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송합니다” 시대 저무나…미국에선 철학과가 컴공보다 취업 잘 된다
철학 특유 논리적 겸손, AI 오류 줄여
철학과 졸업생·교수, 줄줄이 스카우트
안전 중요시하는 클로드, 헌법까지 제정
AI 규제 강화 속 철학자 위상 높아질 전망

취업난의 심화로 한때 대학가에서 자조적으로 떠돌던 말이 있다. “문송합니다(‘문과+죄송합니다’의 합성어)”가 바로 그것. 특히 문학·사학과 함께 인문학의 근간을 이루는 ‘문사철’ 중 하나인 철학과는 2000년대 이후 ‘취업 못 하는 대표적 학과’로 낙인 찍히는 설움을 겪었다.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이러한 고정관념도 기저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형 AI 기업들이 상주 철학자 제도를 도입하고 철학 인재를 앞다투어 뽑고 있어서다.
24일(현지 시간)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AI 모델의 추론 능력과 안전성, 윤리적 판단을 개선하는 데 철학이 핵심 역할을 하면서 AI 기업들이 철학자들을 대거 기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올해 초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미국에서 컴퓨터공학 전공자의 실업률은 7%였지만 철학 전공자는 5.1%에 그쳤다. 예일대 철학자인 루치아노 플로리디 교수는 “학생들이 졸업하기도 전에 AI 기업으로부터 입사 제안을 받고 있다”며 “대학 철학과에서는 교수들이 빠져나가는 출혈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철학이 각광받는 이유는 AI의 오류를 줄이는 데 실용적으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00년이 넘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현대 최첨단 AI에도 유용하게 쓰인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기록한 ‘소크라테스 문답법’이다. 질문을 이어가며 모순을 찾고 개념을 확실히 하는 방식이 AI 모델의 아첨하는 경향을 억제한다는 것이다. 또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안다’는 겸손함으로 대표되는 ‘소크라테스의 무지’를 AI에 반영하면 과도한 자신감과 환각을 줄일 수 있다.
구글 딥마인드의 수석 철학자 아이슨 가브리엘은 “최근 AI 업계 전반에서 환각 현상이 감소한 것도 이러한 접근과 무관하지 않다”면서 “철학은 AI의 장문 추론 과정인 ‘사고의 연쇄’를 개선하는 강력한 수단”이라고 평가했다.

앤스로픽은 해당 문서에서 “클로드의 헌법은 클로드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형성하는 근본적인 문서”라고 강조했다. 해당 문서는 사내에서 클로드의 ‘영혼 문서(soul doc)’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클로드의 헌법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칸트 철학으로 대표되는 의무론적 요소다. 앤스로픽은 “클로드가 운영자와 사용자, 그리고 이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세상 전체에 이롭게 작용하기를 바란다”면서 “운영자나 사용자의 이익과 욕구가 제3자 또는 사회 전반의 안녕과 충돌할 때, 클로드는 가장 이로운 방식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헌법은 정직성과 인류 전체를 향한 이로움 등 도덕 법칙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또 다른 철학 분파도 있다. 결과주의는 행동의 결과가 가져오는 편익과 비용을 비교해 판단한다. 오픈AI의 챗GPT와 구글의 제미나이는 이러한 접근에 더 가깝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분석했다. 앞서 구글은 AI 모델이 “예상 가능한 위험보다 전체적인 이익이 훨씬 크도록 설계했다”고 설명했는데, 이것이 곧 전형적인 결과주의적 목표를 가리킨다는 설명이다. 결과주의는 자율주행차와 군사용 AI 분야에서도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타임지는 2024년 ‘AI 100인’으로 앤스로픽의 상주 철학자인 아만다 애스켈을 선정했다. 타임지는 “앤스로픽 클로드는 업계에서 친근하고 호기심 많으며, 주요 경쟁 모델인 챗GPT보다 조금 더 창의적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다”며 “이처럼 세심하게 설계된 클로드를 만든 건 애스켈의 공이 크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애스켈은 앤스로픽에서 ‘성격 및 정렬(Personality and Alignment) 팀’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애스켈이 먼저 몸을 담았던 조직은 앤스로픽의 경쟁사 오픈AI다. 옥스퍼드대에서 철학 학사를, 뉴욕대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오픈AI에서 AI 안전성과 AI 성능에 대한 기준선 연구를 진행하던 중 2021년 앤스로픽으로 이직했다.
사내에서 애스켈은 ‘클로드 위스퍼러(claude whisperer·클로드와 교감하는 사람)’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그만큼 애스켈은 클로드의 성격과 가치관, 도덕적 추론을 담당하며, 클로드 헌법의 주요 저자로서 클로드의 메세지를 조형하는 인물이다. 다리오 아모데이 앤스로픽 최고경영자(CEO)는 “클로드에게는 가끔씩 소소한 유머가 담겨 있다”며 “그 모습에서 아만다의 성격이 조금 느껴지는 것 같다”고 평했다.
박사 학위 논문으로 ‘무한한 인구에 윤리학을 적용하는 것’을 연구하기도 한 애스켈은 타임지에 “선(善)이 무엇인지에 대한 미묘하고 풍부한 개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다”며 클로드가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하는 지점을 강조했다.
구글 딥마인드에도 상주 철학자가 있다. 옥스퍼드 출신의 아이슨 가브리엘과 헨리 셰블린이 대표적으로, 가브리엘은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AI의 가치 기준, 셰블린은 AI와 기계의 의식과 마음을 주로 연구해 왔다. 8000회가 넘는 논문 피인용 수(가브리엘), 기계 의식이라는 떠오르는 연구 주제(셰블린)를 다루는 스타 철학자들이 기업으로 향하면서 AI의 성능만큼이나 윤리적 안정성도 떠오르는 화두가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앤스로픽의 최신 모델 미토스로 각국 사이버 보안 시스템에 구멍이 뚫려 결국 미국 정부가 외국인 이용을 금지시킨 것처럼, 점차 강화되는 AI 규제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철학의 중요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다만 철학자의 AI업계 진출에 우려도 나온다. AI가 윤리적 판단까지 대신하게 되면 인간 스스로 도덕적 판단 능력을 잃는 ‘도덕적 숙련 저하’가 나타날 것이라는 예측에서다. 로만 얌폴스키 루이빌대 AI 연구자는 “도덕은 역사적으로도 끊임없이 변했고 문화마다 다르며,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고 지나고 나서야 평가되는 경우도 많다”고 지적했다. 업계 내에서 철학자의 학술적 성과가 마케팅적 요소로 격하되고 있다는 비판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박민주 기자 m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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