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실/우리의옛것

옛날 담장의 여러형태

淸潭 2006. 11. 23. 21:02

담장


담 대신에 풀이나 나무 등을 얽어서 집을 둘러막거나 경계를 가르는 것을 ‘울(울타리)’이라고 하는데, 이 말도 옷과 같은 낱말겨레에 드는 분화어로, ‘위(上)’의 뜻을 의미소로 하는 형태이다. 짐승을 가두기 위하여 둘러막은 공간을 ‘우리’라고도 한다. ‘소 우리, 돼지 우리, 염소 우리’가 바로 그러한 이름들이다.

‘울/우리’는 한정된 공간을 나타낸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운명 지워진 공간과 시간에서 살고 있다. 너와 나를 함께 뭉뚱그린 복수의 개념으로서의 ‘우리’ 또한 소 우리의 ‘우리’와 같은 말에서 발달하여 다른 뜻으로 갈라져 나간 형태라고 하겠다. 물론 우리말의 인칭대명사에 나와 너를 합한 호칭이 없어 이른바 보충법에 따른 공간을 가리키는 ‘우리’가 인칭대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니까 특정한 공간을 바탕으로 하여 특정한 공간에 사는 사람들을 합쳐서 그냥 ‘우리’라고 했으니, 마치 당호(堂號)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나 같다고 하겠다.(우리말의 상상력 237쪽,정호완,정신세계사)


한마디로 담장은 너와 나를 혹은 우리를 구분 짓고자 만든 울타리로 꽤나 폐쇄적인 우리의 가족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아진다.

담장의 기원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가족과 재산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사회의 구성원이 분화되고 사유재산이 생겨남으로써 차츰 만들어져 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사기> 옥사조(屋舍條)의 기록을 보면 그 당시 이미 담장이 원래의 기능을 넘어서서 장식적으로 꽤나 발전이 되어 최상지배층인 성골을 제외하고 신분의 차등에 따라 규제를 달리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진골은 회랑(回廊)을 돌릴 수 없으며 담장에 석회를 바르지 못하게 하였고, 그 아래 계층들은 담장의 높이까지도 각각 규제를 받았었다.

이후 고려 때도 한층 성행을 하였고 조선시대 들어와서는 초창기 세종 때 서울에 큰 화재가 발생한 후로 화재예방을 위한 화방담(火防墻)이 한때 장안에서 유행을 하기도 하였다.


담장의 유형은 우선 사용된 재료를 기준으로 보면

 

대나무,싸리나무,억새 등으로 만든 바자울,

 

 

탱자나무와 같은 생나무로 된 생울타리,

 

 

흙을 사용한 토담,

 

 

돌만 사용한 돌각담(강담),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한 토석담,

 

 

기와만 사용한 와편담

 

 

기와와 흙 등으로 한껏 맵시를 부린 와편토담

 

 

전돌을 쓴 전돌담

 

등으로 나누어볼 수 있으며

 

돌과 기와 등으로 두 가지 이상을 혼용하여

 

조성하기도 하였다.

 

다음 형태적인 구분으로는

 

각담 중 사고석(四塊石:장정 혼자 네 덩이 정도를 들 수 있는 돌)으로 쌓은 사고석담,

 

 

 

전돌로 여러 가지 상징문양을 새겨놓은 꽃담(花墻), 영롱장(玲瓏墻)

 

 

등이 있다.

 

 

또 방법적인 특징으로 사고석이나 전돌에 우리의 전통적인 면회법(面灰法)이라 하여 서양식과는 반대로 줄눈을 도드라지게 하여 그 줄눈으로 상징이나 글씨를 새겨 넣기도 하였다.

 

 

그리고 만드는 기법으로 보자면 홑담(편축)과 맞담(협축)이 있는데,

 

홑담은 돌을 담 벽면의 한쪽만 쌓고 반대쪽은 다르게 하는 것으로 건물의 화방벽 같은 식이며

 

 

맞담은 돌을 양쪽으로 쌓아올린 것

 

으로 대개의 돌담이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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