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실/역사의기록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 무인(武人) 정조대왕

淸潭 2009. 9. 4. 10:19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아온 정조의 모습은 거짓이다!

 

 

  <1989 제작 - 정조표준영정>            <선원보략 (璿源譜略)-정조의 모습>

 

정조의 실제 외모는 어땠을까?


정조는

평생에 어진을 세 번 그리게 했고

무인 군주의 강임함을 나타내고 싶었는지

모두 군복을 입고 그리게 했는데

모두 소실되고 전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보는 <정조표준영정>은

얌전한 학자군주의 이미지로
1989년 이길범 화백이 그린 상상도이다
.

 

구황실의 족보

<선원보략(璿源譜略)>담겨있는

정조의 어진을 보면
그의 실제 얼굴은

우리가 이제껏 교과서에서 보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문예군주보다는

늠름하고 활달한 무사의 기상이 뿜어져 나오는데 
'네모난 입과 격진 턱'으로 기록한

순조실록과 일치한다.

 

 

2. 어린 시절, 공포와 절망의 기록 『존현각 일기(尊賢閣日記)

 

"나는 일찍 아비를 여의고 죽었어야 하나 죽지 않은 사람."
-존현각일기 中-

 

   <정조가 12세 때 쓴 친필 - "선을 지키고 악을 막는 게 공경이다.">

 

정조는

12살에 

당파싸움의 희생양으로

뒤주에 갇혀 8일만에 죽는 아버지를 지켜봤다. 

 

"떡을 먹고 싶으냐, 떡을 줄까, 술을 먹고 싶으냐, 술을 주랴..."

뒤주를 지키던 포도대장 구선복과 군졸들조차 사도세자를 조롱하고 모욕줬다.

 

12세 정조가 쓴 글씨.

'진선폐사위지경(陳善閉邪謂之敬)'

'왕에게 좋은 것을 권하고 나쁜 것을 막는 게 공경이다'.

 

신하들의 도리,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신하들에게

공경과 도리를 모르는 신하들의 잘못된 점을 비판한 듯 싶다.

 

세손 시절.

아버지 사도세자를 잃은 세손 정조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이 권세를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

늘 위협과 공포에 시달려야만 했다.

 

경희궁에 거처한 어린 정조의 절박한 심정이

<존현각 일기(尊賢閣日記)>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 일기 속에는 노론에게 당한 노골적인 협박,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으로 인해 옷을 벗고 잠들지 못하는 불안함,

그리고 궁녀와 내시까지도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절박함이 드러나 있다.
왕위에 오르기 전, 그는 노론대신들의 "손안의 물건"에 불과했던 것이다.

 

"내가 이렇게 일기를 쓰는 것은

지금 당하는 핍박을 후세에 전하여 알게 하기 위해서다."

 

"신하들이 허리를 굽히지 않고 신발 끄는 소리를 탁탁 냈다."

 

"흉도들이 심복을 널리 심어놓아 밤낮으로 엿보고 위협할 거리로 삼았다.

두렵고 불안하여 차라리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낮에는 마음을 졸이고

밤에는 방 안을 맴돌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두렵고

달걀을 포개 놓은 것처럼 위태롭다."

                                                                     - <존현각 일기(記)>

 


 

3. 정조 즉위.

- "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 

 

1775년. 향년 82세(영조 51년) 영조는

세손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고자 하나

신하들은 세손 정조가 보는 앞에서

사관의 기록을 막으며 거부한다.

중대한 왕명조차 거부 당하는 냉엄한 현실이었다.

 

홍인한 등 노론 신하들은 세조 정조를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그들은 기득권을 놓지 않고 싶었을 것이고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이 되었을 경우

닥쳐올 보복이 두려웠을 것이다.

 

"동궁은 노론이니 소론이니 알 필요가 없습니다.

이조판서니 병조판서니 알 필요가 없습니다.

동궁은 조정의 일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 '삼불필지설(三不必知設)'

 

1776년. 온갖 고초와 위협끝에 드디어 정조가 즉위한다.

그리고 한 맺힌 한마디를 쏟아낸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寡人, 思悼世子之子也)"

 

그러나 조정은 노론 세상이었고

고위 관직과 병권까지 모두 노론이 쥐고 있었다.

 

"구선복으로 말하면 손으로 찢어 죽이고

그 살점을 씹어 먹는 것도 부족할 것이다.

경연에 오를 적마다 심장과 뼈가 떨리고 얼굴을 대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가 병권을 쥐고 있어 어찌할 수 없었다." 

                                                             - <정조실록> 

 

성리학 통치 이념.

조선은 이미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신하의 나라, 노론의 나라였다.

그들은 왕을 왕으로 여기지 않았다.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 (罪人之子不爲君王)'

 

1777년 정조 즉위 1년.

세차례나 궁궐에 자객이 침입한다.

7월 28일에는 자객이 왕의 침소까지 침입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났다.

 

사관도 호위무사도 환관도 모두 물러난 한밤중에

정조는 밤늦게까지 혼자 책을 읽다가 지붕에 인기척을 알아채고 자신의 목숨을 구하게 된 것이었다.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둘러싼 갈등은 계속 되고 있었다.

배후에 호위군관 강용휘와 천민 출신의 장사 전흥문,

그리고 노론 강경파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정조를 살해하려는 무당을 통한 주술 사건과

정조 살해후 은전군 추대 시도 등

심지어 환관과 궁녀조차 노론 강경파와 더불어 정조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더우기 그 배후에는 정조 치세 내내 강력한 반대 노력으로

노론과 손잡은 정순왕후(영조의 두번째 정비, 정조의 할머니)와

그 오빠 김귀주와 그 아버지 김한구가 있었다.

김한구는 이미 사도세자의 죽음에도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다. 

    

 

 4. 신하의 나라'에 선 왕. 정조의 정치적 승부수 "武(무예)"

- 신기에 가까운 활쏘기 실력, 신궁(神弓) 정조에 관한 진실.

 

정조 8년.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추존하며 무과를 실시한다.

신분과 집안에 상관없이 오직 실력으로 뽑은 30명의 무사.

이때 백동수(1743~1816)라는 '딴세상을 노니는 듯한' 타고난 무인을 발탁한다.

 

그의 치세에 무과가 37번 시행되는데

정조는 무예가 출중한 무사들을 직접 선발해

한.중.일 삼국의 무예를 모은 당대 최고의 무예인

'십팔기(十八技)'를 수련시키고

무사 개개인의 무사실력을 일일이 확인하며 아주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무예십팔기(武藝十八技)에

마상무예 6기를 더해

'24기예'를 완성케 하고

이를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기록하여 많은 병사들에게 나눠주게 한다.

 

스스로 조선의 군권을 장악한 정조.

그리하여 정조 18년.

장용영(),

정조의 친위부대가 만들어진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정조는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무사(武士)였다.
특히 정조의 활쏘기 실력은 '신궁(神弓)'이라 불릴 정도로

조선에서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한다.

 

<어사고풍첩(御射古風帖)>에는

정조의 활쏘기 연습이 기록되어 있는데 

정조는 50발 중 49발을 명중시키고

마지막 한 발을 맞추지 않는 관례에 비추어보면

만점에 이르는 놀라운 실력이었다.

 

"사격거리 145m에 50발을 거의 매일 다 명중 시켰고,

더 정교한 과녁으로 부채(小扁)나 곤봉, 편곤(片棍)을 이용했다."

 

 "작은 부채를 매달아 5발 쏘아 4발을 맞추고, 곤봉 10발을 모두 맞추었다"

                                                                      - <정조실록 (1792년) >

 

"작은 가죽 과녁에 1순을 쏘아 5발을 맞혀 7점을 얻고…
마치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 < 어사고풍첩 中 >
 

정조는 나아가 문신들에게도 활을 쏘게 하여 문무를 갖추게 했다.

 

"규장각 문신까지 활을 쏘게 하며

문장을 아름답게 꾸미면서

활을 쏠 줄 모르는 것은 문무를 갖춘 재목이 아니다."  

                                                - 정약용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4. 정조의 무력시위, 화성행차. 그리고 의문의 죽음...

 

정조는 집권 중기로 접어들며

군권을 바탕으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며

신하들 꾸짖과 회유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두려운 마음을 갖도록 하라(自令必思--然改--)"

 

정조 13년 7월.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수원 현륭원으로 이장하며

정조는 아버지에 대한 애끓는 마음을 숨기지 않게 된다.

 

"잔디와 흙을 움켜쥐고 울며 손톱이 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 <정조실록 1794년>

 

심환지, 김종수, 이병모 등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노론 대신들의 두려움은 커지게 된다.

 

당시 노론 세력은

북촌을 중심으로

정치 권력은 물론

삼군부(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종로 일대 시전상인과도 결탁해

경제권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특정 세력이 이익을 독점하고 백성을 곤궁케 하다"

                                                    - 체제공 상소중에서(정조15년)

 

정조 15년(1791년).

그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이라는 경제 개혁을 단행하여 

육의전 이외의 시전(市廛)에 대한 전매 특권을 폐지하고

각종 상품에 대한 사상인(私商人)의 자유로운 매매를 인정하여

노론들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킨다.

 

"내가 깊은 뜻이 있다.(정조15년 1791)"

 

정조18년.

그는 수원 화성 계획을 발표하여

대규모 행궁과

외곽 6km의 성곽을 쌓아

수원을 제 2의 군사 방어 및 상업도시로 발전시킨다.

그리고 6천명의 장용외영을 배치한다.

 

"성을 쌓는 것은 억만 년 유구한 대계로 먼 장래를 생각하는 방책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정조 19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내세워

화성 행차를 하는데

문무 6천명을 대동하고

정조 자신 황금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행차한다.

                                                                 - <시흥행차도>

정조는

화성 서장대에서 친히 훈련을 진두 지휘한다.

                                                                - <일성록> 

또한 수천 명을 동원하여

야간 훈련을 직접 진두 지휘하며

장용영의 위용을

노론 대신들이 지켜보게 한다.

                                                              - <연거도>

 

"백성이 원하는 정치를 위해 이제 거침없이 진입할 것이다."

                                                              - <정조실록 (정조19년)>

 

여전히 노론 세력이 우세한 서울을 떠나

화성에서 새로운 조선을 일으키고 싶었던 정조.

이는 노론을 향한 무력시위였다.


노론신하들은 정조의 행보에 치를 떨며

도끼를 찍고 혈서까지 써내는 등

극한 반발을 한다.

 

"임금이 거만하게 스스로를 성인으로 여기며 신하들을 깔보고 있다"

                                                                   - <정조 14년(1794)>

 

"신들은 죽으면 죽었지 감히 그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臣等有死而不敢奉承矣)                          - <정조 23년(1799)>

 

정조 24년.

1800년 5월 30일.

정조는 드디어 대신들을 향해 말한다.

이른바 '오회연교(五晦筵敎)'였다.

 

"오늘 연회는 참다 참다 하교하는 것이다.

아버지 사도세자 죽음과 관련된 신하들은 용서를 구하라."

                       

정조의 개혁 정치에 반대하는 노론을 척결하겠다는 선언이였다.

그러나 신하들의 태도는 냉담했다.

 

정조와 노론의 대립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6월 28일.

정조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오회연교를 내린 지 채 한달도 되지 않은때였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의 죽음.

정조가 꿈꾼 새로운 세상은 사라져버렸다.

 

 

5. 조선의 마지막 개혁군주 정조! -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국왕을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는 당쟁이 없는 세상.

노비제 혁파, 서얼 차별 폐지 등 신분차별이 없는 세상.

군사와 상업 도시로서의 제 2의 신도시 수원 화성 건설.

 

정조의 호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에서 보여주듯이

그는 '모든 하천을 비추는 달빛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깨끗한 달빛이 환하게 비추니

비록 구름(신하들)이 그 빛을 가리더라도 삽시간에 불과하다

신민과 백성이 동포라는 의식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좋은 나라다."

 

"불쌍한 저 고할 데 없는 백성들이

가슴에 깊은 원한을 품고

분주히 와서 호소하는 것이니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하소연하는 것과 같다.

저들은 실로 죄가 없다.

그렇게 만든 자들이 죄인이다." 

 

모든 백성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러나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은 

이후 조선은 63년간 세도정치의 암흑기를 겪는다.

선택받지 못한 역사.

 

정조의 죽음은

조선이 근대 사회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했다.

 

"상께서 승하하던 날 삼각산이 울고

고을에서 벼가 하얗게 죽어 버렸다."

                                                    - <정조실록, 1800. 6. 28>

 

 

                                                                 - 한국사전을 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