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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노래 포교 28년 ‘수덕사의 여승’ 송춘희 법사

淸潭 2011. 5. 2. 15:36

노래 포교 28년 ‘수덕사의 여승’ 송춘희 법사
 
백련장학회 설립…19년 간 수백명 지원
교도소·군법당 돌며 봉사…불교가 곧 삶
기사등록일 [2010년 03월 29일 15:09 월요일]
 
 
새벽과 저녁 예불은 빼놓지 않는 송춘희 법사의 일과다.

“쇠창살 우리 속에 갇히운 신세/ 이 나라의 법을 어긴 가련한 죄수/ 운다고 나의 죄가 용서되리오~.” (철창의 꿈·1969년)
절절한 사연이었다. 구슬픈 가락을 타고 춘천여자교도소 강당을 흘렀다. 파란 죄수복을 입고 앉은 200여 재소자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앳된 얼굴부터 머리가 희끗한 중년 여성까지. 노래는 한 소절 한 소절 저마다 각기 다른 사연을 품은 이들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몇몇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미처 참지 못한 흐느낌은 울음이 되어 강당을 메웠다. 이를 지켜보던 교도관의 가슴도 촉촉이 젖었고, 무대 위 송춘희 법사의 목소리는 눈물을 머금었다.

28년 간 전국 각지의 교도소를 찾아 재소자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포교 활동을 펼쳐온 송춘희 법사(74·백련화).

그는 ‘수덕사의 여승(1966년)’을 비롯한 수많은 히트곡을 쏟아낸 데뷔 54년차 가수이자, ‘노래하는 포교사’로 이미 널리 알려진 유명인사다.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 구성진 음색의 노래 한 소절 한 소절이 스펀지에 물 스미듯 가슴 속에 젖어 들어, 얼어붙은 마음을 녹였다. 메마른 감성을 적셨다.

그의 음성이 울려 퍼지는 곳은 교도소뿐만이 아니다. 전국 군법당 곳곳에도 그의 원력이 구석구석 스며있다. 군부대가 말 그대로 ‘포교 사각지대’로 불리던 80년대부터 그는 전국의 군법당을 돌며 손수 마련한 간식으로 장병들을 먹이고, 불교 교리를 가르치며 불법을 전했다. 그들의 지친 심신은 노래로 다독였다. 그가 직접 불사를 맡아 진행해 건립한 군법당도 세 곳이다.

하루에 서울 시내의 교도소와 구치소 세 곳을 돌며 위로 공연을 하고, 그 길로 경기도 변두리의 군부대를 찾아 법회를 주관한 경우도 부지기수. 그의 지나온 세월은 포교에 대한 원력으로 가득하다. 교도소에서 인연을 맺은 장기수들의 가족을 보살피기 위해 1991년에는 도반 22명과 ‘백련장학회’를 설립했다. 가족 중 한명이 감옥에 가면서 가정이 산산조각 나는 경우를 수없이 보면서 그 자녀들이 공부라도 지속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백련장학회는 수감자 자녀와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을 선정해 중·고등학교 학비에서부터 대학 등록금까지 지원하고 있다. 지난 19년간 백련장학회의 도움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은 100명을 훌쩍 넘는다.

 
1978년 LA포교당에서 숭산 스님과 함께.

그가 어둡고 그늘진 곳에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자 처음 마음먹은 때는 지금으로부터 29년 전. 당시 그는 미국에서 거주하며 틈틈이 인연 닿는 사찰이나 포교당에서 음성공양을 하는 평온한 삶을 보내고 있었다. 인생의 전환점은 갑작스레 찾아왔다. 교통사고로 죽음의 문턱을 경험한 것.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는 간절히 부처님을 찾았고, ‘기적처럼’ 살아났다. 그리고 그의 삶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아무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간절히 부처님 명호만을 외웠어요. 다시 살아난다면 온전히 부처님께 귀의해 부처님 일을 하겠다고 했죠. 다시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부처님 가피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네요.”

그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 노래를 통해 부처님 일을 하자”고 서원했다. 찬불가를 통해 사람들이 쉽게 부처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스스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당시만 해도 흔치 않았던 찬불가 음반을 제작하기 위해 미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그길로 한국에 입국했다.

‘부처님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 그는 1983년 조계사 교양대학에서 무진장 스님에게 불교 기초교리를 배웠다. 그것을 시작으로 동국대 불교대학원, 포교사대학 등 전문교육기관에서 불교학위로만 사각모를 다섯 번 썼다. 그렇게 포교 하나에 진력한 인생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그 기간 동안 매일같이 하루 두 번 예불을 빠뜨리지 않고, 틈나는 대로 법화경과 금강경 사경, 천수경과 금강경 독송을 하는 등 꾸준한 신행 생활을 쉬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활발한 포교 활동을 지탱하는 정신적 기반이 됐다.

사실 그는 불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큰아버지가 교회를 건립할 정도로 신앙 깊은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그는 “세 번의 인연으로 불자가 됐다”고 회상했다. 그와 불교의 첫 번째 인연은 수덕사의 여승으로 일약 국민적인 스타가 된 60년 대 후반 무렵이다. 그에게 우연이란 운명이 놓아 준 다리였다.

“노래 때문에 ‘수덕사에 가봤냐’는 질문을 참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어느 날에는 가까운 사찰을 찾았지요. 합장이나 절하는 법도 아무것도 모른 채 법당에 앉아 멀뚱히 불상만 바라봤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부처님이 날 보고 슬며시 웃으시는 거예요. 좀 엉뚱하지만 그게 불연의 시작이었어요.”

두 번째 인연은 공연차 찾은 캐나다에서 손을 내밀었다. 우연히 숭산 스님을 만나는 자리에 참석하게 된 것. 종종 사찰에서 마음의 휴식을 얻긴 했지만 불자라고 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았던 그에게 숭산 스님은 “매일매일 108배를 해보라”고 권했다. 불교를 알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그대로 따랐다. 그러자 어느 순간 영문 모를 환희심이 느껴졌다. 그는 점점 불교에 빠져들었다.

 
월남 파병 장병 위문.

숭산 스님과의 인연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1978년 경, 숭산 스님이 송 법사가 다니던 LA의 한 포교당을 찾았다. 그날 숭산 스님은 그에게 ‘백련화’라는 불명을 지어주며 “아침에 참선하러 앉았는데 큰 연못에 흰 연꽃이 하나 떠있더라. 그것이 보살님인 듯하니 열심히 수행정진해서 불교에서 귀한 역할을 하라”며 인자한 미소로 당부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는 “비로소 진정한 불자로 거듭난 기분이었다”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는 “운명은 씨앗을 제공할 뿐”이라 말했다. 그의 불연도 불연이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죽이고 있던 노래 포교에 대한 원력이 인연의 끈을 더 단단히 했으리라.

젊은 시절에는 살기가 바빠서, 나이가 들어서는 불법과 포교에 심취한 까닭에 그는 아직 혼자다. “외롭지는 않냐”는 질문에 그는 “항상 부처님의 진리와 한평생 사랑해 온 노래, 의지할 수 있는 도반들이 있기에 하루하루 최고로 행복하다”고 진심으로 말한다.
“2006년에는 악성종양이 생겨 수술을 했어요. 병원에 가만히 누워있는데 회향하지 못한 불사와 나를 기다리는 재소자와 군 장병들, 인연 맺고 있는 장학회 아이들의 생각만 떠오르더군요. 아무래도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쭉 이렇게 살아야 하나 봅니다.”

74세라는 나이가 무색한 젊은 열정이다. 밝게 빛나는 미소와 마음을 움직이는 목소리가 여전히 그대론데 나이 따위가 무슨 상관이랴. 그의 삶을 둘러 싼 모든 것이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수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굳은 원력이다. 다시 마주한 시선에 ‘노래하는 보살’이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1042호 [2010년 03월 29일 15:09]

 

 

 

 

 

 

출처 : 수덕사를 사랑하는 모임(수사모)
글쓴이 : 청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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