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왕 영정사실기(影幀事實記)
◈ 경순왕 영정사실기(影幀事實記) 봉안하고 1본은 을람(乙覽:임금님이 보심)에 제공한 후 도로 본전에 보내어 구본과 함께 궤안에 봉안하였다. 또 일찍이 1본이 있었는데 연전에 본전으로 옮겼다가 이제 하동 경천묘에 도로 봉안하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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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順大王影幀[慶州市皇南洞崇惠殿內所藏]
고려경종7년(982壬午)에 王子殷說과 김심언(金審言)등
이 영정을 봉은사에 봉안하고 제사(祭祀)를 지내드니
봉은사가 불에 탄 후 명종7년【1177丁酉】에 쌍명제최
(雙明齊崔) 유응규(庾應圭) 김보당(金甫當) 현덕수(玄德秀)
윤인담(尹鱗담)등이 영정삼본(影幀三本)을 모사(模寫) 一本
은 순천 송광사에 봉안하고 一本은 경주동천묘(慶州東泉
廟)에 봉안하고 일본은 원주시 남면 용화산 황산사에 봉안
하고 이조선조때에 이르러 임진왜란때 송관사의 영정은 왜
인들이 자기나라로 모셔가서 사본을 하고 환안(還安)했다하
나미상이며 동천면 영정은 임진병화(壬辰兵火)로 殿과 같이
불탔으며 다만 남아있는 황산사(黃山寺) 영정일본은 고려
중세에 이르러 절이 황폐하고 인적(人跡)이 없는지 몇 해
가 지났는지 알 수 없으나 중년에 황산거사(黃山居士)가
있어서 우연히 등나무 넝쿨을 해치고보니 허무러진 벽사이
에서 완연(宛然)히 전날 그린 그림과 같은 영정이 있으므로 느낀바있어 그 殿을 중수하여 영정을 봉안하다.
李朝初 이색(李穡 號 牧隱) 원천석(元天錫 號 운곡(耘谷)) 권근(權近 호 陽村) 권희(權禧 號 상국(相國))
권천(權踐 號 도관(都官))등이 크게느낀바 있어 원주학수사(原州鶴樹寺) 미늑봉하(彌勒峰下)에 殿을 창건하고 영정을 이봉(移峰)하여 경천묘(敬天廟)라 하고 매년 향화(香花)를 결(缺)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됨에 비단방석이 상하고 화상이 점점퇴색(漸漸退色)하여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숙종3년(1677丁巳)에 이르러 후손 필진(必振)이 원주목사(原州牧使)로 있을 때 향화의 제사(祭祀)를 올리고 그 비용은 金氏姓을 가진 사람중 관직자의 록봉(錄俸=월급)에서 거두어 제수비용(祭需費用)으로
하였다. 무진이란 승(僧)에게 명령하여 영정을 모사하고 그리고 전각(殿閣)을 신축(新築)하여 대웅전(大雄殿) 우편(右便)에 옮겨 봉안하고 황산일동(黃山一洞)의 화결세(火結稅=세금)로 춘추향화의 비용으로 충당하다. 그 후 丁丑年에 화재로 인하여 절이 탔으나 영정만은 우뚝히 그대로 남아있었다.
영조13년(1713丁巳)봄에 고자암(高自菴)좌편(左便)건너에 전각(殿閣)을 세우고 영정을 이봉(移奉)하다.
13년뒤 己巳년에 왕의 후손서호지방(後孫西湖地方)에 있는사람이 청안군동면칠보산하(淸安郡東面七보山下)에 절터(院垈)가 있었는데 즉 왕이 속리산(俗離山)을 왕래하든 원대(院垈=절터)라 전각을 신축(新築)하고 고자암(高自菴)의 영정을 이봉한 것이 지금에 이른 영정이나 어느派의 자손인지는 모르며 제현(諸賢)이 경모(敬慕)하는 정성으로 한 영정이 오늘까지 전한 것이 아닌가?
왕이 백성들의 모든 괴로움을 참지 못하여 천승(千乘)이 임금자리를 버리는 지극한 마음에 귀신과 천지가 감동되어 서로도와 한 영정을 무궁하도록 전한 것이며 나가서 생각 큰데 인후(仁厚)하고 자혜(慈惠)스러운像은 생존한 것 같고 귀(耳)가 크며 눈섭이 적고 구랫나 룻 수염에위는 살찐듯하고아래는 야위인 덧한 체구에 冠腹을 한것은 왕이 위엄있는 僕表다. 살피근데 鶴樹寺는 전일에 왕이 제각(齊閣)을 세우고 영정을 뫼시고 祭祀를 지내다. 제각위에 미늑불(彌勒佛)을 모셨는데 이 역시 왕(亦是 王)이 친히 이룬것이다. 왕이 그 곳에 거근(擧勤)하신것이 아주 오래된 일이라 비록 千秋와 백세지후(百世之後)에도 왕의 魂이 반듯이 보살펴 주실것이다. 고로 뒤에 제현(諸賢)들이 옛일을 생각하여 왕이 거근하셨든 그 땅에다
전각을 다시 세웠으니 이는 감히 마음대로 다른곳으로 옮긴것이나 다름없다. 近者 湖西宗人들이 院代山
에 제각을 짛고 영정을 또 옮겼으니 이것 역시 선왕혼령에 대한 죄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러니 제현들이 옛일을 전각을 옮긴것을 나무랄 수 이겠는가? 이점을 잘가려서 후세들이 그 참 뜻을 알고 바로 잡아야 된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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