁니다.”
일주문에 들어 선 순간부터라도 망상에 흔들린 그 마음을 가라앉혀 보라는 뜻이다. 스님은 일심(一心)에 주목하라고 한다. 일심을 알면 선가에서 말하는 일물(一物)도 알 수 있을 것이라 확언하며 금오 스님의 법문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방생’ 법문이다.
‘고기야, 고기야, 본래는 너나 나나 똑 같은 마음이거늘 너는 무슨 업력으로 고기가 되었으며, 나는 무슨 업력으로 사람이 되었는가. 너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한 가지로 역력한 마음일 텐데 어떻게 하다 죄업과 선업으로 이렇게까지 갈라져야만 하였느냐.’ 한마디로 명 법문이다. ‘다음 생에는 사람으로 태어나 보리심을 내어 해탈하라’는 법문은 수 없이 들어봤지만 서두에서 보이듯 ‘본래 너나 나나 똑같은 마음이거늘…’ 부분은 신선한 충격이다.
“마음 하나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사람과 고기의 격차가 나듯, 일심의 격차로 성불과 지옥이 갈라집니다. 『법구경』에 있지요. ‘가령, 백겁을 지낸다 해도 지어 놓은 업은 없어지지 않으며, 인연이 될 때 반드시 과보를 받는다.’ 참으로 몸서리칠 정도로 무서운 경구입니다. 선업이든, 악업이든 한 번 지어 놓으면 이렇듯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업종의 싹이 틀수 있는 인연을 어느 때든지 만나기만 하면 거기에 따른 과보는 반드시 나타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일심을 잃지 않으면 악업만큼은 짓지 않을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월서 스님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 이 마음만은 아니다. 산란과 소요가 가라앉은 담연청정한 상태의 마음이다. 그러니 다른 곳에서 찾을 게 아니라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하루 종일 원각 속에 놀면서도 원각을 맛보지 못한다(終日圓覺而 未嘗圓覺)’는 말은 그래서 있을 것이다.
“효봉 스님이 ‘무상월’이라는 분에게 일러 준 글이 있습니다. ‘나에게 달이 하나 있으니 모양도 없고 그림자도 없어라. 이 달을 보고 싶거든 착한 마음 잊지 말아라.’ 누구든지 모양도 없고 그림자도 없는 달을 갖고 있지만 가지고 있는 줄 모르고 있습니다. 내 몸이 바다 속에 있는데 물을 찾아 무엇하며 석양이 재를 넘는데 산을 찾아본들 무엇하겠느냐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누구든 좌선에 들어 회광반조 하라는 뜻이다. 이를 행하지 않으면 경전을 다 외우더라도 소용없다고 옛 선지식은 강조하지 않았던가. 월서 스님은 이 대목에서 매우 중요한 것 하나를 갈파했다.
“설하는 자는 설에 그치고, 듣는 자는 그저 청에 그치고 만다면 이것은 풍성수색(風聲水色)에 지나지 않습니다. 설하는 사람은 설 이외에도 실천법력이 있어야 할 것이며, 청하는 사람은 듣는 것에 그치지 말고 수행신심이 있어야 합니다.”
설법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실천과 정진이 뒤따르지 않고는 서로의 심지가 계합될 수 없다고 한다. 철두철미한 수행정진은 하지 않고 한갓 구두와 요설로 심오한 진리를 규찰하려 하지 말라는 일침이다. 월서 스님은 무엇보다 스님들의 지계정신이 지금보다 더 투철해야 할 것이라 강조했다.
“수행정진의 대원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한 순간, 마음 하나 잘못 쓰면 그대로 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율을 지키고 있으면 흔들린 마음도 곧 다시 돌아오게 합니다. 지계는 세속과 피안을 연결하는 다리라 할 수 있지요. 정진의 힘은 바로 지계에서 나온다는 점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삼보정재는 반드시 과보 따라
쌀 한 톨도 무서운 줄 알아야
금오스님 ‘수행하라’ 잊지 않고
칠순 넘어서도 화두 들고 정진
월서 스님은 삼보정재를 낭비하는 것도 지계정신에 반하는 행위라고 한다. 스님은 화엄사에서 금오 스님을 모시며 대중생활을 할 때 ‘쌀 한 톨도 정재’라는 사실을 뼛속 깊이 새긴 바있다.
“어느 날 쌀을 씻다 보니 쌀 한 톨이 하수구로 흘러가더군요. 주워야 하는데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얼른 쌀 씻어 밥 짓자는 생각에 그냥 놔두었습니다. 순간, 머리가 ‘쾅’ 했지요. ‘아얏’하고 돌아보니 금오 스님이셨어요. 주장자로 그냥 내려치신 겁니다. 쌀 한 톨을 가리키시며 딱 한마디 하시더군요. ‘주워라!’ 쌀 한 톨에 깃든 공덕이 일곱 근이란 말이 있지요. 농부가 씨 뿌리고, 김 메고, 추수할 때까지 쏟은 땀을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그러한 쌀이 시주물로 들어온 이유는 하나입니다. 더 정진하라는 것이지요. 쌀 한 톨도 이러할 진데 시주금을 낭비하고 있다면 이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는 겁니다. 당장은 그 시주금 쓰는 재미로 살겠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그 과보를 받습니다.”
월서 스님은 지계정신을 가져야 할 사람은 스님뿐만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재가불자 역시 오계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살생하지 말라’와 ‘도둑질 하지 말라’는 대목에서는 달마 스님의 일언을 전하며 새로운 각성을 촉구했다.
“살생하지 말라는 말은 죽이지 말라 하기 때문에 죽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죽여라 하여도 죽이지 못하는 인간성의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자기 소유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자각하는 것이 곧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얼마나 많은 뭇 중생을 죽입니까? 조금 더 가지려고 타인을 비방하고, 심지어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합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국가가 정한 법만으로는 다스려질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달마 스님의 일언을 조금만 사유해 보아도 세상은 조금씩 맑아질 것이라고 스님은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스님은 여기서도 조심해야 할 게 있다고 일러 주었다. 계행이 청정하다 해서 그것에 만족하거나 모든 일이 끝난 것처럼 우월한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경학에 밝다고 해서 할 일을 마친 것 같은 과도한 생각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한다.
“잠깐 동안이라도 자기를 찾는데 힘써야 합니다. 본래면목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금오 스님께서도 이 점을 후학들에게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 야운 스님도 이르셨지요. ‘어리석은 마음으로 배우지 않아 교만만 더하고, 어두운 생각으로 닦지 않아 아상, 인상만 길어지네. 빈 가슴 높은 콧대 굶은 호랑이 같고, 아는 것 없이 빈둥빈둥 자빠진 원숭이 꼴이로구나.’ 승재가 모두 새겨야 합니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그것들의 뜻대로 실천하기 위해 배우는 것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글은 글대로 있고 나는 나대로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부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실천하기 위한 것 아닌가. 최근 들어 스님이 자주 쓰는 선구가 있다.
죽밀불방류수과(竹密不妨流水過)
산고기애백운비(山高豈碍白雲飛)
대나무가 아무리 빽빽해도 흐르는 물을 방해할 수 없고
산이 아무리 높아도 구름이 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더 이상 구할 것도 없는 경지에 이른 것일까? 스님이 현재 그런 경지에 있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도 그 대원경지를 밝히려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생전에 금오 스님이 남긴 이 선구가 주는 메시지도 이에 다름 아니다.
아유진공무사선(我有眞空無事禪)
암전의석타한면(巖前依石打閒眠)
유인홀문하기특(有人忽問何奇特)
일령순의과백년(一領鶉依過百年)
내 진공묘유를 가졌으니 선 또한 무사하고
바위 앞에 기대 한가로이 낮잠을 자노라.
사람이 있어 문득 뭐가 그리 기특하냐 묻는다면
한 벌 누더기로 한평생 지났다 하리라.
월서 스님이 전한 거울 속엔 분명 성불의 길이 있다. 일심을 돌이킨다면 흰 구름이 산을 넘듯 걸림이 없을 것이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월서 스님은
1956년 전남 구례 화엄사에서 금오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법주사 강원 대교과를 졸업한 후 1972년 동국대 행정대학원을 수료했다. 불국사, 분황사, 조계사 주지와 4, 5, 6, 10, 12대 중앙종회의원, 제8대 중앙종회 의장과 호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조계종 원로의원이며 저서로는 『행복하려면 놓아라』, 『거울 속 성불의 길』, 『월서선사 원경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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