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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秋夕, 오늘의 秋夕

淸潭 2014. 9. 9. 10:47

    그 시절의 秋夕, 오늘의 秋夕


      그 시절의 秋夕, 오늘의 秋夕

        잘 계십니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되어라'는 추석 명절입니다. 건들마가 불면 가을 생각이 나고, 단풍들면 가을 생각이 더 나듯이 창밖으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가 벌써부터 처량하게 들리는 것으로 보아 내게 먼저 물어보지도 않은 가을이, 벌써 이마 앞으로 바싹 다가왔나 봅니다. 여름 하늘은 더워서 바로 쳐다보기에 다소간 겹더라 해도 초가을 밤을 본 지 제법 되어 오늘은 그 하늘이 보고 싶어집니다. 달 아래로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이 한가롭게 보입니다. 여느때의 보름달 그 모양 그대로이건만 달리 보고자 해서인지 오늘의 저 달은 유난히 커 보이는 게, 한가위가 맞기는 맞는가 합니다. 시절이 달라졌다 해도 달은 어릴 때 보던 모양과 크기가 그냥 그대로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그 모습 그대로인 자연의 여전함에 공연히 마음이 기웁니다. 달의 얼굴 위로 고향과 엄마 생각이 포개어집니다. 달라진 세태 사이로 시간이 많이 흘렀다 싶습니다. 그때가 좋았어요. 보리밥 먹던 때의 명절이 오히려 인정이 묻어있었고 조그만 명절치레의 것에도 그저 그것이 흥감하기만 할 뿐 사나흘 전부터 잠이 잘 오지 않던 그때의 명절이 참 그립습니다. 부지런을 떨고 땀 흘린 결과로서 사람들 사는 형편이 나아진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라 할지라도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고, 밥이되었던 죽이되었던 그저 느루 먹어야만 했던 - 하얀 쌀밥 먹어 볼 기대를 했던 - 그때가 자꾸 생각이 납니다. 요즈음보다 별이 더 많이 보이던 그때는 밤길도 정겨웠고 바람마저 지금보다 선듯했습니다. 그런 때가 다시 오지는 않겠지요, 아마...? 어찌보면 가난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쪼들리며 산다는 것은) 그것을 굳이 싫다며 외면하고 살 일도 아닌가 합니다. 가난속에 남을 배려하는 정이 들어 있었고, 고마움에 대한 생각을 하게되었고 무엇보다 인정이 꿈틀거리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왜, 그렇지 않았습니까. 옷가지마다 기워 입고 양말마다 꿰매어 신던 그때의 가난한 시절이 멀리 떠난 친구 생각나듯 이따금 기억에 떠올려 지는 것은 광목 치마 입은 우리 엄마가 그 그림 속에 계셨기 때문이고 희끗했으나 정 많던 아버지가 그 정경 속에서 아직도 우리 마음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여유롭지 못한 살림의 터수 속에서도 효성 지극한 효자는 만들어졌었고 쪼들리는 속에서 살뜰한 인정과 나누어 가지는 미덕도 만들어졌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게 된 물질의 여유는 마음의 샘을 그만 마르게 만들었고 상대적으로 그때의 가난은 인심과 인정을 만든 보약이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고생과 역경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세상을 사는 이치를 안다한들 어찌 제대로 알며 순박한 인정인들 어찌 제대로 사람 냄새나는 모습으로 만들어 나타나 보이겠습니까. 道理도 역경에서 배우고 인내라는 것도 그렇게 단련되는 과정에서 익숙해 질 것입니다. 명절 - 그것이야 말로 이 땅에서 살아온 민족 고유의 풍습의 꽃일진데 나아진 형편들이 그 본래의 색깔을 바꾸어 놓았고 그렇게 흘러간 시간 속에 人心은 모양을 흔들어 놓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각박한 게 싫어서, 가난이 지겨워서 어찌하였건 내자식 내 가족만큼은 잘 먹이고 더 배우게 하여 쪼들림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산 결과로서 허리 띠 졸라매고 입을 것 먹을 것, 절제해가며 이루어 놓은 오늘의 이 모양은 애초에 우리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놈의 가난을 좀 더 곁에 데리고 있어 볼 걸 그랬습니다. 잘 먹되 그건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래서였고 더 배우도록 하되 그것은 오로지 가온 길로 가게하기 위해서 그러했는데 시절과 세월이 그만 고생 고생하며 살아 온 사람들의 심사를 그만 황량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오늘의 이 씁쓸한 입맛의 세태는 결국 우리가 만든 것입니다. 등한했고 제때제때 챙기지 못한 까닭입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고, 누구를 원망 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마에 굵은 주름살이 잡힌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오래 전부터 땅바닥에 궁둥이 깔고 놀던 자리가 어느 결 노는 판이 달라지고 어색해지기 시작하면 먼저 앉았던 한 사람 두 사람, 슬슬 자리를 털고 일어나겠지요. 앞 서 앉았던 사람이 자리를 뜬다해도 뒤에 자리를 한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앞 판의 분위기쯤은 아랑곳없이 또 그들 나름대로 한 판 놀다가 가겠지요. 사는 정서가 아주 그냥 딴 판으로 달라져버린 그런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그날 저녁의 달 역시 오늘의 저 모습과 같이 달문을 열고 휘영청 ! 그렇게 비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세월이 흐른다고 쉽게 달라지는 건 오로지 사람이지 자연과 진실은 그렇게 함부로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 알게됩니다. 이번 추석에는 예전 우리 엄마들이 그랬듯이 달 보고 두 손 비비며 마음 본연(本然)의 자리를 위해 한 번 빌어 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