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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의 교본' 김동건…

淸潭 2013. 5. 26. 12:39

평생 조연으로 산 '아나운서의 교본' 김동건…

 

이달말 방송인생 50년 축하宴서 '첫 주연'

 

  • 선우정
  • 입력 : 2013.05.25 03:02

    스타를 빛내준 조연 50년… 그는 국민의 스타였다
    80년대 재해모금방송 35시간 진행… 사장이 달려와 "당신, 鐵人이야"

    그는 '國寶'였다
    1985년 KBS 야심작 가요무대, 1·2회 실패한 직후 진행 맡아
    첫 방송 본 사장이 PD 불러 '김동건은 국보다' 종이에 써

    그는 '故國'이었다
    "멀리 계신 해외동포 여러분…" 오프닝 멘트에 재외국민 감동
    나중엔 해외근로자·마도로스 농민까지 멘트 넣어달라 경쟁

    두분의 어머니…
    친어머니와는 3살때 사별, 이모네 입적해 자랐어요
    어머니 돌아가시기 두달전 "가요무대 구경안될까"했는데… 결국 못보여드렸어요

    잊을수없는 이산가족 찾기
    33년만에 父子 상봉현장, 아들 상처 확인한 아버지…
    눈물이 뿜어져 나오는데… 그날 방송 힘들었어

    나도 군기잡은 적 있다
    가장 싫어하는 스타일로 옷을 입고 다녔던 김병찬
    "옷으로 방송하냐" 혼냈지, 지금은 가장 아끼는 후배야

    잊을수 없는 최베드로 수녀님
    서울 상계동서 천막 치고, 맹인 환자들 뒷바라지…
    2000명 넘게 대담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죠

    
	아나운서의 전설 김동건
    김동건 아나운서는 영원한 현역이다. 지난 13일 가요무대 ‘작곡가 백영호 10주기’편의 사회를 보고 있는 김동건 아나운서. / 채승우 기자

    올해 현역 50년을 맞은 아나운서 김동건(金東鍵·75)은 말했다. "나는 평생 조연이라고 생각하고 방송했어요. 주연의 이야기를 듣고 빛내주는 역할이었습니다." 31일 후배들이 마련한 '방송 인생 50년 축하연'에서 그는 하루 동안 주연을 맡는다. "기분이 이상하다"고 했다. 그에게 아나운서란 어떤 직업일까? "벽지에서 평생 가르친 초등학교 선생님, 뱃길을 밝힌 등대지기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나운서가 큰 권력이 있든지 큰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었다면 50년을 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후배들에게 겸손하라고 합니다." 그는 "주연을 하고 싶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50년 동안 해보니 조연이 초라한 것도 아니었고, 대단한 주연이 있는 것도 아니더라"고 말했다.

    50년은 긴 시간이다. 김동건은 그래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기 다른 얼굴로 새겨져 있다.

    이민희(55) 변호사에게 김동건은 파릇했던 얄개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얼굴이다. 경기고 졸업반이던 1975년, 그는 김동건이 진행하던 고교생 토크 방송 '우리들 세계'에 출연했다. 그날 주제는 '나'였다. 그는 달걀 한 개를 꺼냈다. "나는 계란입니다. 지금은 작지만 사회가 품어주면 크게 될 계란입니다." "법대에 진학하고 싶다"는 고교생 이민희에게, 김동건은 "법조인이 돼서 다시 만나자"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서울 법대에 진학했고 검사가 됐다. 훗날 이민희는 국회의원이 된 경기고 동기와 함께 김동건을 만났다. 누군가 물었다. "그렇게 유명하면서 왜 국회의원을 안 하셨습니까?" 김동건의 대답을 그는 이렇게 기억했다. "국회의원보다 아나운서가 더 좋으니까."

    신은경(55) 아나운서가 김동건을 처음 만난 것도 '우리들 세계'의 무대였다. 1976년 진명여고 졸업반이던 그는 방송에 출연하는 학교 대표 중 한 명으로 뽑혔다. 하지만 수다스럽게 나서질 못해 맨 구석에서 마무리 코멘트를 하는 것이 그의 몫이었다. "전 활발한 성격이 아니었어요." 그는 "당시 무슨 말을 했는지 잊었다"고 말했다. 이 수줍은 여고생의 말을 기억해낸 것은 김동건이었다. "그날 큰 활약을 못했지만, 신은경은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고 했어요."

    신은경 역시 훗날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했고, 김동건과 함께 1983년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진행했다. 신은경은 말했다. "엄청난 유명인이었는데 곁에서 방송하게 됐으니. 그래도 선배님은 언제나 후배에게 친절하셨죠."

    김동건은 1975년 시작한 '우리들 세계'를 특히 애착이 가는 프로로 꼽았다. "선생님 별명을 부르고 모두가 웃고, 선생님 골탕 먹인 이야기를 하고 또 모두가 웃고. 교복을 입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용서가 됐지요, 사랑스러우니까. 요즘처럼 교복 벗고 그렇게 말했으면 버릇없이 보였을 겁니다." 당시 그는 서른일곱이었다.

    김동건은 1963년 아나운서 세계에 입문했다. DBS(동아방송)에서 출발해 TBC(동양방송)를 거쳐 1973년 KBS(한국방송공사)에 정착했다. 그는 1993년 30년 만에 프리랜서가 된 이후에도 한눈을 팔지 않았다.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아나운서가 그냥 좋아요. 어렸을 때부터."

    감격의 얼굴

    
	이산가족 찾기 방송
    1983년 전국을 뜨겁게 달군 이산가족 찾기 방송. 김동건 아나운서가 신은경 아나운서와 함께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 조선일보 DB

    은퇴한 농업인 허현철(69)씨는 김동건 아나운서를 생각하면 그리움과 감격의 순간이 떠오른다.

    그는 1983년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통해 여동생을 만났다. 33년 만이었다. 스튜디오에서 얼싸안고 울었다. 여동생을 찾은 뒤에도 그는 매일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지켜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방송을 진행하던 김동건 아나운서는 웃음기가 없었어요. 식사도 못 하고 잠도 못 자고 방송을 이끌었으니까. 실수할 것 같으면서 안 하고, 흐트러질 듯하면서도 가다듬고. 스튜디오는 눈물바다가 됐지만, 김동건 아나운서는 신사의 품격을 잃지 않았죠. 그는 철인(鐵人)이었어요."

    김동건이 기억하는 최장(最長) 방송 기록은 토요일 오후 3시부터 월요일 새벽까지 이틀 밤을 새운 35시간 재해 모금 방송이었다. 사상 최대 액수가 모였다. 대통령도 모금에 참여했다. 청와대로부터 격려 전화를 받은 이원홍 당시 KBS 사장이 방송 중 스튜디오로 달려 내려왔다. 그리고 김동건을 향해 말했다. "당신, 철인이야, 철인!" 그리곤 "스시(생선초밥)나 도시락을 좀 싸다 줄까?" 하고 물었다. 김동건은 "그런 건 괜찮고, 스튜디오에서 담배나 좀 피우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후 '절대 금연' 표시가 붙은 스튜디오에서 담배를 태울 수 있는 특권이 그에게만 부여됐다.

    김동건은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이렇게 기억했다. 6·25 피란 때 잃어버린 막내아들을 상봉한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피란 기차가 대전에 정차했을 때 어린 형제가 물을 마시겠다며 내렸는데, 그때 기차가 떠났답니다. 형은 겨우 기차에 올라탔는데 동생은 못 탔다는 거예요. 다음 정거장에서 내린 아버지가 대전까지 달려가서 찾았지만 결국 막내를 찾지 못했답니다. 그후 33년 만에 만난 아버지가 귀 뒤의 흉터를 어루만지며 '내 아들이 맞는다'고 하면서 쏟아내던 눈물은 그야말로 뿜어져 나오는 눈물이었어요. 그런 눈물을 본 적이 없어요. 꿀꺽꿀꺽 눈물이 덩어리로 쏟아지는데…. 마이크를 대고 있던 나도 눈물이 쏟아져 그날 방송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김동건 아나운서가 신사의 품격을 잃지 않았다"는 허현철씨의 기억과 달리, 그는 "그때 굉장히 많이 울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아마도 세 살때 돌아가신 어머니, 6·25 때 행방불명이 되신 아버지 때문일 거예요." 김동건의 고향은 황해도 사리원이다.

    ◇국보급 얼굴

    
	남북적십자 회담 북측단장 KBS방문
    1985년 5월 김동건 아나운서가 KBS를 방문한 이종률 남북적십자 회담 북측단장(사진 왼쪽)과 이영덕 대한적십자사 수석대표(사진 가운데)를 안내하고 있다. / 조선일보 DB
    박현태(80) 전 KBS 사장에게 김동건은 '국보급' 얼굴로 기억된다.

    1985년 시작된 '가요무대'는 KBS 사장이 된 그가 내놓은 첫 야심작이었다. "고생해서 나라를 일으킨 사람들이 볼 가요 프로가 도대체 없었어요. 온통 혜택을 보는 (젊은) 사람들 방송뿐이고." 박현태 사장이 제작진에게 요구한 것은 '격조 있는 가요 프로'였다. 그런데 첫 프로를 본 그는 실망했다. 2회를 보곤 대로(大怒)했다. 그는 "유치하기 짝이 없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담당을 조의진 PD로 바꿨다. 진행은 김동건이 맡았다.

    박현태 사장은 말했다. "코미디언들이 나와서 그냥 빨리빨리, 말의 고저장단도 모르고. 한국말인지, 어느 나라 말인지 분간을 못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김동건 아나운서는 우선 말이 정확해요. 게다가 구수했지요. 무슨 말을 해도 계속 듣고 싶을 정도로."

    박현태 사장은 다음 날 PD를 불러 종이에 이렇게 썼다. '김동건 아나운서는 국보(國寶)다.'

    당시 월요일 밤 시간대는 경쟁사의 사극 '조선왕조 500년'이 독점하고 있었다. 얼마 후 가요무대는 이 아성을 무너뜨렸다. 28년이 지난 지금도 김동건의 가요무대는 쟁쟁한 월화 드라마와 경쟁하면서 10%대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다. 아이돌 가수가 떼로 출연하는 지상파의 3개 음악 프로 시청률을 모두 합친 것보다 높다.

    단단한 마니아층도 형성됐다. 지난 봄철 KBS는 가요무대 방송 시간을 10분 줄이려고 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가요·연예 단체가 KBS에 보낸 탄원서의 한 구절. '실버 세대의 문화적 혜택을 박탈하고 실버 세대의 노고와 수고를 경솔히 여기는 처사다.' KBS는 5분 단축으로 겨우 타협점을 찾았다.

    가수 이미자 역시 김동건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다. 이미자는 30년 동안 자신의 공연 사회자로 김동건만 고집하고 있다. 김동건의 일정이 안 맞으면 자신의 공연 일정을 바꿀 정도다. 이미자의 매니저인 권철호씨는 "장년, 노년층의 라이브무대에서 김동건 아나운서를 따라갈 분이 없다"고 말했다.

    ◇형님의 얼굴

    조의진(62) 전 PD에게 김동건은 '형님'의 얼굴로 떠오른다.

    "가요무대를 대수술하라"는 박현태 사장의 특명을 받은 그는 "형님, 형님" 하면서 김동건을 쫓아다녔다. "형님밖에 맡아줄 사람이 없어요." 그는 "당시 김동건 아나운서가 가요 프로를 맡는 것은 지금 손석희가 가요 프로를 맡는 것과 비슷한 파격이었다"고 말했다. 김동건은 '뉴스 파노라마' '11시에 만납시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등 교양 방송을 진행해 왔기 때문이다.

    김동건은 꺼렸다. "교양으로 완전히 자리를 굳혔는데 내가 왜 쇼 프로를 해야 하느냐고. 그래서 안 한다고 했더니 매일 날 찾아오는 거예요. 그러더니 '오늘 안 해주시면 방송이 펑크 난다'고 하는 겁니다." 후배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김동건은 한 번만 하기로 약속하고 무대에 올랐다. "아니, 웬걸? 김정구, 현인, 고운봉!" 그는 정장을 입고 나타난 원로 가수들의 품격에 놀랐다. "내가 아는 가수들이 다 나와서 눈물겹게 노래하는 겁니다. 내가 제대로 감동했어요." 무대에서 내려온 김동건은 조의진 PD에게 말했다. "내가 계속할게. 이런 프로인 줄 몰랐어."

    김동건은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7년 동안 가요무대를 떠났다. 7년이 지난 후 2010년 5월 10일 가요무대 녹화 무대에 복귀했다. 그는 "가장 힘든 방송을 했다"고 말했다. "뭐가 힘들었냐고? 눈물을 참는 게 힘들었지요."

    조의진 PD는 그를 "정(情)이 많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스태프들이 싸우면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주시고. 주제가 잡히면 어떤 노래가 잘 먹힐 것인지 함께 고민하시고. 세상에 이런 형님이 없어요."

    ◇고국의 얼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김순배(72)씨에게 김동건은 고국(故國)의 얼굴로 떠오른다.

    그는 "김동건의 가요무대 오프닝 멘트를 들으면 가슴이 뜨거워진다"고 말했다. 초기에 정착돼 지금까지 이어지는 오프닝 멘트는 이렇다. "오늘 가요무대를 찾아주신 많은 방청객 여러분, 정말 반갑습니다. 여기까지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또 댁에 계신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또 멀리 계시는 해외 동포 여러분, 해외 근로자 여러분, 지난 한 주 평안하셨겠지요." 언제나 한결같이 차분한 목소리다.

    김순배씨는 말했다. "1980년대에 중동에 나가 돈을 벌었어요. 그때 김동건 아나운서의 오프닝 멘트를 들으면서 고향을 생각했어요. 거처를 미국으로 옮긴 이후에도 그의 오프닝 멘트가 고향의 안부 전화처럼 들려요."

    처음엔 '해외 동포' '해외 근로자' 멘트는 없었다. 가요무대를 시작한 지 석 달쯤 지났을 때였다. 미국과 중동에서 편지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이 노래를 틀어달라, 저 노래를 틀어달라. 한 근로자는 고국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녹음 편지를 보냈다. "아버지 없이 다섯 형제를 키우신 우리 어머니, 지게에 짐을 얹고 그 위에 나를 태우고 피란 내려온 우리 어머니, 제발 오래오래 사세요." 꾸밈없는 순박한 목소리였다. 제작진 모두 울었다. 방송에 내보내자 시청자들도 울었다. "어떤 작가가 쓴 글보다, 어떤 성우가 읽은 것보다 감동이었지. 그래서 해외 동포에게도 인사를 하자, 해외에서 고생하는 근로자에게도 인사를 하자, 이렇게 해서 그 인사가 시작됐습니다."

    얼마 후 문제가 생겼다. '해운의 날'에 출연한 해양청장이 "오대양을 누비는 우리 마도로스도 언급해 달라"고 요청했다. '철도의 날'이 되자 철도공사에서 공식 요청이 들어왔다. "국가의 동맥을 24시간 누비는 철도 기관사"도 넣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번엔 농림부에서 "뙤약볕 아래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국민의 먹을거리를 해결하시는 농민 여러분"도 넣어 달라고 졸랐다.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해외 동포' '해외 근로자'까지 빼버렸다.

    "그랬더니 난리가 났어요, '가요무대의 인사말 한마디에 대한민국 사람이란 걸 느끼고 사는데 무엇이 힘들어서 안 하느냐'는 겁니다. 너무나 많은 항의에 해외 동포와 해외 근로자에 대한 인사를 다시 시작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졌어요."

    ◇어머니의 얼굴

    송현섭(76) 전 국회의원은 김동건 아나운서를 생각하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오른다.

    그는 노모에게 바치는 '오래오래 살아주세요'란 노래를 만들어 취입했다. 가요무대가 그를 불렀다. 그는 95세 어머니를 모시고 무대에 섰다. "세상살이 고달프고 괴로울 때면 마음은 달려가네 어머님 품속으로…." 김동건이 말했다. "어머니가 백세를 넘기시면 다시 한 번 가요무대에 나와주세요." 송현섭은 어머니가 101세 때 다시 가요무대에 섰다. 몸이 아픈 노모는 함께 나오지 못했다. 대신 집에서 이 모습을 지켜봤다. 어머니는 이듬해 10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에 어머님께 큰 기쁨을 드렸다"고 말했다.

    정작 김동건은 어머니께 가요무대 구경을 못 시켜 드렸다. 어느날 "나도 구경가면 안 될까?" 하고 묻는 어머니에게 김동건은 "어머니 그냥 집에서 보세요" 하고 말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방청권을 받기 위해서 새벽 6시부터 줄을 서는데, 내 어머니만 특별히 모시는 건 옳은 일이 아닌 것 같아서." 2개월 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김동건의 어머니는 두 분이다. 평양 서문여고를 나와 교사를 하던 친어머니는 김동건이 세 살 때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언니 손을 잡고 부탁했다. "동석(김동건의 형)이, 동건이를 꼭 경기중학교에 넣어달라"고. 이모는 형제를 입적(入籍)했다. 형부터 서울에 보냈다. 김동건이 지금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모는 두 형제를 모두 경기중학교에 입학시켰다.

    김동건은 몇 년 전 따로 계시던 외할머니와 아버지를 이장해 아버지는 어머니와 합장하고 그 옆에 친부모를 기리는 '망운지정비(望雲之情碑·타향에서 고향의 부모님을 그리워한다는 뜻)'를 세웠다. 그는 "지금까지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이라고 말했다.

    
	가수 조용필씨와 조선일보 주최 춘천국제마라톤 참가 신청하는 김동건 아나운서
    1997년 조선일보 주최 춘천국제마라톤에 가수 조용필씨와 함께 참가 신청을 하는 김동건 아나운서(오른쪽). / 조선일보 DB
    ◇국민 아나운서에게 던진 소소한 질문

    ―아나운서 세계는 군기(軍紀)가 세다는데요?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뉴스를 더듬든지 자고저(字高低·한자음의 높낮이)를 틀리든지 하면, 선배들이 돌아가면서 혹독한 훈련을 시켰습니다. 아나운서실에서 그냥 앉아 있으면, 선배들이 '너희들 아나운서 벌써 다 됐느냐' 이러시는 거예요. 그러면 신인들은 모두 원고를 꺼내 그 자리에서 낭독을 시작했어요."

    ―본인이 가장 세게 군기를 잡은 아나운서 후배는 누구였나요?

    "늘 친절하려 노력했지만, 방송을 가르치는 데는 엄했어요. 예를들어 김병찬 아나운서는 방송은 잘했지만 입고 다니는 옷이 아나운서답지 않았어요. 그래서 '넌 옷으로 방송하느냐?'고 질책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 혼이 나도 도무지 혼난 사람 같지 않았어요.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아서 더 세게 질책을 했지요. 그래도 싫은 내색을 한 적이 없어요. 하하." 김병찬 아나운서는 김동건이 아나운서를 시작한 1963년생이다. "그래서 더 정이 간다"고 했다. 그는 이번 축하연에서 동기생인 손범수 아나운서와 함께 사회를 맡았다.

    ―50년 동안 자기 관리는 어떻게 하셨나요?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형님 말씀을 깊이 새기고 살았어요. 김동길 박사님은 링컨을 가르쳐 주셨고 워즈워스의 무지개란 시를 알려주셨습니다. 항상 어린아이같이 맑은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말씀이었지요. 방우영 회장께서는 '하루는 지루하지만, 일 년은 왜 이렇게 빠른가' 하시면서 시간을 아껴 쓰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50년을 보낸 뒤 아쉬움은?

    "항상 아쉬웠습니다. 방송이 끝났을 때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왜 이렇게밖에 못 했는가' 하는 아쉬움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동안 만난 사람은?

    "'11시에 만납시다' '한국, 한국인'에서 대담한 사람이 2000명이 넘을 거예요. 그중 '11시에 만납시다'에 나온 최베드로 수녀님을 잊을 수 없어요. 당시 상계동에서 천막을 치고 맹인 환자를 뒷바라지한 분이었습니다."

    최베드로(최선옥) 수녀에게 김동건은 고마운 얼굴로 떠오른다.

    김동건이 1993년 제1회 위암 장지연상을 받았을 때였다. 꽃다발을 들고 시상식을 찾은 최베드로 수녀에게 김동건은 상금 모두를 건넸다. "큰돈이었어요. 세금을 뗀 상금을 제가 받았는데 나중에 선생님이 개인 돈으로 뗀 세금까지 보충해 주셨어요." 그는 "김동건 선생님을 위해 매일 기도한다"고 말했다. 훗날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원장을 지낸 최베드로 수녀는 현재 중국 하얼빈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한 안중근 의사의 조카며느리 안노길 할머니를 돌보고 있다.

    김동건은 말했다.

    "50년을 축하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 것 같아요. 누가 하라고 해서 한 것도 아니고 내가 하고 싶어서 했고, 하루하루 하다보니까 어느덧 50년이 됐네요. 50년 동안 변함없이 저를 지켜봐 주시고 박수를 보내주신 시청자 여러분께 깊이 머리를 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