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자
여자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선생님이 물어보면 무조건 손을 번쩍 들라고 가르친다. 첫 시간 선생님이 묻는다. "자기 이름 쓸 줄 아는 사람?" 아이는 손을 번쩍 든다. 아이는 칠판 앞에 나가 선생님이 준 분필을 들고 선다. 교실 뒤쪽 학부모들 사이에 서 있는 어머니는 가슴을 졸인다. 아이는 전혀 글자를 모른다. 분필을 들고 칠판만 바라본다. 일생보다 더 긴 1분이 흐른다. 보다 못한 선생님이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아이는 칠판에 자신의 이름을 쓴다. 왼쪽 가슴에 단 이름표를 보면서 그대로 그린다. 아내는 그런 사람이다. 글자를 몰라도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있는 사람.
여자 아이에겐 다섯 살 많은 언니가 있다. 하루는 무슨 일로 언니와 다툰다. 초등학교 2학년생과 중학교 1학년생의 차이는 아이와 어른의 그것에 비할 수 있다. 그래도 아이는 전혀 주눅들지 않는다. 말로, 태도로, 기세로 언니를 몰아붙인다. 언니는 참는다. 어지간했으면 그렇게 끝났을 다툼인데 아이는 끝까지 언니에게 머리를 들이민다. 참다 못한 언니가 아이를 두들겨 팬다. 흠씬 두들겨 맞아 머리는 헝클어지고 얼굴은 여기저기 부었지만 아이는 끝내 울지 않는다. 오히려 어린 동생을 때린 언니가 속이 상해 엎드려 엉엉 운다. 우는 언니 뒤에 서서 여자 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울었으니 내가 이긴 거야." 언니는 울다가 웃음을 터뜨린다. 아내는 그런 사람이다. 우는 사람을 웃기는 사람.
여자 아이도 스무 살이 되자 다른 여자들처럼 연애를 한다. 어느 겨울 여자 아이는 남자와 분식집에서 라면을 먹는다. 남자는 알레르기 때문인지 자꾸 코를 훔친다. 그런 남자를 보며 여자 아이는 살큼 웃는다. 그리고 휴지를 자신의 코에 대고 우렁차게 푼다. 남자도 따라서 코를 힘차게 푼다. 둘은 서로를 보며 촌색시처럼 웃는다. 아내는 그런 사람이다.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도 씩씩하게 코를 푸는 사람.
어느 날 여자 아이는 남자와 함께 밤을 보낸다. 다음날 아침 남자에게 말한다.
"너 나랑 결혼해." / "왜?"
"나랑 잤잖아." / "잠만 잤는데?"
"암튼 잤잖아."
아내는 그런 사람이다. 남자에게 먼저 프러포즈하는 사람.
여자 아이는 남자와 결혼한다. 그때 여자와 남자의 나이는 스물 여섯 동갑. 세상이 어떤 곳인지, 결혼이 어떤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아이들이었다. 남자는 착하고 무능해 남편으로는 최악이다. 사람과 술을 좋아하고 바람이 잔뜩 들어 집 밖으로 돌기만 했다. 여자는 죽도록 고생한다. 그러나 고생이 여자를 죽이지는 못한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 한 니체의 말은 여자에게 바쳐져야 한다. 여자는 남자를 대신해 가장 역할을 한다. 억척같이 일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남자를 남편으로 만든다. 사람으로 만든다.
여자가 겨우 사람 만들어 놓은 남자는 이제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신문에 글을 쓴다. 글 속에서 여자는 온갖 악역을 도맡는다. 그래도 불평하지 않는다. 아내는 그런 사람이다. 남편을 위해 악역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 대신 출연료가 비싸서 남편의 원고료를 몽땅 가져가는 사람.
- 중앙일보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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