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포스텍 비전 2020’ 선포 박찬모 총장
박찬모 포스텍 총장은 주말이면 조선 중기 대유학자 회재 이언적 선생의 고향인 경북 경주시 옥산서원 주변을 찾는다. 대학 발전 방안에 대한 구상을 하기 위해서다. 그는 미래의 한국 과학을 선도하겠다는 생각에 ‘비전 2020’을 선포하고 대학 혁신을 이끌고 있다. 포항=이권효 기자 |
《포스텍(POSTECH·Pohang 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포항공대) 캠퍼스 안의 무은재(無垠齋·김호길·金浩吉 초대 총장의 호) 기념관 앞 광장에는 에디슨, 아인슈타인, 맥스웰, 뉴턴의 흉상이 서 있다. 그런데 두 곳에는 받침대만 있고 얼굴이 없다. ‘미래의 한국 과학자’를 기다리며 남겨 놓았다. 한국 과학기술의 미래를 이끌겠다는 열망을 보여 준다. 포스텍은 10일 학생과 교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포스텍 비전 2020’을 선포했다. 2020년까지 세계 20대 연구중심대학으로 발돋움하겠다는 내용이다.》
과학기술연구중심대학을 표방하며 1986년 경북 포항시 남구 효자동에 둥지를 튼 포스텍이 12월로 개교 20주년을 맞는다.
박찬모(朴贊謨·71) 총장은 “숲을 무성하게 가꾸면 2020년까지 큰 재목이 나올 것”이라며 “비어 있는 받침대에 오를 얼굴의 주인공을 기대해도 좋다”고 했다.
한국사학진흥재단이 최근 전국 110여 개 사립대학을 평가한 결과 포스텍은 △학생 1인당 교육비 △교수 1인당 연구비 △학생 1인당 장학금 △등록금 환원율 △교수 1인당 학생 수 등 교육여건 5개 전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홍콩의 주간지 아시아위크가 1998년 포스텍을 아시아지역의 과학기술대학 1위로 평가한 뒤 꾸준히 경쟁력을 키웠다는 증거다.
교수와 연구원 940여 명이 학생 2900여 명(대학원생 포함)과 함께 뿜어내는 연구 열기는 구체적인 성과로 이어졌다.
연간 예산 2000억 원 가운데 절반인 1000억 원을 교수와 학생이 외부 연구과제를 통해 따왔다.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에서 학비 걱정 없이 공부한다. 학부 3학년 때부터 교수 및 연구원과 머리를 맞댄다.
박 총장은 아직 만족할 단계가 아니라며 위기의식을 강조했다.
“이공계 중심 대학 가운데 포스텍은 세계 50∼60위권에 불과해요. 제자리걸음은 곧 퇴보하는 것이고, 한 번 뒤처지면 회복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게 특히 과학기술분야 아닙니까. 냉정하게 말하면 마음 놓을 게 거의 없다고 봐요.”
그는 총장에 취임하던 2003년 대학발전위원회를 만들어 △선택과 집중 △학문 간 협동 연구 △교수평가 다원화 △세계화 노력 △재원 확보를 주요 과제로 설정했다.
또 교수들의 급여체계를 바꿔 성과급 차이가 최고 30%까지 나도록 했다. 교수 연구비 수주 규모는 2004년 670억 원에서 지난해 1000억 원가량으로 뛰었다.
포스텍은 지금까지 국내외에 교수 230여 명을 배출했다. 졸업생은 원하는 기업이나 연구소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 총장은 ‘포스텍의 초심(初心)’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그는 미국에서 대학교수를 하다가 포스텍 초대 총장을 지낸 김호길(1994년 작고) 박사의 설득으로 30년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1990년 포스텍 교수로 부임했다.
“처음엔 주저하기도 했어요. 서울도 아닌 포항에 신설된 대학이라 반신반의했고요. 그런데 포항에 오기로 마음먹은 해외파 교수는 대부분 소명 의식이 강했어요. ‘정말 반듯한 연구중심대학 한번 만들어 보자’ ‘포스코(포항제철)가 벌판에서 우뚝 선 것처럼 새로운 신화를 동해의 작은 바닷가에서 이뤄 보자’ 이런 의욕이 대단했어요. 지금도 이 같은 정신과 열정이 포스텍을 이끄는 원동력입니다.”
그는 올해 초 한국과 일본, 중국, 대만의 17개 대표적인 연구중심대학 총장으로 이뤄진 동아시아연구중심대학협의회(AEARU) 회장으로 선출됐다.
과학기술을 위해 대학끼리 경쟁을 하면서 인류 공동의 관심사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비전 선포식에서 교직원과 학생을 위한 윤리헌장 제정 및 봉사단이 출범했습니다. 과학기술은 양면성이 있기 때문에 연구자는 인류의 복지를 위해 연구한다는 마인드가 꼭 필요하지요. 교수의 성과 관리와 다면평가에 윤리성과 봉사가 포함됩니다.”
그는 정보기술(IT)을 남북통일의 가교로 만드는 데 열성이다. 최근 5년 동안 북한을 12번 방문했다.
이달 초 평양을 다녀온 그는 “남북한의 IT 격차가 벌어지면 통일에 상당한 걸림돌이 될 수 있다”며 “북한의 소프트웨어 기술 수준이 꽤 높으므로 포스텍을 포함해 긴밀하게 공동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 중기 대유학자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선생의 고향인 경북 경주시 옥산서원 주변을 자주 찾는다. 산책하면서 포스텍의 발전 전략을 구상한다. 내년 8월까지 남은 임기 동안 그의 소원은 무엇일까.
“포스텍은 좀 무모한 듯한 상황에서 출발했어요. 스무 살이 됐으니 이제 반듯한 어른으로 성장했으면 하는 욕심을 떨칠 수 없어요.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및 캘리포니아공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은 게 포스텍의 꿈이죠. 2020 비전 선포는 포스텍 구성원들이 꿈을 담아 국민에게 가슴으로 다짐하는 맹세라고 생각합니다.”
포항=이권효 기자 boriam@donga.com
■ 포스텍의 프로세스 혁신
포스텍 학교법인의 재정은 1조 원 규모에 이른다. 학교 설립 초기에 포스코가 지원한 7000억 원이 이자 등으로 이만큼 늘었다.
연간 학교예산 2000억 원 가운데 법인 지원은 350억 원가량. 원금 1조 원은 가급적 살려두려는 게 학교의 방침이다.
재정이 상당히 튼튼한 편인데도 포스텍은 다시 허리띠를 졸라맸다. 재원 확보 없이는 미래가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다.
이를 위해 최근 ‘프로세스 혁신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전체 행정직원의 10%인 20여 명이 연구, 학사, 재무 등 대학 운영 전반을 투명하고 표준화하는 방안을 만들고 있다. 외부 전문기관의 조직진단 컨설팅을 거쳤다.
박찬모 총장은 “2020년까지는 결코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 게 아니다”며 “교수의 연구활동과 성과, 질적 우수성을 보장하는 교육시스템을 실천하려면 완벽한 지원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로젝트에는 교수의 연구성과를 기업에 제공하면서 받는 수익을 현재 2억 원에서 2010년 40억 원, 2020년 97억 원으로 늘리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박 총장은 포스텍과 한국 과학기술의 미래를 위해 세계적 석학을 배출하거나 초빙하고 학과나 연구소 단위의 이기주의를 뛰어넘는 협동과 정보 공유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또 교수와 직원의 윤리도덕성, 학교 운영의 수익성과 원가 분석 강화, 평가 및 성과관리 체계의 선진화를 연구중심대학의 필수항목으로 꼽는다.
박 총장은 “프로세스 혁신은 2020년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놓는 일”이라며 “노벨상 수상자는 어느 날 갑자기 나오지 않으므로 잘 설계된 성과창출시스템을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포항=이권효 기자 bor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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