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開空山 月印寒潭 꽃은 공산에 피고 달은 깊은 연못에 떴다.

湛然凝默 千佛一心 흔들림 없이 고요하니 천불이 한 마음이다.

慈航寶筏 汎彼南溟 자비로운 배와 보배 뗏목을 남쪽 바다에 띄웠다.

十方大界 普濟生靈 시방 대계에 모든 생령들을 제도하였다.

眞像在壁 禪敎是則 참 모습 벽에 걸으니 선과 교가 이러한 것으로

覺爾泉凡 惟道之極 깨달음은 근원이며 오직 도로서 다한다. 


통도사에 모셔진 청담준일(淸潭遵一, 1843~1845 활동) 선사에 관한 영찬이다. 청담스님 진영을 보면, 영찬이 적혀 있어야 할 붉은 칸이 비어 있고 대신 목판에 새겨져 진영과 함께 전한다. 문중의 어른이 입적하면 제자들은 평소 스님과 친분이 있고 덕망 높은 선사와 사대부를 찾아가 찬문을 부탁했다. 이때 받은 영찬은 진영에 옮겨 적기도 하지만 때때로 받은 글씨 그대로 나무에 새겨 진영 옆에 봉안했다.

청담스님 영찬 말미에는 죽원거사(竹園居士)라는 인장이 새겨져 있다. 현재 죽원(竹園)의 호를 사용한 이는 19세기 후반에 활동한 유한렴(劉漢廉)이 알려져 있으나 그가 과연 청담스님의 찬문을 지었는지 단언할 수 없다. 다만 서체로 보아 추사 김정희와 일미 권돈인과 관련 있던 인물로 추정된다. 이처럼 찬자는 알 수 없으나 영찬에는 어떤 미사어구로도 표현되지 않는 흔들리지 않는 불심으로 교화를 펼쳐 중생을 제도했던 청담스님의 삶을 고스란히 전하고픈 마음이 깃들어져 있다.

청담스님은 설송연초의 5세손으로 통도사에서 번성했던 응암희유-연파덕장-도암우신(度菴宇伸)의 법맥을 계승했다. 스님은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의 승직을 맡아 교단의 승려들을 관장하는 한편, 통도사 영자전 중창(1843)과 지장전 불사(1845)에 화주와 시주자로 동참하기도 하고 호성필종, 성담의전과 같은 뛰어난 제자를 길러내 통도사의 동량(棟樑)이 되게 했다. 스님이 입적하자 상좌인 호성필종(虎性奭鐘, 1858년 활동)은 화승 의운자우(意雲慈雨)에게 진영 제작을 의뢰하였고 1859년에 완성된 진영은 통도사 극락암에 극진히 모셨다.

[불교신문3200호/2016년5월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