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전과 명륜당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분리되어 있다.
대성전 서우(보물 제141호) 북쪽에는 제사 때 쓰는 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잡다한 것을 두는 잡사가 있다
史跡 149호 서울 종로 육상궁
영조의 생모이며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 원년(1724)에 세워 숙빈묘라 했으나
영조 29년(1753)에 승격시켜 육상궁이라 고쳐 불렀다.
고종 19년(1882) 화재를 당하여 다음해에 복구했다.
육상궁은 칠궁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1908년에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는 7개의 궁들을 이곳에 옮겼기 때문이다
史跡 157호 서울중구 원구단
원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줄여서 원단이라고도 한다.
세조 2년(1456)에 일시적으로 제도화하여 1457년에 원구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세조 10년(1464)에 실시된 제사를 마지막으로 원구제는 중단되었다.
원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년(1897)에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부터이다.
현재 원구단의 터에는 황궁우와 석고 3개가 남아 있다.
황궁우는 1899년에 만들어진 3층의 8각 건물이며,
석고는 악기를 상징하는 듯한 모습으로 화려한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1913년 일제에 의해 원구단은 헐리고
그 터에는 지금의 조선호텔이 들어서게 되었다
史跡 271호 서울 종로 경희궁지
원종의 집터에 세워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이다.
원종(1580∼1619)은 선조의 5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로
후에 왕으로 추존되었다.
광해군 8년(1616)에 세워진 경희궁은 원래 경덕궁 이었으나
영조 36년(1760)에 이름이 바뀌었다.
원래의 규모는 약 7만여평 이었다.
그러나 민족항일기인 1907년부터 1910년에 걸쳐 강제로 철거되어
궁궐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였고 궁터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변형되어 결국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史跡 171호 서울종로 고종즉위 40년칭경 기념비
고종(재위 1863∼1907)이 왕이 된지 40주년과 그의 나이 51세에
기로소에 들어 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비를 보호하는 비전(碑殿)안에 있다.
또한 이 비석에는 고종이 처음으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史跡 213호 서울종로 우정총국
조선 말기 우편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으로 1884년에 설치되어,
그해 10월에 처음으로 우편 업무를 시작한 곳이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우정총국은 폐쇄되었다.
이후 1893년에 전우총국이라는 이름으로 우편 업무는 다시 이어졌고,
공무아문 역체국, 농상공부 통신부, 통신원 등으로 이어나갔다
史跡 248호 서울 종로 대한의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에 있는 대한제국시대의 대한의원 건물이다.
1907년 대한제국 정부가 임금의 명령에 의해 의정부 직속으로
창경궁의 바깥 정원인 함춘원의 언덕에 지었다
史跡 253호 서울 중구 구러시아 공사관
고종 27년(1890)에 지은 르네상스풍의 2층 벽돌 건물이다.
한국전쟁으로 건물이 심하게 파괴되어 탑과 지하2층만이 남아있었으나,
1973년에 복구되었다. 한쪽에 탑을 세웠으며, 정문은 개선문 양식이다.
일본군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고종이 세자와 함께 피신하여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 기간 동안 친일파인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시아적인 박정양 내각이 조직되었으며,
서재필이 주도하는 독립협회가 결성되었다.
고종이 거처했던 방의 내부는 건물과 같은 르네상스풍의 실내장식을 했다.
현재 탑의 동북쪽으로 지하실이 있어 이곳에서 덕수궁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
史跡 254호 서울 관악구 구벨기에 영사관
1903년에 짓기 시작해서 1905년에 완성한
대한제국시기의 벨기에 영사관 건물이다.
광복 후에는 해군헌병대에서 사용하였다.
1970년 상업은행이 사용하다가 은행측에서 그 자리에 건물을 짓기 위하여,
회현동에 있던 공사관 건물을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 사당역의
남부순환도로변에 있는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었다.
史跡 257호 운현궁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집으로, 고종이 태어나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자란 곳이기도 하다.
흥선대원군의 집과, 1910년대 새로 지어 덕성여자대학 본관으로 사용하던
서양식 건물을 합쳐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한옥은 제일 앞 남쪽에 대원군의 사랑채인 노안당이 자리잡고,
뒤쪽인 북쪽으로 행랑채가 동서로 길게 뻗어있으며 북쪽에는
안채인 노락당이 자리잡고 있다.
고종이 즉위하자 이곳에서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였으며,
궁궐과 운현궁 사이의 왕래를 쉽게 하기 위해 직통문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史跡 378호 서울성북구 성락원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이었으나,
의친왕 이강(1877∼1955) 공이 35년간 별궁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물이 흐르는 경치에 따라 세 개의 공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자연 지형으로 앞뜰, 안뜰, 바깥뜰로 나눌 수 있다.
앞뜰은 두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쌍류동천과
안뜰 앞을 막아 아늑하게 감싸 만든 용두가산이 있다.
안뜰은 영벽지와 폭포가 있으며 바깥뜰은 송석과 연못이 있는 지역이다.
서쪽 아래 지역에 고여한 늪이 있고, 북쪽에는 물길을 파서 인공폭포를 만들었다.
더하여 늪의 서쪽 암벽에 '장빙가(檣氷家)'라고 새긴 글씨는
명필 추사 김정희 선생의 것이다.
史跡 258호 명동 성당
명동성당은 코스트(Coste) 신부가 설계하였고
파리선교회의 재정지원을 얻어 건립되었다.
본래 순교자 김범우의 집이 있던 곳으로,
블랑주교가 김 가밀로라는 한국인 명의로 사들였다.
그후 1887년 한국과 프랑스사이에 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1898년 완성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벽돌로 쌓은 교회이며, 순수한 고딕식 구조로 지어졌다.
평면은 십자형이며 본당의 높이는 23m, 탑의 높이는 45m이다.
고딕양식의 장식적 요소를 배제하면서 그대로 본떴고,
공간의 고딕적 느낌은 외부보다 내부에서 더 강하게 주어졌다.
史跡 256호 서울중구 정동교회
고종 광무 2년(1898)에 준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개신교 교회건물이다
본래는 십자형으로 115평이었으나 1926년 증축 때 양쪽 날개부분을 넓혀서
현재는 175평의 네모난 모양을 이루고 있다
史跡 276호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관(Underwood Hall)
지금의 연세대학교, 옛 연희전문학교의 건물로 학관(學館)이라 불러왔다.
1921년 짓기 시작해 1924년 완성된 돌로 지은 4층 건물로서
아펜젤러관과 함께 연세대학교에 두 번째로 세워졌다.
연희전문학교의 창설자인 언더우드(한국이름 원두우) 박사의
업적과 인격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그의 형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지은 것이다.
언더우드 목사의 장남인 원한경 교수가 초석 을 놓았고
당시 화학과 교수인 밀러가 공사를 감독하였다.
史跡 278호 구서울대학교 본관
일제시대인 1931년에 준공된 옛 경성제국대학의 본관으로,
1945년 이후 서울대학교 본관으로 사용되었다.
서울대학교가 1972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뒤
문화예술진흥원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경성제국대학은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후 이상재 선생을 대표로 한
조선민립대학 기성회가 결성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일제가 경성제국대학령을 공포하고 예과(豫科)를 모집하여
1926년 법문학부와 의학부를 개설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본관은 벽돌로 쌓은 3층 건물로써 우리나라 건축계의 선구자인 박길룡씨가 설계했고,
공사는 일본인 회사 미야까와구미가 맡았다.
평면은 장방형이며 지붕의 모습은 세련되고 우아하다.
史跡 279호 서울 종로구공업전습소 본관
대한제국 순종 융희 2년(1908)에 건립된 이 건물은 본래 기계시험소가 있던 터에다
1906년 공업전습소가 생김에 따라 그 본관으로 지은 것이다.
광복 후 국립공업시험원 본관이 되었고, 지금은 한국방송통신대학 본부로 쓰이고 있다.
2층의 목조건물로 벽은 독일식 비늘판을 붙였으며 외형은 르네상스 양식을 모방했다.
구한말 탁지부가 설계한 몇 안되는 현존건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史跡 280호 한국은행 본관
본 건물은 1910년대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건물이다.
일본의 제일은행 경성지점이었으나
옛 조선은행이 설립되기까지 중앙은행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은행 본관이 되었다.
지하1층 지상3층의 철골 콘크리트 구조로 외벽에는 화강석을 다듬어 붙였다.
일본사람이 설계하였으며, 한국전쟁 때 내부가 불에 타서 1956년에 보수하였다.
그 후 1987년 신관을 건물의 뒤쪽에 건립하고,
이 건물은 본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여 화폐금융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르네상스시대 성 건축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정교하고 우아한 건물이다.
史跡 283호 중앙고등학교 동관
1923년 10월에 준공한 2층 붉은 벽돌집으로,
1934년에 불에 탄 옛 본관의 왼쪽에 지어 서관과 쌍을 이루고 있다.
건물구조는 T자형으로 서관과 동일하며 1920년대의
순수 민간인이 세운 사립학교 건물로서 현재까지 전해오는 건물이다.
우리나라 20세기 전기 건축양식의 기념비적 건물이다.
또한 3·1운동 이후 조선 소년군 창설,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史跡 284호 서울역사
1922∼1925년에 지어진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석재가 혼합된 벽돌식 역 건물이다.
1층은 르네상스 궁전건축 기법으로 처리하고,
1층 윗부분과 2층은 붉은 벽돌로 쌓고, 부분적으로 화강석을 장식하여 마감하였다.
현재 이 건물은 여객전용 건물로 사용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철도 건물이라는 점에서 건축사적 가치가
史跡 285호 고려대학교 본관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경영을 맡았던 김성수가
1933년 공사를 시작하여 1934년에 완성한 본관건물로 박동진이 설계하였다.
3층(중앙탑은 6층)이며 화강석을 주재료로 한 좌우대칭의 고딕양식으로 되어 있다.
평면 H자형이며, 중앙에는 넓은 홀이 있다. 건물 현관의 두 돌기둥에는
학교의 기상을 상징하는 호랑이 상이 조각되어 있고,
중앙 후문의 돌기둥에는 무궁화가 조각되어 있다.
건축 당시에는 내·외부가 호화스럽고 웅장하여,
국내의 학교 건축물로서는 유례가 없는 훌륭한 것이었다.
史跡 286호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가 개교 3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도서관 건물이다.
1935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37년에 완성한 5층 건물로
설계는 본관을 설계한 박동진이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