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욕보다 더한 불길은 없고
성냄보다 더한 밧줄은 없으며
어리석음보다 더한 그물은 없고
헛된 집착보다 더한 강물은 없다.
- 『법구경』
재가와 출가를 막론하고 부처님 제자들이 사찰에 와서 반드시 해야 할 행위가 있다. 첫째는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 염불하는 일이다. 이는 염불 수행이며, 오롯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상념(想念)하는 기도수행이다. 이 기도수행에서는 부처님을 예경하고 부처님을 닮고자 서원한다. 또한 경전을 읽거나 절을 하며, 염불 및 다라니를 외우면서 마음을 경건히 하고 일심으로 참회의 기도를 하는 것이 근본이다.
둘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듣고 배워서 실천으로 옮기는 문법(聞法)의 수행이다. 이는 스님들의 설법을 듣고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그대로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 합일시키는 일이다. 법을 들음으로써 자신의 삶이 곧 진리에 부합되는 삶이 되도록 확고한 신념을 얻는 수행인 것이다. 셋째는 스스로 확신하고 깨달은 진리를 몸소 실천하여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자비실천의 수행이다. 위의 기도와 수행을 통하여 지혜가 맑아지면 자연히 중생을 향한 자비의 실천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 수행 중에도, 특히 두 번째 법을 듣고 진리를 깨닫는 수행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문법(聞法)수행의 모체가 되는 것은 곧 경전이다. 요즈음처럼 복사하는 기술이 없던 시대에는 경전을 손으로 베껴서 유통시켰고 자신도 수지 독송하는 것이 곧 법을 듣는 첫걸음이 되며, 경전을 옮겨 쓴 다음에는 스스로도 독송하고 남에게도 해설해 주는 것이 공덕에 으뜸이 된다고 한다.
경전 넘쳐도 읽지 않는 시대
오늘날 우리는 넘쳐 나오는 문서 속에서 산다. 경전의 범람도 다를 바가 없다. 방송 채널만 맞추면 법문이 쏟아져 나온다. 법문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반대로 법문의 소중함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울 때가 있다. 법문의 소중함은 많이 들어서가 아니라 가르침의 한 구절에도 온 우주의 진리가 담겨져 있음을 깨닫는 데에 있다고 본다. 경전의 양이 많은 것은 서가를 장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생 중생의 하고자하는 취향(欲樂)을 따라서 설하신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경전을 읽거나 법문을 들을 때에 가장 소중한 것은 마음을 기울여서 글귀 속에 담겨져 있는 진리를 체득하는 일이다. 부처님 당시에 다섯 명의 재가 신자가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려고 부처님을 찾아뵈었다고 한다. 그들은 곧 각각 자신들의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부처님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하기도 하였고,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동안 잠이 든 사람도 있었으며, 바깥 대상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각양각색의 생각과 행동에 잠겨버렸고,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 것은 뒷전의 일이 되었던 것이다. 이때 오직 한 사람만이 부처님의 법을 듣는 것은 참으로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설법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 법회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있던 아난존자는 이 광경을 유심히 살피고서 뒤에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의 설법은 번개 소리와도 같고 폭우와도 같이 천지를 진동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처님의 설법에는 별로 관심도 없이 정작 법을 들으러 와서도 평소의 타성을 버리지 못하고 무익한 시간을 보내고 가는 것이 안타깝다는 소견을 말씀드렸다. 부처님은 이들에 대해서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그들의 습관과 타성에 젖어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어리석은 습관은 그들의 업이 되었고, 업은 윤회의 바탕이 되어서 헤어나기 어려운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아난존자는 다시 ‘여래의 설법은 피부를 지나쳐 골수에 스며들듯이 자연히 몸에 배는 것인데, 그들은 왜 부처님의 설법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가’를 여쭈었다.
갈망은 강물처럼 쉼없이 밀려와
이에 부처님께서는 그들은 과거의 무수한 세월동안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대해서 들어본 일이 없기 때문에 금생에 삼보(三寶)를 대면하고 있으면서도 역시 마음은 밖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에 노예가 되어서 진리를 듣고 배우기보다는 감정에 치우쳐서 노래하고 춤추기를 좋아하며 욕망에 찌든 일은 잠시만 보아도 곧바로 쉽게 익숙해진다고 말씀하신다. 불법을 배우는 일은 과거로부터 익히지 않은 일로서 몹시 생소하고, 반대로 욕망에 젖어서 감정을 따라가는 일은 과거 전생에 익혀왔기 때문에 한 번 들어도 곧바로 몸에 익숙해진다는 이야기이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나쁜 일은 쉽게 행하며, 남을 도우는 착한 일은 좀처럼 몸에 익숙해 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를 총체적으로 말하면 사람들은 진리에 따르는 길은 어렵게 여겨 싫어하고, 욕망에 따르는 길은 쉽게 따라가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남을 미워하고 자신도 애욕의 불로 망가트려버리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경계하여 ‘욕망의 불길에서 해어 날줄 모르며, 남을 미워하는 증오의 마음으로 스스로를 결박한다. 어리석음은 그물이 되어 자신을 얽어매며, 끝없는 갈망은 강물이 흐르듯 쉼 없이 우리를 젖어들게 한다.’라고 깨우치고 계시는 것이다.
본각 스님(중앙승가대 교수) 그림=이호신 화백, 수화자문=조계사 원심회 김장경 회장
993호 [2009년 04월 06일 1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