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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에서 달을보다] 문수사 주지 지원 스님

淸潭 2012. 5. 8. 19:30

 

[천강에서 달을보다] 문수사 주지 지원 스님
 
비우고 나누는 마음이 평화와 극락의 출발점
 
2012.03.20 09:44 입력채한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발행호수 : 1138 호 / 발행일 : 2012-03-21

열두 살 출가 보경사서 갱두·채공
송광사 법흥 스님 은사로 삭발염의


진관 스님 만나 인권·민주 인식
아시아 구호·교육 불사에 매진

 

 

▲지원 스님

 

 

문수사 주지 지원스님은 현재 위드 아시아(with ASIA) 이사장이다. 세간에서는 금강산 신계사 복원불사를 진두지휘했던 실무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은사는 송광사 법흥 스님. 법흥 스님이 효봉 스님의 상좌이니 지원 스님은 손상좌인 셈이다. 지원 스님은 1980년 박재삼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해 ‘산문에 부는 바람’ ‘이별연습’ 등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눈길이 가는 것은 위드 아시아! 비영리 NGO 사단법인 위드 아시아(with ASIA)는 아시아 빈곤지역에 구호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북한 어린이 인도지원 사업은 물론 2010년 3월에는 원폭 2세 환우 쉼터인 ‘합천평화의 집’을 설립하기도 했다. 소수민족 절대빈곤층 국제구호 사업과, 국내 소외계층 지원, 대북 사업까지 아우르고 있는 만큼 교계 내외로부터 지대한 관심을 받고 있다.


문수사로 향하면서 지원 스님의 원력이 궁금했다. 위드 아시아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지 말이다. 스님의 출가부터 위드 아시아 출범까지의 여정 속에 그 실마리가 담겨 있을 것이다.


차 한 잔 마시는 사이 출가연을 여쭈어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숙연(宿緣)이다. 입산 출가한 친척들이 어린 그에게 원효, 의상 스님에 대한 이야기 한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해도, 비구니가 된 7촌 누이가 그리 순백하게 보였다 해도, 가문의 장손이 홀로 집을 나와 산사로 향했다는 건, 전생부터 이어져 온 인연에 의한 것이라 하지 않고서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더욱이 동네 동무들과 한창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놀아야 할 열두 살의 나이 아닌가. 포항 보경사에 다다랐을 때, 당시 주지 스님은 어린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물러날 수는 없었지요. ‘산을 내려가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열두 살의 소년은 3일 동안 마루서 잠을 잤다. 이를 기특하게 보았는지 주지 스님도 결국 ‘허허’웃으며 그를 받아들였다. 삭발염의한 스님은 아니었지만 나무를 하고, 국을 끓였다. 당시 보경사 대중이 80여명에 이르렀으니 국 하나 끓이는 것도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었을 터임에도 그는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하나씩 해내며 서서히 승가의 선훈에 젖어 갔다.


1969년 송광사 법흥 스님을 만나 출가했지만 이내 헤어져야 했다. 법흥 스님이 공부 차 향곡 스님이 머물고 있던 묘관음사로 발길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도 은사 스님의 뜻에 따라 통도사로 발길을 돌렸다. 어린 그의 손엔 편지 한 장만 쥐어 주었을 뿐이다. 통도사에 주석하고 있던 홍법 스님에게 전하는 편지 한 통이었다. 홍법 스님은 6·25 한국전쟁 전후 수행진작과 포교를 이끌었던 스님이다. 선교겸비는 물론 계율 또한 철저하게 지켰던 선지식. 세납 49세의 짧은 생이었지만 지금도 스님을 기리는 추모가 이어지고 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편지 속엔 ‘어린 상좌지만 잘 돌봐 주십사’하는 청원이 담겨 있었습니다. 어린 상좌를 통도사로 홀로 보내려 하니 안타까우셨나 봅니다.” 상좌를 향한 스승의 마음이 따뜻하게 읽힌다.


통도사 강원에서 공부하는 동안엔 벽안 스님을 시봉하기도 했다. 벽안 스님이라 하면 통합종단조계종 중앙종회 초대의장을 시작으로 2·3대 중앙종회 의장을 연임하며 종단 발전의 초석을 놓은 스님이다. 청렴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후학들의 귀감이 되었던 벽안스님은 통도사 방장을 역임했다.


“벽안 스님은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중’은 옷을 꿰맬 줄 알아야 하고, 도배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도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지원 스님이 입고 있는 승복은 이런저런 천으로 꿰맨 ‘누더기 납의’다.


17살에 이르러 심신의 변화가 생겼다. 강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인 중에는 고등학교는 물론이고 대학까지 졸업한 도반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이를 지켜 본 지원 스님의 마음이 동했던 것. 은사 법흥 스님에게 ‘사회 학교에 가 공부하고 싶다’고 편지를 썼다. 그러나 돌아 온 답은 한결 같았다. ‘일찍 출가해 부처님 법 만난 것만큼 큰 복이 없다. 불연을 짧게 할 수도 있으니 강원을 마치면 네 뜻대로 해 주겠다.’ 자칫 세속에 물들어 하산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아무도 모르게 홀로 통도사를 나와 범어사로 향했다. 당시 안양암에 머물고 있던 영선 스님에게 고충을 털어 놓았다. 영선 스님은 부산 문수사 덕암 스님에게 지원 스님을 소개했다. 덕암 스님은 경보 스님의 맏상좌로 일본 유학까지 다녀 온 실력파 스님.


“덕암 스님의 영어, 일어 실력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문장 하나 해석하는데도 꽤 시간이 걸렸는데, 스님은 한 눈에 몇 줄씩을 읽어 가셨습니다.”

 

북어린이 돕기가 북군사력 강화?
어른 잘못일 뿐 아이 무슨 죄 있나


‘합천평화의 집’ 물심양면 지원
원폭 2세 고통 몰라주니 ‘답답’

 

 

▲덕암 스님이 창건한 문수사는 지원 스님의 6년 중창불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수사 일을 거들며 덕암 스님으로부터 영어와 수학을 배운 후 고등학교와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했다. 후에, 덕암 스님은 지원 스님을 법 상좌로 받아들였고, 문수사를 지원 스님에게 맡겼다.


“덕암 스님은 시간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습니다. 외부 출입도 자제하셨던 스님은 하루 일과가 정확 했지요. 새벽 세 시면 어김없이 법당에 나오셔서 예불 하시고 기도에 들어가셨습니다. 교학은 물론 외전 공부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법흥, 벽안, 덕암 스님을 모시며 선지식들의 향훈에 젖었던 지원 스님. 평생 수행정진의 길로만 걸었을 법한데 지금은 인권, 반핵, 평화를 말하고 있다. 분명, 어느 기점에서 인식의 대 전환이 이뤄졌던 것이리라.


“진관 스님과의 만남에서 시작된 겁니다.”


현재 불교인권위원회 대표를 맡고 있는 진관 스님은 1980년대 군사독재에 항거하며 교계의 민주화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었다. 물론 당시 교계, 적어도 승가의 민주화 동참은 이웃 종교에 비해 미비 했지만 진관 스님만은 남다른 열정을 불살랐다. 하지만 외로웠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당시 진관 스님은 문수사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어쩌면 시심(詩心)을 안고 있는 지원 스님에게 지친 몸을 뉘이고 싶었는지 모른다.


“진관 스님을 통해 배운 게 참 많습니다. 종교가, 불교가 이 사회에서 해야 할 역할이 진정 무엇인지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더군요.”


지원 스님은 진관 스님과 손을 잡았다.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으며 인권운동에 앞장섰다. 사회의 그늘진 곳이 얼마나 많은지도 이 때 깨달았다. 1999년 조선족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는데 그 역시 지원 스님의 자비발로에서 비롯됐다.


“문수사 주지라는 ‘명함’이 있어서인지 어디를 갔다 오면 여비가 생기더군요. 한 해, 두 해 지나니 통장이 제법 두터워요. 이 정재를 어디에 쓸까 생각하다 조선족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겠다 결심했지요.”
다문화 가정에 대한 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되기도 전에 지원 스님은 이 문제를 간파했던 것이다. 이후 인도를 비롯해 캄보디아, 라오스, 스리랑카 등 세계 각국과 소수민족 절대빈곤층의 고뇌도 끌어안았다.


“지구촌에는 하루 한 끼를 못 먹어 굶주리며 죽어가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오염된 웅덩이 물을 마시고 배앓이를 하다가 죽어가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정성 하나가 그들에겐 크나 큰 희망으로 다가갑니다.”


인도 유피주 에타하마을 불가촉천민지역에 학교를 건립하고, 태국 치앙마이 산악지역 내 소수민족인 라후족을 위해 ‘문수초등학교’를 건립했다. 또한 인도 산티니케탄 주변 원주민 달라마을에 ‘위드아시아 제1중학교’를 건립하고, 캄보디아 최빈곤마을에 어린이 공부방도 2개나 지었다. 캄보디아 어린이 공부방 불사는 지금도 진행중이다. 한 방에 오전엔 80명, 오후엔 130명이 들어오니 공부방은 더 필요할 수밖에 없다. 지원 스님이 교육 사업에 집중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이 근본적인 빈곤을 퇴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드 아시아가 펼치는 사업 중에 유독 눈에 띄는 분야가 있다. 바로 대북 어린이 인도지원 불사. 현 정부 들어 주춤하기는 하지만 지원 스님은 이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신발보내기, 통일자전거보내기, 통일염원 남북학생 미술 전시회, 평화통일염원 걷기대회는 지금도 펼치고 있다. 북 식량지원은 곧 ‘북 군사력 강화’라 보는 시선도 있는 상황에서 이 사업을 이어가기란 녹록치 않을 것이다.


“어른들이 저지른 업은 어른 몫 아닐까요? 그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 아이들은 산에서 따먹을 열매도 없습니다. 아프리카 아이 돕는 것은 당연하고, 북녘 동포 아이 돕는 건 반역인가요? 부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만일, 너에게 정당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정당하지 않거든 그 법은 빨리 끊어 버려야 한다. 그러한 법을 끊어 버리면 법도가 세워져 길이 평안 할 수 있느니라.’ 그 아이들을 방치하는 건 우리도 해가 되고 그들에게도 해가 되는 일입니다. 해가 된다는 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훗날 통일이 되었을 때 그들에게 얘기할 수 있는 게 있어야 합니다. 너희들이 배고플 때 우리는 도왔다고요.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스님은 ‘합천평화의 집’에 대한 관심 당부도 잊지 않는다. “원폭 2세대 사람들도 병들고 급기야 죽음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연구가 전무하다시피 하니 사람들이 잘 몰라요. 답답할 뿐입니다. 그들의 병은 누가 치유해 주어야 합니까?” 지원 스님은 관음 기도를 하며 발원한다. 이 세상 사람들이 ‘나눔’에 눈 떠 주기를 말이다.


“내 것을 나누어야 비워집니다. 내 것을 나누다 보면 온정이 싹트지요. 나를 비운 자리에 온정을 가득 채운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하겠습니까? 여기가 극락이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어머니가 자기 외아들을 목숨 걸고 지키듯이,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탐욕과 분노를 씻어 버리라는 뜻이다. 이기적인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한 법계에 살고 있는 이웃에게 자비와 지혜를 보이라는 말이다. 지원 스님이 ‘위드 아시아’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것이었다. 법정 스님 말씀 한마디가 스쳐간다.


‘평화의 적은 어리석고 옹졸해지기 쉬운 인간의 마음에 있다. 평화를 이루는 것도 지혜롭고 너그러운 인간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그래서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이기보다는 인간의 심성에서 유출되는 자비의 구현이다.’
지원 스님도 자비를 통한 평화를 ‘위드 아시아’와 시집에서 노래하고 있다. 스님의 시집이 애잔하게 들려오는 연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위드 아시아’와 함께 하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는 물론 전 세계에 평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리라. 지원 스님과 함께 길을 걸으며 자신을 비워 간다면 어느덧 가슴에 인류애가 싹틀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자비충만이다. 


채한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지원 스님

1966년 송광사 입산. 동국대 불교대학 선학과 졸업. 현재 문수사 주지이며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시집으로 ‘산문에 부는 바람’, ‘걸망도 내려놓고 마음도 내려놓고’, ‘이별 연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