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7대 불가사의
쿠푸왕의 대피라밋(Khufu's Great Pyramid )
고대 바빌론의 공중정원(The Hanging Gardens of Babylon)
올림피아의 제우스 상(The Statue of Zeus at Olympia )
에페수스의 아르테미 신전(The Temple of Artemis)
할리카르낫소스의 마우솔루스 왕 능묘(The Mausoleum at Halicarnassus )
로도스의 거상(The Colossus of Rhodes)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The Pharos of Alexandria)
1. 이집트 기자에 있는 쿠푸왕의 피라미드(Pyramid)
고대 이집트의 국왕·왕비·왕족 무덤의 한 형식. 어원은 그리스어인 피라미스(pyramis)이며, 이집트인은 메르라 불렀다. 현재 80기(基)가 알려져 있으나, 대부분은 카이로 서쪽 아부 라와슈에서 일라훈에 이르는 남북 약 90 km인 나일강 서안 사막 연변에 점재해 있다. 그러나 와력(瓦礫)의 산으로 변한 것과 흔적만 남아 있는 것도 있어, 옛날의 모습을 남기고 있는 것은 의외로 적다.
위의 사진에서는 가장 뒤에 있는 것이 쿠푸왕의 피라미드이다. 가운데에 있는 피라미드가 가장 커 보이는데, 이것은 원래 높은 땅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왼쪽 사진에서 제일 왼쪽에 있는 큰 피라미드가 쿠푸왕의 피라미드이다. 피라미드에 대해 현재 남아 있는 최고(最古)의 기록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BC 5세기)의 <역사> 권2에 있다. 그는 기자의 대(大)피라미드에 관하여 10만 명이 3개월 교대로 20년에 걸쳐 건조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쿠푸는 카이로 남서쪽 15 km에 위치한 기자에 최대의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대피라미드 또는 제1피라미드라 일컬어지며, 높이 146.5 m(현재 137 m), 저변 230 m, 사면각도는 51 °52 '이다. 각 능선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오차는 최대의 것이라도 5 °30 '에 지나지 않은 만큼 극히 정교한 것으로, 피트리에 의하면 평균 2.5 t의 돌을 230만개나 쌓아올렸다. 진정 세계 최대의 석조건물로서 그 장대한 규모와 간결한 미는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다. 내부구조는 복잡해서 독일의 보르하르트에 의하면 계획이 2번 변경되었다고 한다. 북측의 지면에서 약간 위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 그대로 하강하면 암반 밑에 설치된 방에 도달한다. 이곳이 제1차 계획의 매장실이고, 그 위에 있는 통칭 ‘왕비의 방’이 제2차 계획의 매장실이다. 그리고 제3차 계획에 의해 피라미드는 완성되었다. 제1피라미드 남서쪽에 카프라왕의 제2피라미드가 있다. 높이 136 m, 밑변 216 m, 동쪽에 있는 장제신전에 450 m의 참배로가 뻗어 하곡신전에 이른다. 유명한 스핑크스는 하곡신전에 가까운 참배로 북쪽에 엎드려 있다. 기자에는 그 밖에 멘카우레왕의 제3피라미드와 왕족들의 소(小)피라미드 6기가 있다.
[건조법] 피라미드를 건조함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무거운 석재를 필요한 높이까지 운반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피라미드 측면에 직각으로 경사로를 만들고 석재는 썰매로 운반하였다. 일정한 높이마다 핵재(核材)·내장재·전재(塡材)·외장재의 순으로 쌓아놓고, 피라미드가 높아짐에 따라 경사로도 높아졌다. 이 경우 경사로의 기울기는 일정해야 하므로 길이는 점차 길어진다. 정상까지 다 쌓고나면 위에서부터 외장을 완공시켜가면서 서서히 경사로를 낮게 하여 완성시키는 방법을 취하였다.
외장은 정성들여 시공되고, 석재는 종이 한 장 끼워지지 않은 정도로 정밀하게 쌓아졌다. 완성에 걸린 연대에 대하여 헤로도투스는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20년이라 적었으나, 실제로는 더 짧은 기간으로 생각된다.
2. 메소포타미아 바빌론의 세미라미스 공중 정원(空中庭園)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왕비의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해서 공중 정원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
3. 제우스 신상
제우스 상이 있는 올림피아는 그리스 남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쪽 앨리스 지방에 있는 제우스의 신역으로서 완만한 구릉 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이 곳은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경기로 예부터 잘 알려져 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최고의 신 제우스를 믿었다. 제우스는 고대 로마의 최고의 신 '주피터'와 같이 고대 그리스 신 가운데 최고의 신으로 천둥, 번개와 비바람을 만드는 신이며, 그의 주 무기는 벼락이었다. 제우스는 우주를 지배하는 신이며, 인간 세계를 다스리는 신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도시마다 제우스 신을 모신 신전을 짓고 성대한 제사를 지냈다. 고대 그리스에는 아테네, 스파르타, 앨리스 등의 도시 국가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처음에는 땅의 신 크로노스와 여신 헤라를 숭배했지만 뒤에 제우스 신을 숭배하게 되어서 B.C457년에 제우스 신전을 만들었고 그 안에 '피디아스'가 만든 제우스 상을 안치하였다.
제우스 신상과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네 여신상은 피디아스의 2대 걸작품으로 꼽힌다. 피디아스는 8년여의 작업 끝에 제우스 상을 완성했는데, 그는 제우스의 신성함 위엄과 함께 너그러움을 거의 완벽하게 표현해냈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걸작 중의 걸작 제우스 상은 오늘날 안타깝게도 남아 있지 않다. 대지 위에 우뚝 세워진 신전에는 양옆에 열세 개씩, 양끝에 여섯 개씩 장엄하고 무거운 도리아식 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완만하게 기울어진 지붕이 덮여 있다. 이 신전의 한가운데 있는 제우스 상은 높이가 90㎝, 폭이 6.6m인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는데, 높이가 12m 정도 되는 상은 거의 천장을 닿고 있다.
제우스 상은 나무로 만들어져 그 위에 보석과 흑단, 상아를 박아 장식한 금으로 만든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금으로 된 발 디딤대에 올려져 있는 양다리는 거의 예배자의 눈높이와 일치하였다. 오른손에는 금과 상아로 만든 승리의 여신(Nike)상을 떠받치고 있으며 왼손에는 황금을 박아 장식한 지팡이(왕홀)를 쥐고 있다. 지팡이 위에는 매가 앉아 있다. 상아로 만들어진 어깨에는 꽃과 동물이 새겨진 황금의 아름다운 망토가 걸쳐져 있다.
제우스 신전의 발굴 움직임이 18세기 경부터 일어났고 처음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였다. 1829년 프랑스인이 제우스 신전이 있던 자리를 발굴하기 시작하여 메도프, 기둥, 지붕 등의 파편을 발견하였다. 1875년경에 독일 정부의 본격적인 발굴 작업에 의해 올림피아의 전체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고, 제우스상이 있던 신전도 거의 드러나게 되었다. 1950년대 제우스 신전 터에서 피디아스의 작업장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제우스 상이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히 밝혀졌다.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에는 뛰어난 건축가와 조각가들이 많았었다. 아테네 화가 카르미데스의 아들인 페이디아스도 그중 한 사람이다. 기원전 490년경에 태어난 그는 그리스 조각의 고전기를 대표하는 거장으로서, 그가 조각한 것이라고 입증할 만한 작품은 없지만 파르테논 신전에 장식된 조각들을 통해서 그 작풍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책에서는 아테네의 파르테노스상(象)과 올림피아의 제우스상(象)은 그가 조각한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제우스상이 있는 올림피아는 그리스의 펠레포네소스반도 북서쪽 앨리스 지방에 있는 제우스의 신역(神域)으로서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경기로 예부터 알려져 있다. 그리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곳 올림피아는 종교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처음 그리스인들은 땅의 신 크로노스와 여신 헤라를 숭배 했지만 후에는 제우스신을 숭배하게 되어서 기원전 457년에 우뢰의 신 제우스 신전을 만들었고 그 안에 페이디아스가 만든 제우스상을 안치하였다. 대지 위에 우뚝 세워진 신전에는 양옆에 열세개씩,양끝에 여섯 개씩 장엄하고 무거운 도리아식 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완만하게 기울어진 지붕이 덮여있다.
이 신전의 한가운데에 있는 제우스상은 높이가 90cm, 폭이 6.6m인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는데 높이가 12m정도 되는 상은 거의 천장에 닿고 있다. 제우스상은 보석과 흑단(黑檀), 상아를 박아 장식한 금으로 만든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금으로 된 발디딤대에 올려져 있는 양다리는 거의 예배자의 눈높이와 일치하는 위치에 있다. 오른손으로는 금과 상아로 만든 승리의 여신 니케상(象)을 떠받치고 있으며 왼손은 황금을 박아 장식한 지팡이를 쥐고 있다. 지팡이 위에는 매가 앉아있다. 상아로 만들어진 어깨에는 꽃과 동물이 새겨진 황금의 아름다운 망토가 걸쳐져 있다.
어떤 고대인은 제우스상을 보고 다음과 같은 감상을 토로했다고 한다. "무거운 짐을 진 사람도, 불행과 비극에서 헤어 나지 못하는 사람도 만약 우뚝 서 있는 제우스상을 보게 된다면 고통과 절망을 잊어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올림피아라 하면 누구든지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경기를 생각하게 된다.전설에는 헤라클레스가 효시였다고 한다. 제1회 대회는 기원전 776년에 벌어졌고 기원후 217년까지는 4년마다 개최되었다. 처음에는 지방행사에 불과 했지만 나주에는 그리스인의 행사가 되었다. 이 경기는 그리스가 지배권을 잃은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지만 394년에 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경기금지 칙령을 내렸고 426년에는 이교의 신전파괴령이 내려짐으로써
제우스 신역은 파괴되었다. 더욱이 522년과 551년의 지진으로 크로노스 언덕이 허물어졌고 그라데오스 하천의 범람으로 신역은 3~5미터 아래 모래층으로 매몰되어 버리고 말았다. 후에 그리스가 독립한 1829년에 프랑스인이 제우스 신전이 있던 자리를 발굴하기 시작하여 메도프(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기둥,지붕 등의 파편을 발견하였다. 1875~1881년에는 독일 정부에 의해 본격적으로 발굴이 시작되어 올림피아의 전체모습이 드러나게 되었고 제우스상이 있던 신전도 거의 드러나게 되었다.
4. 에페수스(Ephesus)의 Artemis 신전 [로마 신화의 달과 사냥의 신인 Diana]
이 신전은 당시 최고 부자였던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B.C 560∼B.C 546)때 세우기 시작하였다. 높이 20미터 정도의 훌륭한 이오니아풍의 백색 대리석 기둥을 127개나 사용한 이 신전은 완성되기 까지 120년이 걸렸다고 한다. 야심이 강한 에페수스인들은 자신들의 신전을 지금까지 어떤 신전보다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것으로 만들고자 하여, 그 당시 가장 훌륭했던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신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파르테논은 길이가 69m. 폭이 30m, 높이 10정도로서, 대리석 기둥을 58개나 사용한 신전이었다. 에페수스인들은 아르테미스 신전을 파르테논 신전의 두 배 정도의 규모로 만들기 시작했다. 높이 18m짜리 기둥을 127개나 사용했고, 길이는 120m, 폭은 60m로 했다. 또한 신전의 건축용 자재는 가장 순도 높은 백색 대리석만을 사용했으며 중앙의 넓은 홀에는 네 방향으로 대리석 계단을 딛고 올라갈 수 있게 하였다. 그 규모나 화려함은 당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아르테미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 제우스와 레토의 딸, 아폴론과는 쌍둥이 남매간이다. 처녀 사냥꾼으로 산과 들에서 사슴을 쫓는 활의 명수라고 하며, 그의 화살은 산욕(産褥)을 치르는 여자를 고통없이 그 자리에서 죽게 하는 힘을 지녔다고 한다. 또한 처녀의 수호신으로서, 순결 정절의 상징이었는데, 처녀의 순결에 상처를 입힘으로써 죽음의 벌을 받은 자 가운데는 오리온이나 아크타이온이 있다. |
신전이 불타버리자 디나크라테스는 재건에 바로 착수했는데 이때 에베소에 살고 있는 여인들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보석 등의 귀금속을 팔았고 각지의 왕들은 기둥을 기증하기도 하였다. 특히 아시아로 원정을 떠나던 알렉산더 대왕은 완성 중이던 이 신전에 마음이 빼앗겨 자기의 이름으로 이 신전을 세워준다면 모든 비용을 대겠다고 공언했으나, 이방의 신전을 에베소에 세울 수는 없다고 거절했다. 에베소인들은 아르테미스 신전 복구 사업을 국가적인 대사업으로 삼고, 그 당시 가장 훌륭한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2배나 더 크고 빼어난 신전으로 만들려고 했다. 에베소인들은 파르테논 신전이 높이 10미터 대리석 기둥을 58개 사용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높이 18미터짜리 기둥을 127개 사용하였고 길이나 폭도 파르테논 신전의 두배 정도로 만들었다. 건축 자재는 가장 순도가 높은 백색 대리석만을 사용했으며 대리석 계단을 사방으로 내서 중앙의 홀로 올라가게 만들었다. 이 신전이 기원전 250년 경에 완성되자, 곧바로 전세계에 그 규모와 화려함이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에베소 시는 아르테미스 신전과 더불어 시가지의 건축물들이 대부분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시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던 성벽으로도 유명하여 관광 명소가 되었다. 에베소 항구에는 관광객들을 태운 배들과 교역을 위한 상인들로 넘쳤다. |
그런데 화려한 신전이 세워지고 영화를 누리게 된 에베소 시에 기독교의 물결이 밀려들어 왔다. 우상 숭배를 금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의 눈에는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신전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행태는 자신들의 교의에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것이었다. 요한 계시록 제 2장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경고의 편지로 첫사랑을 버린 것을 반성하고 처음 하던 일을 다시 하지 않으면 등경을 그 자리에서 치워버리겠다고 적고 있다. 사도 바울도 이곳에서 우상 숭배를 하지 말 것을 권유하면서 에베소 사람들과 있었던 충돌에 대하여 적고 있다. 형상화된 신의 이미지를 숭상했던 문화와 내면의 신성을 표현하려고 했던 문화가 서로 마찰을 일으켰으나 아르테미스 신전은 건재했고 기독교는 소아시아와 유렵으로 전파되어 갔다. 기독교도와의 충돌에서도 에베소 사람들은 아르테미스 신전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신전은 기원 후 260~268년에 유럽에서 아시아로 이동해온 고트인들에 의해 약탈되었고 이때의 방화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에베소의 신전은 화려한 영광에 대한 기억과 거대한 대리석들의 잔해를 남겼다. 사람들은 신전의 잔해들을 주으려고 이곳으로 왔다. 신전에 서 있는 돌이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폐허 위로는 먼지와 흙이 쌓이게 되었고 마침내 땅 밑으로 깊숙히 들어가게 되자 그 마을 사람들도 신전이 어디에 있었는지 아는 사람들이 없게 되버렸다. |
마을의 어떤 곳이 과거에 아름다움과 영광을 가져다주었던 신전이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상태는 1863년 영국의 고고학자 J.T.와트가 발굴에 착수하기까지 1600년 동안 지속되었다. 와트는 과거의 역사서와 지리서, 철학서를 가지고 이를 고증하였고 신전에서 발굴한 유물을 가지고 상당히 정확하게 신전 본래의 모습을 복원했다고 한다. 과거에 우람한 상선과 함대를 맞이했던 에베소는 이제 약간의 주민들만이 살아가는 늪지로 변해 있다. 건물 하나의 운명이 인근 도시의 운명을 좌우했던 것일까? 고대의 에베소인들이 애지중지 건설하고 복원했던 아르테미스 신전, 동고트 족의 침략으로 신전과 함께 유린된 도시, 에베소는 아르테미스 신전과 운명을 같이 했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
5. 할리카르나소스(Halicarnassus)의 마우솔로스 영묘(靈廟) - Mausoleum
페르시아 제국 카리아의 총독 마우솔로스를 위하여 그리스의 할리카르나소스에 건조된 장려한 무덤기념물이다.
면적 29×35.6 m, 높이 50 m. 할리카르나소스의 묘묘(墓廟)라고도 한다. 마우솔로스의 생전에 착공되었으나, 그가 죽은 뒤 왕비 아르테미시아가 계속 진행하였으나 완성된 시기는 왕비 아르테미시아가 죽은(BC 350) 뒤로 추측된다.
설계는 사티로스와 피테오스가 하였다. 동서남북의 장식조각은 각각 스코파스, 레오카레스, 티모테오스, 브리아크시스가 담당하였다.
각 면의 조각·프리즈는 발굴되어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또, 로마인은 비슷한 대규모의 분묘건축(墳墓建築)도 마우솔레움이라고 일컬었다. 마우솔레움은 그 특이한 모양과 복잡한 장식 때문에 세계의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혔다.
6. 로도스 항구의 거상 - colossus 로도스 항구에 서 있던 태양신 <헬리오스 청동상>은 높이가 36 m나 되었으며, 린도스(로도스 섬 동쪽에 있던 고대 도시의 이름)의 카리오스에 의해 BC 280년경 건조되었는데 BC 224년의 지진 때 붕괴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 현존하는 것도 많으나 모두 기념비적인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거상(巨像). 그리스어 콜로소스에서 유래한다. 그리스의 헤로도토스가 이집트 기자의 스핑크스 등을 보고나서 칭한 말이 그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스 시대에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로도스섬의 콜로서스이다.
7.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1994년 가을에 프랑스 해저 고고학 발굴팀이 깊이 7m 정도의 바다 속에서 등대의 잔해 수백점을 건지는데 성공을 하였다. 이로써 오랫동안 수수께끼에 싸여 있던 파로스 등대의 신비가 조금이나나 벗겨졌다. 발굴팀은 화강암으로 된 높이 4.55m, 무게 12톤의 여신상을 기중기로 끌어 올리는데 성공하였다. 발굴팀은 아직도 바다 속에 스핑크스와 오벨리스크 등이 잠겨져 있어 그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고 밝혔다. 여기에서 발굴된 잔해 또는 조형물마다 고대 이집트의 상형 문자가 새겨져 있어서 사람들은 파로스 등대의 비밀이 밝혀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는 파로스 섬과 헵타스타디온이라고 불리던 1㎞정도의 제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곳의 동쪽 끝에 세계의 모든 등대의 원조격인 파로스 등대가 서 있었다. 대부분이 대리석 돌로된 등대의 높이가 135m로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명령으로 소스트라투스가 만들었다. 등대는 3개의 층계로 만들어졌다. 맨 아래층이 4각형, 가운데층이 8각형, 꼭대기 층은 원통형이었다. 각 층은 모두 약간 안쪽으로 기울게 지어졌다(기울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음). 등대 안쪽에는 나선형의 길이 있어서 등대 꼭대기의 옥탑까지 이어져 있었다. 옥탑 위에는 거대한 동상(여신상)이 우뚝 솟아 있었는데 아마도 알렉산드 대왕이나 태양신 헬리오스의 모양을 본떴을 것으로 여기지고 있다.
등대 꼭대기의 전망대에서는 수십킬로미터나 떨어진 지중해를 바라볼 수 있고 또 먼 본토까지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7c이후 이집트를 정복했던 아랍인들에 따르면 램프 뒤쪽의 반사경으로 비치는 타오르는 불길은 43㎞정도 떨어진 바다에서도 볼 수 있었고, 맑은 날에는 콘스탄티노플까지도 반사경이 비쳤으며 또 햇빛을 반사시키면 160㎞ 정도 떨어져 있는 배도 태울 수 있었다고 한다.
B.C280년경에 만들어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어떻게 등대에 불을 지폈을까?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파로스 등대는 상당히 오랜 기간 존속하면서 등대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단단한 돌로된 등대가 무너진 것은 12c경으로 짐작하고 있다. 아마도 1100년과 1307년의 두차례의 큰 지진으로 그 모습을 감추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잊혀져 있다가 20세기 초반 독일의 고고학자들이 등대의 흔적을 발견함으로써 그 모습을 처음으로 알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