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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에서 달을보다] 법주사 주지 노현 스님

淸潭 2012. 5. 8. 18:52
[천강에서 달을보다] 법주사 주지 노현 스님
 
하심하며 부지런히 살면 다툼없이 소통할 수 있어
 
2011.08.17 11:00 입력 발행호수 : 1108 호 / 발행일 : 2011-08-17

 

▲노현 스님

 

 

‘…아이로서 출가하여 귀와 눈이 총명하고 말과 뜻이 진실하며 세상일에 물 안 들고 밝은 행실 닦고 닦아 서리 같은 엄한 계율 털끝만도 어기리까….’


이산혜원 선사 발원문 중 한 구절이다. 동진출가(童眞出家)한 스님의 경우 장점은 세상일에 물 안든 것이리라. 물론 이산혜원 선사의 뜻을 좀 더 헤아린다면 ‘아이로서 출가’는 꼭 지금의 동진출가만을 뜻하진 않을 것이다. 출가한 사람은 모름지기 어린마음, 순진무구한 마음으로 출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당부’이리라. 그렇다 해도 어린 나이에 출가한 분들의 인연, 즉 불연은 매우 깊다고 봐야 한다. 전생에 수행승이었을 것이라 말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을 터. 노현 스님의 출가인연이 그렇다.

 

정암사 오른 후 마음 출렁
11세 나이에 법주사서 출가

 

대쪽 탄성 은사 성품 그대로
궂은 일 마다않고 직접 해결


정선에 살던 소년은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정암사에 올랐다. 순간, 마음 한 자락이 크게 출렁거렸다. 별다른 이유도 없었다. 누가 한마디 이른 것도 아니었다. 서너 번쯤 올랐을까?


‘나도 절에 살고 싶다!’
이후부터 5Km가 넘는 산길을 홀로 걸으며 정암사를 찾았다. 어느 날 한 스님이 물었다.
“자주 보는구나. 여기서 살고 싶으냐? 난 다른 절에 갈 건데 너도 가고 싶으냐?”
“예!”
“지금 갈 건데.”
“예!”
그 스님은 크게 웃었다. 스님은 “부모님 허락 없이는 안 된다”며 아이를 돌려보냈다.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부모님 모두 외출 중이었다. 어렸지만 한 생각이 떠올랐다.


‘절에 간다 하면 반대 하실 게 분명하다.’
절을 올렸다. 그의 발걸음은 이내 정암사에 이르렀다. 다시 그 스님을 만났다.
“허락 받았습니다.”
그 스님도 아이의 깊은 불연을 들여다보았던 것일까? 스님은 11세의 아이를 데리고 봉화 각화사로 향했다. 각화사와의 첫 인연이다. 얼마 있다 다시 법주사에 이르렀다. 아이는 큰 스님 앞에 앉았다.
“너는 절이 좋으냐?”
“예!”
“정말 절에서만 살겠느냐?”
“예!”
노현 스님과 은사 탄성 스님의 일대사 인연이 맺어졌다.


계룡산 신도안에 살던 14세의 한 소년은 어머니 손을 잡고 계룡산 신원사에 갔다. 우연히 거사들의 담소 한마디를 들었다.
“사흘 닦은 마음은 천년을 두고 보배요, 백 년 동안 탐한 물건 하루아침 티끌이라(삼일수심 천재보 백년탐물 일조진·三日修心 天載寶 百年貪物 一朝塵).”
‘초발심자경문’ 중 한 구절이다. 마음에 새겼다. 이유는 없었다. 그저 좋았을 뿐이다. 이 일언을 자꾸 새기다보니 한 생각이 스쳐갔다.


‘나도 절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
하지만 출가의 길을 걸을 수는 없었다. 당시엔 이미 부친이 타계한 후였다. 어머님과 형님만 남기고 출가하겠다는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던 것. 몇 해가 흘렀다. 소년의 집안과 내왕이 있던 스님이 갑사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절을 다녀왔다. 그리고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갑사 스님들이 사자암에 와서 올 삼동(三冬)을 나면서 글 배우라 합니다.”
이내 어머니도 아들의 불연을 깊이 들여다본 것이었을까?


“그래라!”
사자암으로 가며 읊조렸다. ‘삼일수심 천재보….’ 이 때 나이 21세. 동안거에서 행자노릇을 하고 새 봄에 머리를 깎았다. 수좌들 사이에서 ‘호랑이’라 정평 났던 스님이 은사였다. 탄성 스님과 금오 스님의 일대사 불연이 맺어진 것이다. 노현 스님 은사 탄성 스님은 1980년 10·27법난 당시 비상종단중흥회의 상임위원장을 맡아 종단 위기를 극복하고, 1994년에는 개혁회의 상임위원장 겸 총무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대쪽 기개’의 상징이다.

 

 

▲ 노현 스님은 현재 주지로 재직 중인 법주사에서 은사 탄성 스님과 일대사 불연을 맺었다.

 


굳이 구분한다면 노현 스님은 11세 때 마음이 동해 몸과 함께 곧바로 출가했다. 탄성 스님은 14세의 나이에 마음이 먼저 출가하고 몸은 10년 뒤에 출가했다. 몸이 먼저냐, 마음이 먼저냐는 중요치 않다. 두 스님 사이에 이산혜원 선사가 말한 “마음이 어려서…”가 관통하고 있음을 직시해 볼 필요가 있다. 순진무구의 출가심도 삼세인연에 반추해 보면 ‘도를 이루겠다’, ‘깨닫겠다’는 대원력 못지않다.


노현 스님은 출가 직후부터 전국의 선방을 돌며 수행에만 전념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노현 스님의 눈앞에 놓인 은산도 철벽이었다. 정진의 정진을 거듭하며 시절인연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각화사 주지를 맡게 됐다. 수좌가 이내 주지를 맡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을 아니었을 것이다. 더욱이 스스로도 ‘깨달으려면 아직도 멀었다’ 자책하고 있던 스님이었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복덕을 쌓겠다는 원력을 세웠습니다. 선방 수좌스님 봉양하고, 가람 일구어 가다 보면 모자란 덕도 조금씩 쌓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사실 노현 스님은 주지 재직 동안 금봉암(동암)과 태백선원 등의 크고 작은 불사를 진행하며 각화사 면모를 일신시켰다. 지금의 각화사가 있기까지 노현 스님의 공로가 지대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노현 스님의 진면목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주지 부임 직후 각화사에서 제일착으로 한 건 수행풍토 진작이었다. 하루 15시간 9개월 정진, 가행정진 선풍(禪風)을 일으킨 것이다.


“80여명이 입방 요청을 해 왔습니다. 선방 규모 상 20여명밖엔 수용할 수 없었지요. 선을 통해 정진하고자 하는 수좌들의 원력이 높은 줄 새삼 알게 됐습니다.”
낮엔 말 그대로 주지로서 사판의 일을 보고,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가부좌를 틀었다. 살림살이도 공개적으로 했다.
“절 살림이 정 어려우면 대중에게 통장 보여드렸습니다. 그러면 대중도 각자 알아서 하나씩 해결해 갑니다. 큰 불평불만이 나오지 않지요.”


각화사 주지를 내려놓자마자 이번엔 법주사 주지 소임을 맡았다. 교구본사이니 살림살이로 볼 때 각화사에 비할 바가 아니다. 법주사의 사회 기여도가 낮다는 점을 인식한 노현 스님은 의미 있는 불사를 펼쳤다. 매년 보은 군내 초중고 학생에게 일정액의 장학금을 주고, 다문화가정과 노인초청 행사를 갖고 있다. 아울러 보은 군내에 포교당을 마련해 불교대학도 운영하고 있다. 10년 전만해도 법주사 관광객이 150만이었지만 지금은 40만을 넘기 힘들다. 법주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로 인해 보은군도 침체기를 맞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스님은 지자체와 머리를 맞대고 있다.

 

저녁 되면 어김없이 가부좌
공개살림으로 대중과 소통

 

학생·다문화·어르신지원 앞장
나눔실천으로 불교이미지 제고


교구본사라 해도 운용방식은 예나 다름없다. ‘있으면 쓰고, 없으면 구하는 것’이다. 일 시켜서 상대가 하기 싫어하면 직접 소매 걷고 해치워 버리고 마는 성격이다.


“절이 난관에 봉착했다면 주지가 나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입니다. 하지만 공개적인 살림살이를 하지 않았다면 난관을 뚫기도 전에 불협화음이 날 가능성은 아주 많습니다. 주지를 믿지 못하는 관계로 이러저런 의혹이 불거지기 때문이지요. 이러면 원융살림을 하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단순명쾌하다. 공개살림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면 소소한 잡음은 있을지언정 큰 문제는 도출되지 않는다. 여기엔 분명 노현 스님만의 노하우가 있을 것이다. 소통을 한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내 말을 하기 전에 상대의 말을 들어주면 됩니다. 내 주장 펼치기 전에 상대 주장을 경청하면 됩니다. 소통의 시작이지요. 다만 세간 분들은 반대로 하려하니 소통이 어렵습니다.”
하심(下心)이다! 나를 낮추는 마음, 나를 내려놓는 마음이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실천하기란 너무도 어려운 하심이다.
“나라고 할 게 없지 않습니까? 어제의 나도 내가 아니요, 내일의 나도 내가 아닙니다. 그럼 오늘의 내가 진정한 나일까요? 찰나 순간에도 변하고 있는데? 이게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이지요.”

 

 

▲ 각화사 주지 재직 당시 노현 스님은 금봉암과 태백선원 등의 크고 작은 불사를 진행, 지금의 모습을 일궜다. 사진은 2005년 금봉암 불사 모습.

 


무상 속 무아를 말하고 있음이라. ‘나’도 나라 할 게 없는데 무엇을 잡을 것인가. 노현 스님은 자연스럽게 어렸을 때 보았던 탄성 스님의 일화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탄성 스님이 외출하고 돌아오면 꼭 하는 일 중 하나다.


“곧장 방으로 들어가시는 법이 없습니다. 대웅전에 들어가 삼배 올리시고는 경내 구석구석을 둘러보십니다. 자리 비운 사이 빗물에 땅이 파이지 않았는지, 바람에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았는지까지 보십니다.”
삼보를 지켜야 하는 주지의 소임에 빈틈이 없었단 얘기다. 어린 노현에게 가끔 화장실 청소를 시켰다고 한다. “지난번에도 제가 했는데 또요? 싫습니다”하면 탄성 스님은 ‘허허’ 웃고는 직접 청소에 나섰다고 한다.


“한 번은 한 신도분이 사과와 배를 갖고 오셨어요. ‘노현아 부처님께 올려라’ 하셔서 대웅전에 갔다 왔지요. 그런데 바로 다른 신도님이 오셔서 또 사과와 배를 가지고 오신 거예요. 신도분이 가시고 나니 또 ‘노현아 부처님께 올려라’ 하셔요. 철없던 저는 ‘같은 과일인데 또 올릴 필요 없지 않습니까?’ 했더니 아무 말 없이 바구니 들고 나가시는 겁니다. 어디 가시나 했더니 대웅전으로 가시더군요.”


불자들이 부처님께 올릴 공양물 하나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 노현 스님의 개성과 하심은 탄성 스님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던 것이다. 금오 스님의 일화가 스쳐 간다.
탄성 스님이 생전에 전했던 일화 한 토막. 어느 날 우체부가 배달한 소포를 받았다. 누군가 소포를 묶은 끈을 가위로 끊으려 했다. 그를 불러 금오 스님은 말씀하셨다.
“끊지 말고 풀어라. 그렇게 ‘툭’ 끊어버릇하면 마음도 그렇게 된다. 맺힌 것은 풀어라.”
금오 스님은 물건을 싸서 묶을 때도 꼭 고를 내어 풀기 쉽도록 했다고 한다. 탄성 스님은 이렇게 술회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누가 무엇이든 풀지 않고 끊는 것을 보면 마음이 참 안되었다. 나도 물건을 묶을 땐 풀기 쉽게 꼭 고를 내어 놓는다.”


끈을 끊지 않고 풀었던 호랑이 금오 스님, 남 하기 싫은 일 강요 않고 직접 소매 걷어붙인 대쪽 탄성 스님의 가르침을 온 몸으로 받아 들였던 노현 스님이었기에 누구보다 일찍 하심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심 없인 깨달음도 없다고 옛 선지식은 누누이 강조했음을 상기해 봄직하다.


노현 스님은 어떤 길을 갈까. 스님은 “공심을 갖고 하심하며 부지런히 살 뿐”이라고 한다. 스님은 오늘도 아무도 없는 저녁 무렵에는 방석 위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있을 것이다. 주지를 맡고 있다 해서 정진을 게을리 할 탄성의 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理)와 사(事), 누가 나누었는가. 정진의 한 길인 것을. 서산 대사의 시 한수가 떠오른다.


“눈길 걸을 때 함부로 걷지 말라(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내가 걷는 발자국 뒤에 오는 이 길잡이니(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채한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