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 8. 29~1910. 8. 29
1910년 8월 30일 아침. 신문을 받아본 독자들은 뭔가 크게 달라진 것을 알아챘다. '대한매일신보'의 제호(題號)는 '매일신보'로, '황성신문'은 '한성신문'으로, '대한신문'은 '한양신문'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루 전인 8월 29일 공포된 한일병합조약은 신문의 얼굴인 제호를 빼앗아갔다.
대한매일신보에서 '대한'이 빠진 것은 국호인 '대한'이 금기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제호만 달라진 게 아니었다. 탑골공원 옆 베전(布廛)에서 매일 1만부 이상 발행하며 일제와 치열하게 싸우던 항일언론 대한매일신보는 총독부의 기관지 신세로 전락했다. 한말 민족지를 대표하던 황성신문은, '황성(皇城)'이 '황제의 성'을 뜻한다는 이유로 간판을 바꿔야 했다. 융희 황제(순종)는 창덕궁의 왕으로 격하되었고, '황성'은 일본 국왕이 있는 동경 이외에는 그 이름을 쓸 수 없었다. 이처럼 제호를 바꾼 한국어 신문들은 매일신보를 제외하고는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 문을 닫았다.
매일신보는 30일자 1면에 한일병합에 관한 순종의 조칙과 칙유를 머리에 실었다. "상호의 행복을 증진하고 동양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함이 선책이라고 확신한다"는 요지였다. 이어 일본 국왕의 조서와 조약 전문 순으로 1면을 채웠다. 나라가 망하는 모습은 이런 치욕의 지면으로 남았다.
- ▲ 영국의 화보잡지인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가 9월 17일자에서 당시 조선의 상황을 묘사한 모자이크식 그림.
한성신문이 된 황성신문은 30일자 1면에 '조선귀족령'을 실었다. 왕의 친인척을 비롯해 강제병합에 협력한 전·현직 고위 관리들에게 작위를 수여하는 법령이었다. 초야의 선비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망국 소식에 '새와 짐승이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린다. 무궁화 우리 강산이 망했구나'라는 절명시를 남긴 채 자결하였고, 의병장 등 많은 우국지사가 그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책임지는 왕족은 없었고, 친일 매국노들은 호사를 누렸다.
우리 신문이 일본의 억압에 신음할 때, 외국 언론은 조선의 식민지화를 자세히 보도하고, 일본의 야욕을 비판했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병합 한달 전인 7월 25일자에서 이미 "한국이 일본의 한 부분이 된다"는 동경발 기사를 내보냈다. 소련 신문 '노보에 브레미야(Novoe vremya)'는 8월 30일 "한국은 이제 미식가가 레몬즙을 뿌려 집어삼키려 하는 굴(oyster) 신세"라며 "(일본의 조선병합은) 뻔뻔스러운 역사적인 위선의 사례"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영국의 화보잡지인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는 9월 17일자에서 당시 조선의 상황을 묘사한 모자이크식 그림을 싣고, 총칼로 무장한 일본 군인과 순박한 조선 백성을 대비시켜 일본의 무력침략을 비꼬았다.
뉴욕타임스는 9월 1일 샌프란시스코 거주 한인 80명이 국민회 본부에 모여 "대한의 아들은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멕시코 하와이 중국 러시아 거주 한국인 1만명은 뭉쳐 싸울 것이다"라고 결의한 내용을 실었다. 국내의 울분과 국외의 애국운동이 민족의 힘으로 뭉쳐 폭발하는 데는 9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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