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이것 저것

국기(國旗) 밟기

淸潭 2011. 6. 4. 20:11

 


2006년 여름 월드컵이 시작되자 브란덴부르크문에서 승리의 기둥까지 베를린 거리는 온통 독일 삼색기로 뒤덮였다. 젊은이들은 물론 할머니들까지 삼색 셔츠를 입었다. 전에 없던 풍경이었다. 신문들은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조심스레 제목을 달았다. 국기 논쟁이 벌어졌다. 나치의 집단 광기를 기억하는 지식인들에게 국기(國旗)는 민감했다. '이젠 애국심을 표현할 때가 됐다'는 목소리와 '집단적 애국심 표출은 위험하다'는 의견이 맞섰다.

▶미국 네브래스카 지방법원은 작년 7월 펠프스-로퍼라는 여인에게 단 하루만 성조기를 밟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자신의 '국기 밟기' 퍼포먼스를 검찰이 막자 사법부의 판단을 구했던 것이다. 판사는 "공공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한 표현의 자유를 규정한 수정 헌법 제1조는 존중돼야 한다"고 했다. 성조기 위를 걷고 난 후 펠프스-로퍼는 "당신들이 숭배하는 천 쪼가리는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고 했다.



▶작년 3월 남불(南佛) 니스의 한 사진 콘테스트에서 프랑스 국기로 밑을 닦는 사진이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부문에서 상을 탔다. 참전용사회와 시민들이 항의하자 주최 측은 상을 취소했다. 법무장관은 국기모독죄가 공공행사에만 적용된다는 기존 법규정을 민간 부문에도 확대 적용되도록 고쳤다. 알제리 출신 사진작가는 8개월 뒤 벌금·징역·교양교육을 선고받았다.

▶작년 1월엔 '미스 벨기에' 왕관을 쓴 실루 애니스가 한 잡지의 표지에 실렸다. 애니스는 바닥에 깔린 벨기에 국기를 밟고 서 있었다. 사진 속에는 플랑데르와 왈롱 지역의 분리를 주장하는 현직 정치인이 애니스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둘은 플랑데르 사람들이었다. 벨기에는 당장 끓어올랐다. "국기로 구두를 닦으면서 나라 전체를 대표하겠다고?" 애니스는 "단지 이 땅에 누가 살고 있는지 보여주려 했다"며 사과했다.

▶지난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도식 때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덕수궁 앞 분향소에서 태극기를 밟고 서 있는 사진이 논란이 됐다. 카펫처럼 깔려 있던 태극기 위에는 분향소 측이 마련한 추모비도 놓여 있었다. 국기모독죄를 물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지만, 어느 나라 국기든 그걸 밟고 올라서는 순간 조용하게 넘어갈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과거 정부 행사 때마다 태극기를 향해 경례를 해왔을 한 전 총리가 아닌가.

김광일 논설위원
2011.05.30 23:11 에 작성된 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