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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도 고와도 화학 없인 못 살아

淸潭 2007. 3. 31. 09:52

미워도 고와도 화학 없인 못 살아

 

화학자가 짚어 본 생활 속 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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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으로 이루어진 세상
크리스틴 메데페셀헤르만 외 지음, 권세훈 옮김
에코 리브르, 456쪽, 2만7000원

화학이라면 '수헤리베붕탄질(수소.헬륨.리튬.베릴륨.붕소.탄소.질소의 첫글자)…'로 시작하는 원소 주기율표가 먼저 생각나는 분들, 연이어 학창시절 화학반응식 외우느라 지긋지긋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분들도 흥미있게 읽을 만한 화학책이다. 특히 화학 없는 세상을 공해 없는 세상으로 착각하는 분들은 이 책으로 그 막연한 편견을 깰 수 있을 듯. 독일의 화학박사 세명이 화학과 우리 삶의 끈끈한 관계를 꼼꼼히 짚었다.

책 첫 장(章)이 기발하다. 이 세상에 화학이 없다면? 자동차가 없으니 교통사고 위험도 없다. 공장도 없고 건축 기계의 소음도 없다. 응고제.유화제.방부제.색소 등이 첨가된 식품도 없고, 빈 병이나 비닐포장지가 거리를 더럽히지도 않는다.

유토피아 아니냐고? 그런데 저기 오는 허리 구부정한 주름투성이 남자가 누구냐. 아니, 내 남편이란다. 로션 한번, 자외선차단제 한번 못 발라봤으니 피부는 나이보다 훨씬 빨리 늙었다. 굽은 허리는 비타민 D를 보충할 알약을 못 먹어 생긴 구루병 탓이다. 애는 무려 다섯 명. 피임약도 콘돔도 없어 가족계획을 못 세웠다. 비누가 없으니 몸도 옷도 꼬질꼬질이다. 치약과 칫솔이 없어 이도 벌써 몇 개 빠졌다. 입고 있는 모직 재킷은 너무 뻣뻣해 피부에 상처를 낸다. 먹거리도 걱정이다. 냉장고가 없으니 음식에서 곰팡이 골라내는 게 큰 일이다.

하지만 안심하라! 실제 세상은 온통 화학으로 가득차 있으니. 이게 이 책의 주제다.

우선 우리가 입고 있는 옷부터 살펴보자. 화학물질로 뒤범벅돼 있다고 봐도 된다. 합성섬유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순면 100% 티셔츠도 세탁 후 후줄근하게 보이지 않으려면 화학적 가공을 해야 한다. 일단 표백. 섬유는 원래 순수한 흰색이 아니다. 흰 옷을 만들려면 탈색이 필수적이고, 염색을 한다 해도 일단 탈색 공정을 거쳐야 한다. 표백제로는 아염소산나트륨.과산화수소 등이 주로 사용되는데, 모든 표백 과정에서 산소가 물질을 분해하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

표백 이후에는 염색과 항균 처리, 정전기 방지 처리 등을 거친다. 또 촉감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동식물 기름과 멜라민 수지, 실록산, 암모니아염 등을 첨가하고, 구김이 덜 생기라고 섬유 조직을 망상 구조로 만드는 화학 처리를 한다. 망상 구조가 되면 조직이 수분을 흡수해 주름이 덜 생기게 한다. 여기에다 광택이 나도록, 형광빛이 돌도록, 얼룩이 쉽게 지워지도록 갖은 화학 반응을 유도한다. 끝이 없다. 오죽하면 저자들도 "피부에 직접 닿는 옷은 세탁 후에 입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음주측정테스트의 원리도 화학이다. '후~'하며 내뿜는 입김 속의 알코올 양을 산화.환원 반응으로 측정한다. 음주측정용 테스트 관 속에는 색을 띤 크롬 화합물이 들어있다. 입김에서 나온 알코올이 이것과 접촉하면 산화돼 아세트알데하이드가 된다. 그와 동시에 크롬 화합물은 환원되면서 색이 변한다.

화학은 완전범죄도 막는다. 정원의 흙이나 질퍽질퍽한 바닥에 남아있는 범인의 발자국을 찾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하지만 양탄자에 남긴 족적을 찾으려면 화학의 힘을 빌려야 한다. 양탄자 위를 뛰어가면 표면에 정전기 충전이 발생한다. 그 위에 미세한 합성수지 알갱이를 뿌리면 정전기로 충전된 양탄자 부위에만 달라붙는다. 이런 방법으로 범인 신발의 밑바닥 모양과 마모 상태까지 알아볼 수 있다.

생활 속 화학이라면 약을 빼놓을 수 없다. 섣부른 지식으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빚었던 입덧완화제 탈리도마이드 사례는 안타깝다. 이 약은 분자의 성분과 원소들의 배열 방법은 같지만 그 형태가 대칭형태로 나뉜 '키랄(Chiral.손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성'이어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물질이 각각 달랐다. 탈리도마이드의 두 분자형태 중 하나(책에서는 그것이 L형인지, D형인지 드러나지 않았다)가 태아의 연골형성에 필수적인 효소와 결합해 효소의 작용을 억제했다. 그 결과 수천명의 아이들이 손발이 정상적으로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다른 한 형태는 효소와는 결합하지 않고 임산부의 입덧만 완화시켰다.

책은 화장품과 다이아몬드, 자동차와 석유, 포도주.초콜릿 등의 기호품, 쓰레기 문제와 마약 등 우리 삶의 온갖 영역을 화학의 시각에서 설명해 준다. 읽고 나면 딱딱했던 화학이 우리 상식과 교양의 범주에 성큼 들어온다.

이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