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 유적을 보세요.
폼페이 최후의 날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든 화산폭발의 순간처럼
폼페이의 최후의 순간은
서기 79년 8월24일 아침이었다.
지체 높은 로마 시민들의 여름철 휴양 도시인 폼페이는
바쁘고 활기에 넘쳐 있었다.
나폴리로부터 12㎞ 떨어진 베수비오산 기슭에서
사루누스강 어귀에 세워진 항구 도시 폼페이는
로마제국의 화려함을 잘 나타내 주는 사치스러운 도시였다.
<naver자료사진>
베수비오산은 이따금 연기를 내뿜었지만 16년 전 폭발한 뒤로는
그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사람들은 가끔 연기를 뿜는 모습이 오히려
폼페이의 경관을 더욱 멋지게 꾸며 주고 있다고 말했다.
며칠째 계속되던 땅의 흔들림이 갑자기 거세지더니
곧 베수비오로부터 하늘을 뒤덮는 버섯구름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사람들이 미처 몸을 피할 사이도 없이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산꼭대기가 갈라지면서
뜨거운 화산재와 용암이 비 오듯 쏟아졌다.
새들은 날다가 낙엽처럼 떨어졌고,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짐승들도 숨을 곳을 찾아 갈팡질팡했다.
화산은 쉴새 없이 터졌고,검은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완전히 가렸다.
4시간쯤 지나자 인구 2만명 가운데 2,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을 힘을 다해 바닷가로 달아났다.
베수비오의 화산재는 30㎞나 떨어진 미세눔에까지도 날아오고 있었다.
이 참사의 목격담은 대(大)플리니우스의 조카 소(小)플리니우스가
미네눔의 로마 함대 사령관이었던 대플리니우스의 죽음에 대해서 묻고 있는,
타키투스에게 쓴 2통의 서신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대플리니우스는 스타비아이에서 친구들을 구조하려고 애쓰다가 죽었다.
이튿날 화산폭발이 멈추었을 때 폼페이는 깊이 6~7m의 용암과 화산재로 덮였다.
헤르쿨라네움에서는 격류와 함께 떠밀려온 화산물질 더미가 20m 두께로
도시 곳곳을 뒤덮으면서 일종의 진흙용암으로 굳어졌다.
로마제국의 미세눔 해군사령관이었던 대 프리니우스는 함대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모든 배는 폼페이로 가서 바닷가로 탈출한 시민들을 구하라!”
함대가 폼페이 항구에 다다르니 배 위로 화산재와 경석이 마구 쏟아졌다.
바닷가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검은 연기에 휩싸여 있었다.
프리니우스는 카스텔라마레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는 폼페이 시민들이 바닷가를 따라 그리로 가리라고 예상했다.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바닷가를 달려가고 있었다.
함대는 서둘러 카스텔라마레 해안에 배를 대고 사람들을 구조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믿어지지 않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났다.
바람이 돌연 낮게 깔리며 바닷가로 들이닥쳤다.
숨을 못 쉬도록 뜨거운 불기운과 독한 가스가 순식간에 함대를 덮쳤다.
구조 작업을 지휘하던 대 프리니우스,로마 병사들,
그리고 막 구조돼 한숨을 돌리던 폼페이 시민들은독가스에 질식돼 모두 죽고 말았다.
소 프리니우스와 몇몇 병사만이 간신히 그 곳을 벗어나 이 기록을 남겼다.
사흘이 지나자 분화가 멈추고 눈부신 태양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폼페이시는 한 채의 건물, 한 사람의 자취도 없이
모든 것이 화산재와 용암 아래 파묻히고 말았다.
폼페이유적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Porta Marina에있는 이문을 따라
둘레가 약3km에 이르는 방벽이 둘러있고 지역의 넓이는 약63ha에 이른다.
이문을 통해 언덕길을 올라서면 폼페이의 가장 중심인 포로 (Foro) 이다.
각종 행정기관과 주피터 신전, 공회당,등 사회생활의 중심센터이다
2000년전의 건축문화를 오늘의 것과 비교해 보면은 지금의 도시인프라와
그리 큰차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지붕이 있는 이 건물은 상품거래와 재판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서쪽으로는 폼페이의 수호신인 베누스 폼페이아나의 신전이 있다
1861년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 고고학자 주제페 피오렐리로 하여금 폼페이를 과학적으로
발굴하게 한 것은,빙켈만이 죽은 지 거의 100년이 다 돼서였다.
1709년 수도원 우물을 파던 인부에 의해 단서가 잡혔던 폼페이 유적 발굴은
피오렐리에 의해 빙켈만의 뜻을 이어 오늘날과 같은 발굴 방식을 처음 시도했다.
그것은 가재도구,집,거리 무엇 하나 빠짐없이 차근차근 드러내는 작업이다.
이 일은 지금껏 140년이 넘도록 계속되어 오고 있는데,약 5분의 4쯤 발굴되었다.
지금까지 드러난 바로는, 폼페이는 약 3㎞ 둘레의 타원형 도시이다.
도시 전체를 성벽으로 둘러쌌으며,성문은 모두 8개,길은 바둑판처럼 곧게 뻗어 있다
길모퉁이마다 공동 수도전이 세워져 있어 수도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 현재의 세상의 모습이나 별 다름이 없는 완벽한 인프라를 갖춘 도시다.
당시 마차가 다니던 길이다.길들은 7m너비로 모두 돌로 포장되었고,
인도가 마찻길 양 옆으로 나 있다.지금의 철로폭과 같다
인도에는 현재와 같은 아연도관의 수도관이 매설되어있다
이 도로는 하수도 기능을 겸했다고한다.
길을 가다 보면 길바닥에 남자의 성기를 새겨놓은 표지석을 볼 수 있다.
성기가 가르키는 방향으로 가면 바로 유곽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 서게된다.
루파노래의 유곽
벽에 포르노 그림과 침실등이 갖춰저 있어 창녀의 집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침대의 규모로 보아 당시 이태리 사람들의 체격을 유추해 볼 수 있었는데
신장이 150cm전후였을 것으로 보여진다.당시 이들의 평균수명은 35세
이곳은 대량의 음식물을 만들었던 화덕들로 보아 커다란 식당도 있었던 모양이다.
이곳은 밀가루를 빻고 빵을 구워내던 대규모 빵공장 터다.
벽에 그려놓은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이곳은 도박을 하던 장소인 것으로 보여진다.
까리굴라황제의 개선문
발굴된 유물 보관소 당시 화산재를 덮어쓰고 죽은 사체가
죽는 순간의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
1,700년이나 흐른 뒤,사람들은 그 옛날의 모습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얼마나 갑작스레 닥친 재앙이었던지,
새끼 돼지가 오븐에 넣어지려 한 채로 발견되었고,
반쯤 구워진 빵이 발굴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너무나 불쌍한 모습으로 굳어져 있었다.
어머니들은 숨이 막히기 전에 힘껏 아기를 감싸안고 있었고,
어떤 이는 금붙이를 꽉 움켜쥔 채 돌더미에 깔려 있었다.
어느 집 문턱에서는 젊은 여자 둘이 집안으로 들어가 귀중품을 꺼내려고
망설이는 몸짓으로 굳어 있었고, 모든 집이 1,700년 전 8월 어느 날 한때의 모습을
‘동작 그만’인 채 간직하고 있었다. 도서실에는 두루마리 종이가,작업장에는 연장이,
목욕탕에는 수세미가,여인숙 탁자에는 손님들이 서둘러 계산한 돈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로마인 이야기 중에서)
폼페이 발굴 유물가운데 가장 세인의 관심을 모은
남녀의 교합상태의 유골이다
이것은 현지전시되어 있지 않아 자료사진을 인용했다
(폼페이"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자료 인용)
공중화장실
당시 나폴리의 거상인 베띠가와의 집이다.대리석 기둥과 정원 그리고 고급스런 집기등
집안의 벽도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
그 동안 발굴된 목욕탕은 네 군데. 한증탕,냉탕,온탕이 갖추어져 있었다.
당시의 도량형기(저울)
앞으로 10년 안에 발굴이 끝나면,로마 제국의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의 눈부신 유산이
더 많이 공개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한편 폼페이의 모습을 보며 현재의 인류는 2천년전의 폼페이의 생활 환경에서
별로 발전한 것이 없는 비슷한 수준에 머물고 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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