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실/역사의기록

14세 소년이 격은 한국전쟁(1~12회)

淸潭 2009. 8. 18. 09:42

14세 소년이 격은 한국전쟁(1~12회)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꼭 읽히고 싶은 글입니다.

글을 끝내며


1950년6월25일 한국전쟁 발발/ 인민군 서울 입성/ 9.28 서울 수복/ 국군 압록강까지 북진/ 중공군의 참전/ 1951년 1.4후퇴/ 까지 격은 체험담을 기록해 보았다. 반세기를 훌쩍 넘는 시간을 기억해 내고 기록하는 것이 무모한 일이기도 했지만, 한국전쟁을 체험하고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가 점차 사라져가고 있고, 과문한 탓이겠지만, 개인의 체험기록이 흔치않아 한국전쟁의 편린(片鱗)이라도 다음 세대에게 알리고 싶었고...


세상을 먼저 뜬 막내 동생에게서 받은 충격으로 함께 고생했던 체험담을 지체할 수 없었다. 지난해 12월부터 글을 쓰는 동안 기억속이 몇 번이고 하얗게 멈추면 되살리면서 기억력의 한계에 수 없이 머물기도 했다. 일제치하에서 태어나 2차 세계대전을 맞았고 해방 후 혼란기를 거처 6.25 한국전쟁을 겪었으니 태어난 시대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는 세대지만, 죽음의 두려움! 배고픔과 추위 속에서 살아남은 그때 아이들이 잊혀가는 한국전쟁의 작은 단면의 실상이라도 전후세대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8.15 해방 후 한국전쟁을 거처 오늘이 있기까지 우리나라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옮겨지고 오늘의 첨단산업사회로의 진입까지 오랜 동안 앞선 세대들이 겪은 전쟁의 고통뿐만이 아니라 오늘의 요만한 풍요는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그들이 겪어 온 인고(忍苦)의 일생을 거치며 얻어진 것이라고 적어도 깨어있는 젊은 세대에게 만이라도 알리고 싶었다. 앞으로 전개될 이 땅에 정의롭고 공평하고 평화로운 사회와 역사를 위해서라도. 


2차 세계대전 후 미소(美蘇)의 첨예한 냉전 속에서 소련은 해양을 향하는 부동항(不凍港)을 탐했으며, 역사적으로 해양세력에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던 소련은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 된다면 유사시 해양세력이 거처야 할 한반도가 소련의 방어벽 역할을 할 것으로 우려했다. 북한에 군사원조를 하며 전쟁을 부추겼던 배경은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 발발 시 미국은 3차 대전으로의 확전을 원치 않았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했다고 한다.


한편 1949년 미국은 태평양 방어선을 알류샨 열도, 일본의 오키나와와 필리핀으로 후퇴하는 “에치슨 라인”을 선언하고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해 버림으로서 남북한 간에 첨예하게 대치하던 군사력의 균형을 깨고야 말았다. 다음의 <참고>는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한반도에서 미국의 입장과 일정이다.


<참고>
*1949.5.07 투르만 미 대통령이 한국에서의 미군철수 발표
*1949.6.21 주한 미군철수 개시
*1950.1.10 미군의 태평양 방어선 후퇴(에치슨 라인)
*1950.5.18 미 국무성 고문 덜레스(이후 미 국무장관) 3.8선 방문 후 기자회견
           “한국에서 전쟁은 없다”
*1950.6.23(금) 주한 미 고문단장 윌리암 로보츠 기자회견
               “한국에서는 탱크전이란 없다“
*1950.6.24(토) 한국군은 2주간의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전방병력의 2/3를 “농번기 돕기 특별휴가”, 같은 날 연대장급 이상 육군회관 개관 행사에 참석 양주를 곁들인 댄스파티를 벌임.
*1950.6.25(일) 새벽 인민군 남침 개시


<사진 - 1950.5.18 3.8선을 방문한 덜레스 미 국무성 고문(이후 미 국무장관) 우측이 신성모 국방장관>


전쟁 일보직전의 3.8선의 상황을 알고 앞날을 훤히 내다보면서도 낙관으로 바라 본 미군의 한반도에서의 철수는 오판인가? 의도적인가? 미군이 철수한 후 군사력의 불균형한 공간은 북한과 소련에게는 놓칠 수 없는 남침의 기회이자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의 멍청한 오판이 아니었다면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한 것인가? 2차 대전 후 불경기 속에 미국의 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의 전쟁상인들에게는 ‘굿뉴스’가 아닐 수 없었겠다.   
 

북한은 남침이라는 원죄로 유엔 16개국 한국전 참전결의는 충분한 명분이야 분명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 불과 한 달 여 만에 부산 근방을 제외한 전 국토를 장악한 인민군을 퇴치할 힘이 없었던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 속의 한국으로서는 16개국 유엔군 참전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다른 한편 2차 세계대전 마무리로 오키나와와 히로시마에 원폭 두 방을 얻어맞은 후 연합군에 무조건항복(無條件降伏)하고 경제적으로 피폐해진 전범국(戰犯國) 일본이 불과 5년 만에 한국전쟁에 군수물자를 팔아 특수경기를 누렸으니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한국전쟁은 외교력도 자위력도 경제력도 없이 국제정세에 어둡던 약소국(弱小國) 한국의 불행이었다. 한국전쟁은 전쟁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3년)동안 가장 많은 인명살상(300만명+)을 안긴 가장 치열했던 싸움이었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는지? 지금도 약소국들은 그들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용되거나 대리전쟁에 희생되고 있다.


한반도라는 좁은 땅에서만 본다면 소련의 군사원조로 군사력을 키운 북한의 남침(南侵)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당시 미소(美蘇)의 냉전 속 기류를 냉정하게 본다면 한국전쟁은 미소(美蘇)가 자국의 이해(利害)에 암묵(暗默)으로 계산된 시차(時差)를 둔 전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부 전후세대의 북침이라는 주장은 전쟁을 체험한 세대에겐 설득력이 없다. 한국전쟁 발발 시점에서 어느 쪽이 먼저 침략을 시작했느냐 로 볼 수밖에 없다면. 


한국전쟁 60년이 지난 지금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계속 머물 것이냐? 아니면 또 다른 어떤 구실로도 전쟁을 거처 분단 문제를 해결 할 것인가? 어느 쪽이든 더 이상 불장난을 해서는 안 된다. 한국전쟁에서 받은 아픈 상처로 적개심(敵愾心)을 품은 시각으로 남북문제를 풀려는 원한(怨恨)의 틀로는 또 다른 비극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대륙과 해양의 교량역인 작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입지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지혜롭게 대처한다면 한반도가 평화와 번영과 기회의 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위의 몇 줄만을 뽑아 이 글을 왜곡(歪曲)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전쟁 중 주한미군사령관 벤프리트 장군의 아들 벤프리트 2세 '지미'는 공군조정사로서 출격 중 북한상공에서 대공 포화에 희생되었고, 중공주석 毛澤東의 장남 모안영(毛岸英)도 북한에서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왜 이 이야기를 꺼낼까? 북진통일과 애국을 외치던 지도층의 자식들은 전쟁 중에 군 기피뿐만이 아니라 해외유학까지 보냈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우리나라 지도층의 실상이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남쪽으로 먼저 달아나며 녹음방송으로 "서울을 끝까지 사수하겠노라"고 서울시민들을 속이는 허위방송을 보내고, 1950년6월28일 사전 예고도 없이 한강다리를 폭파한 리승만 정부는 9.28 서울수복 후 피난 못한 정적(政敵?)들에게 도강파(渡江派) 비도강파(非渡江派)로 분류 매도했으며, 서울 수복 후 "서울시민들에게 사과 하시지요!"하는 측근의 진언(進言)을 끝내 외면한 지도자가 대통령직을 13년 동안 계속 유지했던 나라였다. 다만 국부(國父)로 자처했던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리승만의 역사적 평가는 여러분의 몫으로 남긴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선 위기에서 나라를 지키겠다며 엄동설한에 50만 명의 청장년들을 집단 남하시키면서 먹고 입고 덮고 할, 피 같이 귀한 예산을 착복해 얼어 죽고 굶어 죽인 소위 "국민방위군 사건" 등 한심한 사건이 일어났고, 힘없고 배경 없고 가난한 민초들이 전선에서 칼바람 맞으며 언 주먹밥을 녹여 먹으면서 싸우며 다치며 죽어갈 때 후방에서의 지도층의 위선(僞善)을 알리며 역사 앞에 고하지 않을 수 없다. 60년 후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나?


길게 본다면 전쟁은 영원히 승자도 패자도 없는 싸움이며, 인간 생명의 경시에서 오는 야만의 극치이고, 인간이기를 포기한 탐욕의 끝이 전쟁이다.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로서 개인의 체험담을 위주로 한 것은 개인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전쟁 속에서 개개인이 겪어야 하는 생사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피폐를 다시는 한반도 뿐 아니라 지구촌 어디에서도 재발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강한 메시지를 드리고 싶다.

글을 마치면서 피아(彼我)를 넘어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모든 사람들에게 정중한 진혼(鎭魂)의 뜻을 드립니다. 이 글 속에서 잘못 기록되었거나 그리고 부족한 부분은 읽어 주신 분들께서 많은 의견으로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 <14세 소년이 격은 한국전쟁>을 읽어주시고 따듯한 격려를 보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2009년 3월 민병설

<사진 - 1953년 7월 27일 하오 10시 정각부터 12분간에 걸쳐 조인된 정전협정문의 서명 - 이 휴전 협정문 서명에 한국군은 빠졌을 뿐만이 아니라, 참석자의 자리에도 못 끼였고, [국제연합군]이 [국제‘련’합군]으로 북한식 표기였으니 당시 한국전쟁 당사자여야 할 한국군은 제3자였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는군요.>

<사진 - B29 중폭격기가 폭격중인 평양. 1952년 8월>


<사진 - 1950년 9월, 전란으로 불타버린 보신각과 그을린 보신각종>



<사진 -
한국전쟁 중의 崇禮門(1951년 3월) 숭례문의 훼손은 언제나 국민들의 아픔과 함께했다>


<사진 - 2008년 숭례문(남대문) 화재가 국운(國運)과 무관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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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개차(無蓋車)에 올라타다


고마우신 천안 아주머니 댁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몇 번이고 "고맙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느긋한 마음으로 천안역으로 향했다. 천안역은 피난민과 군인들로 가득 차 시끄럽고 무질서했다. 오랜만에 본 활기찬 세상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역사(驛舍)를 비집고 들어가 남행열차를 찾아갔다. 일반 객차는 보이지도 않고 화물칸만 있었다. 그나마 전부가 콩나물시루처럼 피난민들로 가득 차, 더 이상 끼어들 틈이 없었다. 새벽부터 모여들었나 보다. 화물칸이 부러웠지만 뒤끝에 매달린 지붕도 없는 석탄 실은 무개차만이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눈밭을 걷는 것 보다야 낫지 않은가!


서울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만 살던 나는 방학 때 시골집을 기차를 타고 다녀 온 친구들의 얘기를 부러워했다. 기차를 탄다는 것은 내게는 멋진 낭만이었고 부러움이기도 했다. 48년  경인가 기차를 타고 개성으로 수학여행을 갔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개성하면 선죽교(善竹橋)나 송악산(松嶽山)을 떠 올리지만 기차를 타고 멀리 다녀온다는 것이 내게는 밤잠을 설치는 설렘이고 큰 사건이었다. 하지만 오늘 피난길에서 만난 지붕도 없는 무개차 가차여행은 즐거움도 꿈도 낭만도 없는 가혹한 여행이지만 포탄이 떨어지는 전선을 피해 살수 있다는 희망에 고마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들이 오르려하자 기차가 서서히 움직인다. 위험한 줄도 모르고 우선 등짐을 석탄차 위에 던져놓고 겁도 없이 움직이는 기차를 화차와 화차 사이 살얼음이 덮인 이음새에 발을 디디며 한사람씩 올라탔다. 육중한 쇠바퀴에 밟힐 수도 있는 위험한 짓을 철없는 아이들은 이 기차를 놓칠 수 없다는 조급함으로 겁 없이 매달리며 올라탔다. 우리들이 올라탄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석탄을 실은 무개차에 계속 기어올랐다. 이 기차가 조금 가더니 화물칸을 잊고 있었다. 차표를 끊고 탄 것도 아니어서 언제 떠나느냐? 물을 수도 없었지만 혹 내리라고 할까봐 조금은 걱정되기도 했다.


어느새 석탄 위에 빈틈없이 피난민들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석탄바닥에 마분지(馬糞紙) 쪼가리를 서로 깔아주었다. 추위를 이기려고 서로가 몸을 바짝 대고 앉아서 지고 온 이불로 온몸을 덮었다. 한참을 지나도 기차는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기차를 타고 있다는 안도감은 잠깐뿐이고 발끝부터 얼어 올라오며 온몸을 마비시킬 듯 덮쳐오는 추위 속에서 허기와 졸음이 함께 밀려온다. 추위와 허기와 졸음 중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잠을 자는 것뿐이었다.


자정이 지나서였나보다. 누군가가 큰 상자를 들고 와서
"배들 고프지? 이거 미제 ‘쇼빵’인데 내가 말이거든... 저기 미군들 기차 칸에서 뚜럭 쳐 왔거든... 나눠들 먹어!"
시원스럽게 말하는 품이 북한에서 온 피난민 같았다. 이 고마운 아저씨는 옆 석탄 칸에서 함께 피난하는 의리 있는 분이셨다. 미제 쇼빵을 듬성듬성 잘라서 석탄 칸 사람들이 허겁지겁 나눠먹었다. 차갑게 느꼈지만 부드러운 빵 속살이 입안에서 녹았고 허기진 속을 달래기엔 충분했다. 당시에는 어느 나라 말인지는 몰라도 식빵을 쇼빵이라 했다.
 

새벽녘인가? 속을 채우고 졸음이 쏟아질 때 쯤 화물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이 기차가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 기차가 경부선임에는 틀림없었다. 이름 모를 역에 섰다가 떠나곤 했는데 서는 곳마다 북으로 향하는 화차에는 트럭이며 야포 탱크들이 실려 있었다. 다시 북진을 하고 있구나! 짐작했다. 석탄화물차에 무작정 올라탄 사람들은 당장 닥쳐오는 추위에 동사(冬死)를 걱정해야 했다. 하지만 추위만이 무서운 줄 알았던 우리 앞에 예상치 못한 또 다른 무서운 복병(伏兵)이 있었으니 가끔씩 닥쳐오는 굴속(터널)이었다.


기차 화통에서 뿜어대는 지독한 유연탄 냄새와 시꺼먼 끄름은 몇 번을 통과해야하는 터널 속에서 우리들을 질식직전까지 몰아넣었다. 시커먼 유연탄의 연기와 매캐한 냄새가 저승사자처럼 까맣게 우리를 덮쳐왔다. 그래도 걷는 것 보다야 나았을까? 석탄화물차에 실린 사람들은 한겨울에 온몸으로 달려드는 칼바람에 동사(冬死)를 걱정하며 서로가 생사(生死)를 확인하는 말을 건네면서 난로대신 따뜻한 인정을 주고받았다. 석탄 화물칸에 올라탄 수백 명은 며칠 동안 한 가족처럼 생사를 함께했다.




  
마지막 조찬(朝餐)


달리며 서면서 이틀은 걸렸나보다. 제복을 입은 철도국 직원들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모두들 기차에서 내리란다. "모두들 내리세요! 다 왔습니다! 여기가 종착역 서대전(西大田)입니다" 
짐을 챙기며 내리려 하는데 다리가 펴지지 않아 다리를 주무르며 겨우 일어나 움직이는데 화차 이음새를 딛고 뛰어내리니 날카롭게 찌르는 통증이 다리에서 온몸으로 퍼진다. 온 세상이 시끌벅적하다. 천안역보다 더 번잡하고 활기가 넘쳐보였다. 여기가 대전인데 서대전역이라 했다.


군인 새댁이 남의 집 부엌을 빌려 아침상을 차렸다. 몇 가지 찬도 준비하셨다. 천안 아주머니의 밥상을 받은 지 이틀만인가. 몸이 얼고 허기진 속에 모두가 먹는데 정신이 팔렸지만  새댁들은 권하기만 하고 드시는 게 별로다. 두 새댁은 숭늉까지 챙겨주신 후 결심한 듯
"그동안 고생 많았다. 이렇게 살아왔으니... 서로 의지하고 함께 와주어서 고맙다. 살아서 부모님들을 다시 만나서 잘들 살아라! 여기 안전한 대전까지 왔으니 너희들끼리 친척들을 찾아갈 수 있겠지? 부산이고 대구고... 여기서 우리 헤어지자!" 아이들이 예상했던 말이었다.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새댁들의 알리고 싶지 않은 부끄럽고 아픈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동안 신세도 많이 졌습니다. 너무 고마웠습니다. 저희들끼리 찾아갈 수 있습니다. 안녕히 들 가세요!" 달리 위로해 드릴 말을 찾지 못했다. 눈이 많이 내리던 날 두 놈의 양키 놈만 아니었어도 군인 새댁들과 함께 더 갈수가 있었는데 이곳 대전에서 헤어 질수 밖에 없는 새댁들의 아픈 비밀을 가슴 깊이 묻어두어야겠다고 다짐 했다. 마음이 아팠다. 누가 두 새댁에게 돌을 던질 수가 있으랴? 우리들은 서대전에서 이렇게 마지막 조찬(?)을 들고 군인새댁들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갈림길에서


우리 일행은 5명으로 줄었다. 대포소리도 들리지 않는 서대전에서 포탄의 위협은 없었지만  앞으로의 대책이 막연했다. 누가 우리들을 반갑게 받아줄까? 소식 없이 먼저 떠난 몇몇 친척들은 모두가 대구나 부산으로 떠났으니 우리가 찾아가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생판 모르는 남들을 찾아갈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호남 쪽은 전혀 연고가 없었다. 그 후 들은 얘기지만 호남 쪽으로 피난 간 사람들은 대구나 부산으로 간 사람들보다는 후한 인심에 편히 지내고 와서 고마웠다고 했다. 사람들이 많으면 인심은 각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들의 짧은 회의는 쉽게 결론이 났다. “대구 부산 쪽으로 가자!” 우리들은 호남과 영남의 갈림길로 찾아갔다. 수천 명의 피난민들이 영남 쪽으로 가려고 몰려있는데 헌병들이 영남 쪽으로 가는 왼쪽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대구나 부산 쪽은 피난민들이 몰려서 먹을 것도 귀하고 잠잘 곳도 없으니 피난민 여러분께서는 호남 쪽으로 가십시오!" 헌병들은 영남 쪽으로 가려는 피난민들을 향해 계속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사정을 하며 “부산에 먼저 간 가족들이 있으니 보내 달라”느니 하면서 막무가내로 밀고 가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진 - 1.4후퇴 당시 국민방위군으로 동원된 청장년들>

몇몇 피난민들이 대구나 부산으로 가는 왼쪽 길로 들어서면 헌병들이 제지하며 밀고 밀리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우리들은 헌병들과 우격다짐으로 이곳을 통과한다는 것은 어려운 줄 쉽게 알아차렸다. 분위기를 살피고 있는데 사복이나 허술한 군복을 입은 장정들이 총을 멘 몇몇 군인들의 지휘를 받으며 행진해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때다 싶어 헌병들의 눈을 피해 동생들과 조카들을 그 허술한 청장년들 사이에 한사람씩 끼워 넣고 무사히 왼쪽 길로 우리들은 하나씩 하나씩 모두 통과했다. 


우리들의 행동을 눈치 채고 감싸주며 행군을 한 아저씨들이 고마웠다. 이 허술한 장정 아저씨들이 바로 1.4후퇴 당시 50만 명의 청장년을 남쪽으로 후송하여 입대를 시키려했던 국민방위군으로 끌려가는 청장년 들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막중한 임무를 띤 방위군 지도층의 예산 착복으로 식량과 침구도 지급을 안 해서 5만~9만 명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고 영양실조에 걸렸다는 "국민방위군사건"으로 희생된 장정들의 일부인 것이다. 후에 알았지만.


이들 중 일부(35세~60세) 고령자들은 51년부터 종전 때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산악지역에서 등에 지게를 지고 탄약과 식량은 물론 사상자들을 날랐고 도로보수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산악지대가 많은 한국지형에서 벌어지는 전쟁터에서 지개만큼 고지대로 운반 할 수가 있는 간단한 운반도구는 아마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지개밖에 없었다고 했다. 


군번도 없는 용사 "지게부대"는 KSC(Korean Service Co.)라고 불렀고 험한 산악지대로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지개에 감탄한 미군들은 이 지개를 영어로 A-Frame이라고 외지(外紙)에 소개하기도 했다. 힘없고 빽 없는 지개부대 대원들의 봉사와 희생을 그 후에 어떻게 보상되었는지는 몰라도 우리들은 그들을 기억해야 하고, 그 분들에게 한없는 동정과 위로를 보낸다. 힘없는 사회적인 약자들은 언제나 그렇게 고통 받으며 희생되었다. 


<사진 - 1951.5.20 전선에 배치 될 지게부대>



기적(奇蹟)


영호남 갈림 길에서 지혜롭게 빠져나와 대전역을 찾아 간 우리들은 용산 철도국에 근무하시는 외삼촌을 운 좋게 만났다. 반갑게 맞아 주시는 외삼촌이 너무 고마웠다. 우리보다 먼저 피난을 떠난 외삼촌 가족들은 모두 곳간차(庫間車)에 타고 있었다. 외삼촌댁 가족뿐이 아니라 이웃에 피난 못간 어려운 동내사람들을 모두 이 곳간차에 함께 태우고 오신 외삼촌은 인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효자로도 널리 알려 진 분으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외조부의 묘소(墓所)를 매일같이 상복(喪服)을 입고 3년 탈상(脫喪) 때 까지 성묘를 하신 분이셨지요. 외삼촌께서는 시체발부는 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시어, 이발도 안 하시고 다니셔서 용산철도국에서는 전설적인 털보직원으로 알려졌고, 전쟁 중에 산에서 숨다가 내려 온 간첩으로 몰려 군경(軍警)들의 검문에 여러 번을 곤욕을 당하시기도 하셨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분은 생활이 검소하셔서 당시에는 염색한 군복만 입으시고 신는 싸구려 지까다비(日語-地下足袋)만을 신고 다니셨으니 산에서 내려 온 간첩으로 오인하기가 십상이었다.


늦게 출발한 우리들이 대전역에서 외삼촌을 만날 줄이야! 누군가가 우리들의 피난일정을 기막히게 조절을 했는지? 막연하기만 했던 아이들의 남행길에서 의지할 집안 어른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 아닌가! 삼촌네 가족과 그 동내 사람들이 몰려 탄 화물칸은 발 디딜 틈도 없었지만 모두가 조금씩 양보하니 발은 뻗을 수는 없었지만 천안에서 타고 온 무개차에 비하면 추위는 훨씬 덜 했다. 곳간차 안은 공기는 탁했지만 사람들의 온기(溫氣)로 밀린 잠이 쏟아졌다.


대전에서 탄 이 곳간차도 쉽게 출발을 하지는 못했다. 전시 중에 기차는 군수송이 우선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 출발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모두가 느긋하게 기다렸다. 우리들이 탄 곳간차는 아마도 늦은 밤이 되어서야 출발했었나 보다. 다음 날인가 대구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어린 피난민들의 몰골은 먼저 남하한 사람들의 눈에는 상상을 뛰어넘는 거지 행색이었으리라. 아이들의 엉뚱한 피난계획과 판단이 포탄이 쏟아지는 생사의 고비마다에서 위험하기는 했지만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식들의 안위(安危) 걱정으로 뜬눈으로 새벽을 맞으신 부모님들의 간절한 기도와 하늘의 도우심으로 이룬 기적(奇蹟)이었다.


한강이 결빙(結氷)하는 영하 10~2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얇은 옷을 입고도 감기도 한번 안 들었다. 굶듯 먹으며 노숙하며 포탄이 쏟아지는 피난길에서 아이들은 기적처럼 씩씩하게 살아남았다. 10살~16살들 일행 다섯 명은 대구로 부산으로 또는 제주도로 가깝고도 또 먼 친척들을 찾아 뿔뿔이 헤어져 살았다. 1년여 후에 서울로 올라가 부모님을 뵐 때까지 아이들이 격은 피난생활의 또 다른 차가운 삶의 체험담은 이후로 미루며 “14세 소년이 격은 한국전쟁”의 체험담은 여기서 끝내고자 한다.  


갖은 시련을 이겨내고 서울을 다시 찾았을 때 1년 전 약속처럼 동생들과 함께 살아 돌아 온 우리들은 부모님 앞에 자랑스럽게 안겼다. 철없이 집을 떠날 때 아픈 상처를 드렸지만 다시 만난 어머니의 눈물은 대견스러운 아이들과 함께하는 환희의 눈물이었다. 하지만 거동조차 불편하시고 편찮으셨던 가엾은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다. 외가댁에서 중공군을 함께 만나고 새벽에 우리가 피난길을 떠날 때 주먹밥을 싸 주셨던 모사니 할머니도 가셨다.


전쟁 중 피난길에서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도 기적적으로 함께 살아남았던 당시 10살짜리 착한 막내 동생은 그 후 부지런히 살아 1남 1녀에 손자까지 얻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았으나, 지난 2008년12월7일 69세를 일기로 안타깝게도 먼저 이 세상을 떠났다. 피난길을 함께했고 지금 살아있는 조카형제 중 동생은 뉴욕에, 형은 서울에 그리고 우리 형제는 모두 서울에서 건강하게 살고 있다. 지금은 모두가 인생의 석양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한국전쟁 중 피난길에서 공포와 기아와 추위 속에서 기적 같이 살아남은 그 소년들은 이름 없는 영웅들이었다.


<12회 예고>
*글을 끝내며

                                                                           Posted by 민병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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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교(鐵橋)위에 곡예사(曲藝師)들

아이들은 그동안 쌓인 피곤함에 추위도 잊고 돼지우리에서 깊은 잠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어제 밤 돼지우리에서 겨울밤 무섭게 몰아치는 강추위를 참아내고 아침까지 살아남았다. 동사(凍死) 직전까지 덮쳐 온 아침추위에 온몸은 사시나무 떨듯했다. 아이들은 새댁들이 꾹꾹 눌러 담아준 아침밥 한 사발씩을 해치우고 다시 기운을 차렸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모두가 버릇처럼 채비를 차리고 나섰다. 찾아갈 곳이 어딘지 분명치도 않았지만 뜨는 해를 바라보고 오른쪽이 남쪽이라 했다. 시골길이 동서남북으로만 뻗은 길도 아니니 국도(國道)나 철길을 타고 걷는 게 지름길이라는 아이들의 원시적 독도법(讀圖法)은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아침에 맑던 하늘이 어슬해 지면서 싸락눈을 뿌린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강인지 개울인지 그 위에 가로놓인 철길을 건너야 하는데 침목(枕木)위엔 살얼음과 눈으로 덮여있었다. 10여m 아래 얼어붙은 강바닥이 무섭게 내려 앉아있었다. 한 줄로 서서 손을 잡으며 뒤에서 등짐을 움켜잡고 건너는데 한발 한발 발 디딤이 짜릿한 실족(失足)의 공포가 머리카락까지 전해온다. 바라볼 땐 얼마 안 되었는데 올라타니 철교다리 끝이 멀리 걸쳐있는 것이 두렵다. 침목 한 칸 한 칸에 발을 옮길 때 마다 오금이 저려오고, 침목 사이로 내리다 보이는 강바닥이 천야만야(千耶萬耶)이다. 그래도 우리 일행 일곱 명은 심장의 박동마저 잠재우며 남행길 철교를 건너는데 생사(生死)를 걸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모두가 눈 덮인 철교를 무사히 건넜다. 식은땀을 흘리며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악몽(惡夢)에서 깨여난 것처럼 말없이 건너온 철교를 되돌아보며 표정도 없는 미소로 서로를 확인했다. 모두가 숨마저 죽이고 건넜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황소처럼 힘차게 뿜어 대는 콧김이 뿌연 하늘에 선명하게 번지며 사라진다. 다시는 이 짓을 말아야지 했지만 오늘이 두 번째다. 무모한 짓이었지만 그래도 빠른 길을 택한 어린 영웅(英雄)들의 다리엔 조금은 힘이 더 솟아 멈출 수 없는 남행길을 계속 걸었다. 

  
눈 위에 버려진 천사

나즈막한 언덕을 옆으로 끼고 가는 길에서였다. 멀리서 포성(砲聲)이 들리더니 좀 떨어진 곳에서 폭발하곤 했다. 그동안의 체험으로 이 정도의 소리에는 엎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다. 포탄이 날라 오기 시작하면 불과 몇 초 사이로 계속 떨어졌다. 바람을 가르며 날카롭게 날라 오는 금속성(金屬聲)으로 들려오지 않으면 아이들은 전투경험이 많은 노병(老兵)처럼 낙하지점이 우리 주위가 아닌 것을 직감하고 태연했다.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 속에서 아이들은 이렇게 잘 대응하고 있었다. 그동안 며칠을 눈발이 거세게 퍼붓고 바람이 몰아치더니 벌판의 쌓인 눈은 높낮이가 멋대로다. 발목에서 허리까지 차기도 했다. 이런 시골길과 벌판을 찬바람 속에 걷고 또 걸어왔다.

며칠 전 있었던 기막힌 장면을 잊을 수 없다. 미 공군기에서 폭탄과 기총소사(機銃掃射)를 퍼부을 때였다. 모두가 이리 뛰고 저리 달아났다. 이런 생지옥 같은 불바다를 지나서였다.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딘지 보이지 않았다. 바쁜 걸음이지만 아이들의 호기심은 그냥 지나치지를 못 했다. 조급한 걸음을 잠깐 멈추고 찾아보았다. 허리까지 찬 눈 속에 천사 같은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싼 채로 눈 더미 속에 깊이 버려져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 방끗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이럴 수가! 또 한 번의 괴로운 선택이 내 앞에 다가왔다. 어린 생명의 구원을 순간에 선택해야 하는 무서운 시험에 아이들은 갈등 했지만 잠시뿐이었다. 무슨 사연이 있어 천사 같은 아기를 눈 속에 버렸을까?  

우리들뿐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아기를 보았지만 모두가 또 그냥 지나쳐 버렸다. 이 천사를 눈밭에 버리는 잔인함을 뛰어넘는 더 어려운 사정이 있었을까? 비정(非情)한 모성(母性)인가? 아니면 전화(戰火)속에서 실신(失神)한 엄마인가? 어찌하면 좋을까? 아기천사는 마지막 웃음으로 나와 함께 가자고 했지만 나는 영혼마저 눈 속에 파묻고 잔인하게 외면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상황이야 어떠했던 두고두고 그 아기를 안고 함께 못간 씻을 수 없는 죄책(罪責)을 나는 언제고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끝내 그 아기의 운명이 그 눈밭이었다는 생각에 어린마음에도 연민(憐憫)과 회한(悔恨)의 아픔이 충격으로 밀려왔다.     

베들레햄 마구간에 태여 난 축복받은 아기예수는 이날 부끄러운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눈밭에 버려진 아기로 보여주셨는지도 모른다. 생사를 넘어 영혼을 구원한다며 어려운 민초들을 눈밭에 남겨놓은 채 일찍이 남쪽으로 떠나간 당신들에게 눈 속에 버려진 아기천사의 애절한 미소를 아픈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죄인이 되여 보여 드리고 싶다. 전쟁은 왜 이렇게 스스로를 지킬 줄 모르는 아기들만이 아무 죄 없이 버려지며 희생되어야 하는지?




이(蟲)사냥

내려놓을 수 없는 무거운 마음으로 이날도 아이들은 계속 걷고 또 걸었다. 지칠 대로 지쳤지만 길로 벌판으로 논밭으로 걷는데 어린것들은 이골이 났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계속 걸어야하나? 추위 속에 쉬고 싶은 충동이 모두를 유혹하지만 동생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삼한사온이라 했나? 따뜻한 날도 있었다. 가끔은 양지 바른 곳에서 등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었다. 며칠이 지났는지 오늘이 며칠인지도 잊은 채다. 햇빛을 맞으니 졸음이 쏟아지지만 잠시라도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많은 생사의 갈림길을 거치면서 아이들은 계속 긴장과 공포로 예민해 졌나보다.    

등짐을 내려놓고 가뿐한 몸을 햇빛에 맡기니 온몸 여기저기서 가려운 듯 스물스물 하다. 허리띠를 풀고 가려운 데를 긁어 봐도 끝이 없이 가렵다. 손에 잡히는 게 있었다. 이(蟲)가 잡혔다. 요놈들이 내가 집을 떠나온 후에 내 몸 이곳 저곳에서 엄청난 번식으로 대가족을 이루었다. 나는 나날이 바싹 말라가는데 그동안 요놈들이 내 몸을 축내고 있었다. 몇 놈을 감각으로 잡으니 보리알 반쪽만 하게 자라며 그동안 호강하며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그동안 갖은 고생하며 이곳까지 살아왔는데 어린놈들의 피를 빨다니 못된 놈! 방법이 없었다. 한번 가렵기 시작하니 온몸이 가려워 참을 수가 없다. 얼마나 가려웠으면 바쁜 길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윗옷을 홀라당 벗었을까? 매서운 추위가 앙상한 몸을 사정없이 덮친다. 바쁜 피난길에 이게 뭣 하는 짓인가? 한 겨울에 길가에서 훌훌 옷을 벗은 아이들 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蟲)놈들의 엄청난 번식력이다.

이(蟲)사냥이다! 옷 이음새 구석구석에 요놈들이 대를 잇고 있었다. 서캐까지 까놓았다. 한가하게 잡을 시간도 없다. 갈 길이 바쁘다. 옷을 턴다고 떨어져 나갈 놈도 아니다. 옷을 벗어 던지고 싶지만 갈아입을 옷도 시간도 없었다. 옷 끝자락을 잡고 돌이나 나무등거리에 몇 번이나 화풀이 하듯 냅다 후려쳤다. 속옷 군데군데 고놈들이 터진 피 자국이 쩜쩜이다. 그때 DDT(살충제)가 있을 리 없고, 옷을 삶아 입어야 하는데... 그동안은 왜 가려운 줄도 몰랐을까?

오랜만에 내 몸을 보니 쑥 들어간 배에 갈비뼈엔 피골이 상접했다. 추워서 이 사냥도 빨리 끝내고 옷을 입으니 이처럼 따뜻할 수가 없었다. 어린 사냥꾼들은 한겨울에 부끄러운 추억을 남기고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 피난길을 서둘러 걸어갔다. 해방 전 국민학교에서는 가끔 이(蟲)잡는 시간이 있었는데 이 한 마리를 잡아 선생님에게 드리면 간유(肝油) 한 알씩을 주었는데 이를 못 잡아 간유를 못 탈 때는 이 잡은 아이가 부럽기도 했었다. 아마도 이(蟲)를 모아 간 곳은 보건연구소 같은 곳 이였나 보다.


고마우신 천안(天安) 아주머니

이날도 걷고 걸으며 점심때가 지났지만 점심이란 이미 옛 얘기다. 운 좋게 우물을 만나면 찬 냉수 한 바가지로 빈속을 채우곤 했다.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포화 속에서 죽음은 두려움이지만 배고픔은 최소한의 자존심과 인격마저 벗어던져야 하는 서러움 같은 것이다. 이날도 해가 질 때까지 걷기로 했다. 하늘 높이 은빛 비행기가 흰 꼬리를 그리며 북쪽으로 날라 가기도 하고, 야전색(野戰色) 얼룩무늬의 헬리콥터가 요란하게 오가기는 했지만 최전선에서 들리던 대포나 기관총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조용한 것도 불안했다. 조용한 곳이 피아간의 포탄의 낙하지점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얼마를 더 걸었을까? 기차의 기적이 들린다. 잘못 들었나? 어디쯤 기차가 와 있나? 기차에서 울리는 기적(汽笛)이 분명했다. 하지만 저 기차를 잘못타면 몰살당하는 게 아닌가? 했지만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미 최전선을 벗어났구나! 살았다! 겁 없이 포탄 속을 헤집고 걸어왔던 우리들은 큰 고비는 넘겼나 보다. 해가 질 때쯤 어느 민가(民家) 앞에 다 달았다. 그동안 걸어오며 피난민들이 몰려갔던 그런 빈집이 아니었다. 그냥 밀고 들어갈 수가 없어 문밖에서 한참이나 서성이고 있었다. 이런 서성임은 오랜만에 되찾은 염치였나 보다.
 
오랜만에 질서가 자리한 세상을 찾아온 아이들은 이 집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동안 고된 남행길에서도 씩씩하게 걸어왔던 그런 당당함도 잃고 의기소침(意氣銷沈)해지는 나 자신에 놀라웠다. "너희들 피난 가는 길이구나?" 우리들의 초라한 몰골을 보셨는지 깔끔한 아주머니 한분이 나오셔서 물으셨다. "네~ 부산으로 피난 가는 길입니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면서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일행이 일곱 명인 것을 보시고는 흠짓 하시는 것 같았지만 어린 녀석들이 안쓰러웠는지 이내 넉넉한 표정으로 다가 오시더니 "저 앞이 천안역인데 내일쯤 남쪽으로 떠나는 기차가 있으니 오늘은 우리 집에서 묵고 내일들 떠나거라! 어서들 들어와요! 배들 고프겠구나!"

이제야 우리들이 '천안'까지 온 줄 알았다. 하늘아래 제일 편안한 곳이 천안(天安)이라 했던가? 흔히 듣던 천안삼거리나 능수버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고맙게도 천안에서 큰 인심을 만난 것이다. 전쟁 통에 고약한 게 인심이라 하지만, 세상은 우리들의 생각처럼 선과 악으로만 그을 수는 없는 것이 아이들이 피난길에서 보고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울을 떠나오면서 피난길 객지에서 처음으로 별에 별 사람들을 스치고 지났지만 어린 아이의 눈으로 바라 본 세상 사람들은 거의가 아이들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분이 우리들을 돌보아 주신다고 해서가 아니라 각박한 세상에 초면인 우리들에게 마음을 열어주신 천안 아주머니의 호의에 몇 번이나 “고맙습니다!”고 했다. 인정이 많으신 고마우신 천안 아주머니셨다. 하지만 우리들은 집을 떠난 지 며칠 사이에 이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없었다. 당연한 것처럼 몰려 들어가 씻고 싸고 나서 천안 아주머님께서 정성스럽게 차려주신 저녁상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게걸스럽게 해치웠다. 어린 걸신(乞神)들은 피난길에서 체면을 벗어던진 지가 꽤 되었다.

<11회 예고>
*무개차(無蓋車)에 올라타다
*마지막 조찬(朝餐)
*갈림길에서
*기적(奇蹟)
*글을 끝내며

                                                                               Posted by 민병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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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暴雪)


집을 떠나온 후 하룻밤도 마음 놓고 푹 자지는 못 했지만 오늘도 모두가 언 몸을 녹이지도 못 하고 함박눈이 퍼 붓는 눈길을 힘들게 걸어야만 했다. 기차 길을 따라가는 길이 가장 빠르고 남쪽으로 가는 확실한 지름길이라 했지만 중간에 폭파된 작은 다리라도 나타나면 몇 십리는 더 걸어야 했다. 또 다른 빠른 길인 국도(國道)를 찾기까지 헤맬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철길이 놓인 다리가 앞에서 끊겼다. 눈보라 속에 몇 십리를 더 걸어야 할런지 몰랐다. 혹 시골의 노인들이라도 만나면 남행길을 묻지만 오늘처럼 함박눈이 퍼붓는 날에는 인적(人跡)도 없다. 허허 벌판엔 우리 일행들뿐이다.


끝없이 쏟아지는 눈발로 앞길이 멀리는 보이질 않았지만 가끔씩은 침묵의 행군 속에서 일행의 생존을 확인해야 했다. 바람결에 돌며 날리며 춤추듯 떨어지는 눈송이들의 화려한 윤무(輪舞)에 취하듯 휘말려 나는 하늘 위로 걸으며 실신(失神)한 것 같았다. 나도 흩날리는 한 송이 눈이 되어 함께 빙빙 돌며 날고 있었다. 집을 나선지 며칠이 되었는지 기억도 잃었다. 이렇게 쓰러지면 가는 길이다. 폭설 속에서 하늘이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대자연의 무대에서 이렇게 죽음에 이른다면 객사(客死)로 발견되기 까지는 죽음도 낭만일수가 있을까? 죽음에 이르는 고통의 끝은 환희(歡喜)일지도 모른다.


지남(指南)의 방향도 잃었다. 나는 이미 땅을 딛고 걷지 않았다. 조금은 공중에 떠서 걷고 있었다. 정신도 혼미해지고 체중도 없이 쏟아지는 눈 속을 바람을 가르고 가고 있었다. 얇은 운동화 바닥에다 기우고 구멍 난 양말이 무릎 까지 쌓인 눈밭에 젖어 발바닥에서 무릎까지 감각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동생들과 함께 살아 돌아오겠다는 어머니와 약속을 지켜야 한다.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어디선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멀리서 내게 전해 오는 듯 했다. 눈 내리는 날처럼 세상이 조용한 날은 없다. 이런 대자연의 침묵보다 더 무거운 어머니의 간절한 아픔을 지고 우리 일행은 어딘가를 향해 계속 걸어야했다. 
 


 

외딴집


우리일행이 폭파된 다리 앞에서 방향을 바꾸고 헤매는 동안 많지 않았던 피난민들이 뿔뿔이 흩어져 우리들만 남아 걸었다. 온 세상이 눈으로 덮였다. 우리들이 걷고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도 몰랐다. 웬일일까? 대포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어느 쪽 군인도 만나지 못했으니 우리는 아직도 최전선 한가운데서 걷고 있는 거다. 이렇게 눈이 내리는 날엔 전쟁도 쉬여가며 하는지? 군인들도 우리처럼 모두들 지쳤나보다. 함께 걷던 군인부인이 침묵을 깼다. 
"애들아! 오늘은 너무 눈이 많이 내려 걷기도 힘드니 집을 만나면 일찌감치 쉬는 게 어떠냐? 모두 힘들지?"


전날 밤 처마 밑 노숙으로 지친 우리들에겐 반가운 얘기였다. 그동안 하루에 겨우 한 끼 정도로 속을 채우고 걸었으니 모두 추위와 허기로 지칠 대로 지쳐있었지만 해가 지기도 전에 휴식을 한다는 건 포화(砲火)속에 쫓기며 남행하는 아이들에게는 불안하기도 했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멀리 외딴 초가집 한 채가 폭설 속에 신기루처럼 우리 일행을 반긴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어도 모두 그 외딴 초가집을 향해 갔다. 빈집 이었다. 담장도 싸리문도 없는 작은 남향집이다. 보따리를 마루에 풀었다. 새댁 둘이서 두 방 아궁이에 군불을 지폈다. 가마솥에 물을 끓이고 밥도 짓고 마당에 묻어놓은 김치 독을 열면서 아직 손도 안댄 김장김치가 있다고 모처럼 웃는다. 긴 겨우살이를 알뜰하게 준비해 놓은 주인 아낙에게는 참으로 염치없는 짓이다. 우리뿐이 아니라 모든 피난민들은 누구나 도착한 곳이 자기 집이다.


피난길에 해가 지면 누구든 아무 집에나 들러 씻고 먹고 묵었다. 뒤주도 열어보고 김칫독도 열어서 끼니를 해결 했다. 그 이상 바라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도둑질이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않는 것 같았다. 모두가 양심을 먼저 피난시켰는지는 몰라도 어쩔 수 없었다. 나도 그랬다. 집 주인에게 미안하고 당당하지는 못했다. 좀 켕기는 마음이야 어린놈에게도 있었다. 차라리 주인이라도 있었으면 했다.


며칠 만에 따듯한 물에 손발도 씻고 양말도 빨았다. 더운물에 발을 담그니 오랜만에 온몸에 피가 돌고 날을 것 같다. 새댁 두 분이 정성스럽게 차려준 밥상에는 김치와 김치찌개가 오르니 수랏상이 따로 없었다. 오늘처럼 포성도 들리지 않는 전쟁터에선 마음 한구석에 초조함과 더 큰 불안이 몰려 왔지만, 오늘은 폭설로 일찍 쉬었으니 내일부터는 강행군이다! 다짐하고 모두 일찍 따듯하게 잠을 자자고 했다. 
 

<사진 - 폭설(暴雪)속 피난민들>

 

미군의 강간(强姦)


우리들은 추위도 잊은 채 마루에 걸터앉아 며칠간 피난길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영웅담?(英雄譚)을 주고받았다. 두 새댁들도 머리까지 감고 나와서 밝은 모습으로 아이들과 함께 어울렸다. 새댁들과 처음으로 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모처럼 오붓하고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이때였다. 멀리 눈으로 덮인 논밭 넘어 에서 총을 든 미군 둘이 우리 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쉽게 알아봤다. 미군 병사였다. 전선에서 모처럼 만나는 미군이 반갑기도 했다. 우리들은 그들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나보다. 최전방 미군의 용감한 척후병(斥侯兵)일 꺼라 여겼다. 가까이 보니 젊은 미군 병사였다. 내게 가까이 다가서며 총을 드리대며 소리 지른다. "Hands up!"한다. 순간 두 손을 번쩍 들었나 보다. 이들이 우리를 인민군으로 잘못 알았나? 생각했다. 아니겠지? 두 놈이 서로 뭐라고 쏼라 쏼라(?)댔지만 "핸스엎!"외에는 쉽게 알아듣지를 못했다. 이놈이 중공군에 이어 두 번째로 내게 총구를 들이댄 녀석이다.


주위를 둘러 본 두 젊은 미군병사는 아이들과 젊은 두 여자만 있는 것을 안심을 했는지 총구를 내리고 “부산...”어쩌고 “트럭...”어쩌고 하는 말이 우리들을 차를 태워주고 피난길을 도와준다고 풍을 떨었다. 순진한 우리들은 미군들이 차를 태워서 우리를 도와 부산까지 태워준다고 알아듣고 좋아했다. 추호도 우리들은 그놈들이 딴 생각으로 찾아왔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두 미군은 피난민들이 가장 아쉬운 문제로 꼬시며 우리들에게 접근했다. 이놈들이 우리들의 반응이 호의적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이때였다. 두 놈은 총구를 두 새댁으로 향하더니 낚아채듯 끌고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놀란 두 새댁의 비명이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이놈들이 순진한 아이들을 속였구나! 할 때는 이미 늦었다. <양키 놈의 강간이다!> 알아차린 순간 어린 우리들로서는 총을 든 그놈들에게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해방 후 로스캐(Ruskii) 병사들이 평양에 들어와 북한 여인들을 무수히 강간을 했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미군들이 그랬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어 미군들은 언제나 우리를 돕는 선량한 사람인 줄만 알았다. 이놈들을 어떠칸다! 우리들을 믿고 함께 온 새댁들이 아닌가! 도와 줄 방도가 없는 내가 수치스럽게 당하는 것만 같았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 두 새댁의 외마디 소리가 문풍지 틈으로 계속 구원을 청했지만 마당에서 눈을 맞으며 고개만 떨구고 있는 나는 자신에게 절망하고 있었다. 속옷을 찟는 소리가 들려오고 저항하는 새댁들의 비명이 계속 울려왔지만 외딴집 밖에서는 누구도 새댁들을 도와 줄 사람이 없었다. 아이들은 절망의 늪으로 계속 가라앉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 후 두 양키놈은 후다닥 왔던 눈밭으로 도망쳤다.


새댁들의 오랜 통곡이 메아리도 없이 이름 모를 시골 눈밭에 묻혀버렸다. 중공군이 들어오면 부녀자들 에게 어떻게 한다고?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나쁜 양키 놈들! 분노밖에 할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 울지 마세요! 우리가 동네를 잘못 찾아왔어요. 우리 피난민이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요" 위로의 말은 고작 이것뿐인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두 새댁은 하늘을 보고도 아무 잘못이 없었지만 마치 내 잘못으로 일어난 일처럼 이때부터 나는 두 새댁 앞에 죄인이 된 것처럼 마주 볼 수도 없었다.
 

내가 듣고 아는 한은 전쟁 중에 인민군이나 중공군이 한국 부녀자들을 희롱하거나 강간을 한 일은 없었다고 했다, 현장에서 즉시 사형에 처하는 무서운 군률(軍律)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어른들이나 선배들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그런 면에서 국부군(國府軍=蔣介石 군대)보다는 중공군이. 유엔군보다는 인민군이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지 않았나 생각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이런 것이 사실인 걸 어쩌랴? 얼마나 우리 한국 사람들을 우습게보았으면 함부로 이따위 짓을 할까? 어린 내 자존심을 짓밟은 그놈들에게 분노를 넘어 살의(殺意)마저 치밀어 올랐다. 이놈들아! 전쟁은 총질로만 이기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의 절규(絶叫)>



돼지우리에서 하룻밤을


해가 지려는데 치욕스런 현장을 떠나 다른 곳으로 찾아가려고 나섰다. 아까 그놈들이 달아난 곳에서 무장한 군인들 여러 명이 우리를 향해 지뢰탐지기를 앞세워 오고 있었다.
"여기에 미군 둘이 왔다갔는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한국인 통역 같은 사람이 묻는다.
"... ... ..."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전쟁터는 무서운 곳입니다. 왜 따로 다니십니까? 저희들이 안내 할 테니까 피난민들이 많은 곳으로 가십시오. 이곳은 많은 지뢰를 매설했는데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며 지뢰탐지기로 길을 더듬으며 새로운 동네가 보이는 곳까지 안내하고 돌아갔다. 그들은 이전 집에서 벌어졌던 일을 알고 찾아왔던 것 같았다. 고맙기도 했지만 무마하는 방법이었나 생각도 했다.


이곳에도 몇 집밖에 없었는데 피난민으로 가득차서 우리가 쉴 공간이 없었다. 한참이나 찾아보았다. 부엌이나 헛간까지도 드려다 봐도 우리가 비집고 들어 갈 곳은 없었다. 어떻게 해서 두 새댁의 잠자리는 멍석을 깐 헛간에 겨우 마련해 주었다. 얼굴을 마주하기 민망했던 새댁들에게 어린것들이 배려했다. 하지만 서울을 떠난 후 아이들은 하룻밤도 언 몸을 제대로 풀지를 못했으니 오늘 밤도 잠자리 걱정이 태산 같았다. 많은 궁리를 해 보았지만 묘안이 없었다.  


좀 떨어진 곳에 돼지우리가 있었다.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면 어떠랴! 눈보라 찬바람 피하고 하룻밤 묵는다면 돼지우리면 어떠랴! 상식을 뛰어넘은 아이들의 상상력은 기특했다. 돼지우리 칸을 넘어 들어가서 바닥을 치우니 냄새도 없고 뽀송뽀송했다. 건너편 언덕바지에 땔감인 동나무 덩이가 눈에 덮여있는 것이 보였다. 언덕으로 올라가 동나무 한 묶음을 끌어다 돼지우리에 지붕을 덥고 보니 하룻밤은 지낼 만 했다. 사방 2m 남직한데서 다섯 명이 빙 둘러 앉아 가운데에 화톳불을 지피며 밤을 새우기로 했다. 발도 녹이고 양말 운동화도 말리며 온갖 퀴퀴한 냄새에도 아랑곳 않고 당장은 지낼만했다.


시간이 지나니 화톳불 연기에 목이 칼칼했다. 눈도 맵고 바지 섶이 눌고 타면서도 등판은 얼어 들어왔다. 하나 둘씩 깊은 잠에 빠지는데 이러다 누군가가 동사(凍死) 할 수 있다. 추위에 잠들면 죽을 수 있다 해서 흔들어 깨우고 말을 걸어보지만 고개만 끄덕이고 잠에 빠지니 이러다가는 누군가가 얼어 죽을 수도 있다. “자면 안 돼! 자면 죽어!” 나는 울면서 잠이 든 동생의 따귀까지 때려가며 깨워 보았지만 쏟아지는 아이들의 잠을 깨울 수는 없었다. 허사였다.


나는 화톳불이 사그러지면 나뭇가지를 얹어가며 뚠 눈으로 밤을 새우려 했지만 오래 견디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한겨울의 긴 밤을 돼지우리에서 매서운 강추위에도 아침까지 살아남았다. 먼동이 트자 겨우 실눈을 뜨며 남자 녀석 다섯 명은 돼지처럼 우리에서 기어 나왔다. 온몸이 곤장이라도 맞은 듯 쑤시고 뻐근하고 저려왔다. 모두의 얼굴은 앙괭이가 되어 서울에서 떠날 때 모습은 아니었다. 사람의 목숨처럼 모지고 질긴 것이 없다 했는데 아이들에겐 너무 잔인한 시련이 아닌가!


추위가 뼈 속으로 스며든다. 추위를 견뎌내는 길은 따듯한 아침밥을 드는 것 밖에 없었다. 아침을 준비하려던 새댁들이 이 동네는 물이 귀하단다.
"괜찮아요. 눈으로 밥을 짓지요" 했다. 돌로 삼발이를 괴어놓고 장작에 불을 지폈다. 눈을 냄비에 녹이지만 밥 지을 물을 채우는 일에 이렇게 많은 눈이 들어갈 줄은 몰랐다. 끝없이 눈이 들어간다. 물이 귀하다 보니 쌀을 씻는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밥이 보약이다. 시원치 않은 옷을 입고 강추위에 한대 잠을 자고도 눈밭에서 감기가 든다는 것도 아이들의 피난길에서는 호사스런 얘기다. 하늘은 잠 못 드시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를 받아 주셨나 보다. 


새댁들이 하늘에서 내려 준 눈(雪)물로 지은 밥은 하늘이 내려주신 생명의 밥상이고 혹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고 간절히 기도하는 어머니의 눈물 같았다. 어디서 들었는지 새댁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누른 밥과 숭늉을 끼니마다 후식(?)으로 권했다. "누른 밥과 숭늉을 마시면 객사(客死)를 안 한다"고 했다. 그런가? 사실여부를 떠나 아이들에게 베푸는 새댁들의 마음이 고마웠다. 모두가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 하나로 피난길에서 아이들은 우연히 만난 두 새댁과도 한 가족이 되어 낯선 길을 또 나섰다.  

<10회 예고>
*철교위에 곡예사(曲藝師)들
*눈 위에 버려진 천사(天使)
*이(蟲) 사냥
*고마우신 천안(天安) 아주머니


                                                                       - Posted by 민병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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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소위 부인들


얼마나 달려 왔을까? 배고프고 목마르고 추웠지만 이불을 진 등속에선 땀이 흘렀다. 뒤를 보니 도망쳐 나온 곳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잠깐 쉬면서 주먹밥을 먹자고 했다. 사과만한 주먹밥이 등짐 속에서 원형을 잃었지만 깨소금이 고루 섞인 주먹밥은 아직은 온기가 가시지 않아 꿀맛이다. 피난길 아이들은 한겨울 낯선 벌판에서 초라한 먹을거리지만 소풍을 온 기분도 들었다. 우리가 쉬고 있는 동안 우리 앞을 지나가는 피난민들도 많았다.
 

누군가가 우리 일행을 지켜보고 있었나 보다. 다시 출발하려던 차에 새댁 같은 두 여인이 우리 앞에 다가섰다.
"너희들도 피난 가는구나! 그런데 어른들은 안계시고 너희들뿐이냐?" 묻 길래 앞뒤 사정을 얘기하니 반가워하면서 "잘 됐다. 가는데 까지 함께 가자!"고 했다. 두 새댁의 사정은 이러했다. 남편이 모 육군 수송대 소위인데 차를 가지고 온다고 해서 기다리다가 끝내 오지 않아서 늦게 이렇게 피난을 간다고 했다. 내 주제도 잊고 누나 같은 새댁들이 딱해 보였다.


"육군소위가 전쟁 중에 가족을 태워줄 차를 가지고 올 끗발이 있을까?" 생각했지만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눈치는 있었다. 잘 된 일이라 생각했다. 어린 녀석들뿐 이지만 두 새댁은 남자 다섯 명과 함께 서로 의지하며 가는 것이 조금은 든든했나 보다. 피난길에서 무슨 인연인지 이렇게 만난 우리 일행은 7명의 대가족이 되어 외롭지 않았다.

 

끔찍한 시체들


새로운 힘을 얻고 씩씩하게 우리는 얼마나 걸었을까? 그곳이 아마도 시흥역에서 안양역 사이였나 보다. 무시무시한 장면이 우리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열차 한대가 폭격을 맞아 불타고 나서 아직도 연기가 나고 있었다. 시꺼멓게 그을린 채로 서 있었는데 가까이 가니 수백 명의 시체가 여기저기 먼 곳까지 나둥그러져 있었다. 철로 길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 철길을 따라 걸어 온 우리들은 이곳을 피해 갈수는 없었다.


몇몇 다른 피난민들의 말로는 어제 밤 마지막으로 군수물자를 싣고 떠나려던 기차에 많은 피난민들이 곳간차(庫間車) 지붕 위까지 수천 명이 매달리며 올라 탓는데 이미 적진(敵陣)이 되어 몇 번이고 비행기에서 피난민들을 향해 "이 열차는 이미 적진 안에 있어서 곧 폭격을 하겠다! 피난민 여러분들은 빨리 내려서 걸어 가시요!" 라고 했다는데 일부 사람들은 믿지를 않고 그냥 기차에 매달린 채 폭격을 당했다고 한다. 상황이 급박하고 위험 할 때일 수록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고 경고의 말을 믿었어야 했는데... 


어제 우리도 외가댁에 들르지 않고 계속 걸어왔다면 저 기차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겠고 이렇게 참혹한 변을 당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가 내 며칠간의 피난길 경험처럼 어느 순간 판단에 생사가 달렸나 보다.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 해야 하나? 운명(運命)이라 해야 하나? 죽고 사는 문제가 어느 순간 아이들 판단에 맡겨진다는 것은 너무 잔인한 시험이 아닌가? 하지만 전쟁 속에서는 그랬다.   


세상에 이토록 끔찍할 수가 없었다. 수십 미터로 날라 가 죽은 사람, 오장(五臟)이 밖으로 튀여 나온 사람, 꺼멓게 끄을러 얼굴 모습조차 일그러져 알아 볼 수도 없는 사람들. 팔다리가 따로 떨어져 나간 사람, 숨을 거두기 직전에 신음하는 사람들. 이들 중 지금도 잊지 못하는 참혹한 장면은 지난 밤 악몽처럼 또렷하다.


등이 꺼멓게 타들어가 이미 죽은 엄마의 젖을 물고 울고 있는 갓난아기가 있었다. 무섭게 터지는 폭탄의 폭풍과 그 불구덩이 속에서도 엄마는 끝까지 아기를 온몸으로 감싸 아기의 생명은 구하고 마지막까지 죽음으로서 모성애를 보여준 자랑스럽고 눈물겨운 엄마였다. 이 가엾은 아기는 계속 울면서 죽은 엄마의 젖을 물고 있었다. 잠깐 눈길만 줄뿐 모두가 그냥 지나쳐 버렸다. 어렸다지만 나도 눈길을 돌린 그중에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이 아기를 어쩌랴? 이 아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열차에 실린 군수물자가 무엇이기에 수백명의 귀한 목숨과 바꾸어야 했던가? 하늘이여! 하늘이여! 속으로만 외쳤다. 저들은 누구를 원망해야하나? 이런 끔찍한 시신들을 끝없이 건너뛰면서 발걸음은 남쪽을 향해 더 바삐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나도 두고두고 그 엄마와 아기 앞에 죄인이 되어 가슴이 메여왔다.


 

<사진 - 처참했던 당시상황을 말해주는 철마>


수원역이 화염에


마치 무서운 지옥문을 뛰쳐나오듯 우리들의 걸음은 더 빨라지고 있었다. 얼마를 더 걸었을까? 바람을 가르며 매서운 소리로 포탄이 우리를 향해 계속 날라 왔다. 순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그때마다 우리 일행은 눈밭에 납작 엎드렸다. 불과 백여 미터 앞에서 폭발했다. 둘러봤다. 모두가 무사했다. 살았다. 이렇게 포탄이 여러 차례 떨어졌다.


아주 위험한 판단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포탄이 우리를 향해 날아오는 소리와, 머리 위로 멀리 날아가는 소리를 구분할 수가 있을 만큼 아이들은 며칠 동안 어른들의 병정놀이 속에서 훈련이 되었나 보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전쟁터에서 하지 말아야 할 위태로운 병정놀이를 죽음의 공포 속에서 뛰며 엎어지며 일어서면서 배우고 있었다.


어느 쪽에서 퍼붓는 포탄인지는 알 필요도 없었지만 우리는 피아(被我)가 대치하는 한가운데를 걷고 있었다. 박격포탄의 날카로운 파편조각이 우리들 주위에 떨어지며 말라붙은 풀에 불을 붙인다. 빨리 전선(戰線)을 넘어서서 피해야한다. 하지만 UN군의 퇴각속도가 빠른 것 같아 걸어서 남하하는 아이들의 걸음이 그걸 넘지 못하고 있었다.


온종일 걸어와 해가 지려하는데 도착한 곳이 수원근처란다. 또 한참을 걸어서 수원역에 도착할 때였다. 미 공군의 전폭기가 수원역에 기총소사와 폭탄을 퍼붓는 것이 아닌가. 수원역에 중공군이나 인민군이 이미 와 있었나? 아니면 미군의 군수물자가 아직 쌓여있는지? 많은 피난민들이 수원역사 쪽에서 뛰쳐나오고 있었는데 내 눈으로 본 사상자도 한둘이 아니었다. 수원역이 순식간에 화염에 쌓였고 10여구의 시체들이 널부러졌다. 한순간에 일어난 참사 앞에서 우리들은 용케도 또 거짓말처럼 모두가 살아남았다. 
 

<사진 - 저 멀리 오른쪽에 탑처럼 생긴 (연기 나는 밑에) 건물이 남쪽에서 지금의 수원역 쪽을 보 고 찍은 것입니다.(1951년4월)> 

 

어린 노숙자(露宿者)들


수원역을 멀리하면서 해가 질 때까지 우리들은 다시 남쪽으로 걸었다. 어둠이 찾아오자 멀리보이는 초가집으로 향했다. 집이 두어 채 있는 외딴 마을이었다. 열려있는 대문으로 들어갈려니 방과 마루, 부엌, 곳간마저 피난민으로 가득 차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옆집도 마찬가지였다. 저녁은 무엇으로 어떻게 해결했는지 기억이 없으나 아마도 밥을 짓고 땅에 묻어놓은 김장독에서 김치를 퍼다가 먹었을 거다. 밥을 짓는 것 외에는 무엇을 더 끓여 먹을 수도 없었고 밥과 김치 이외는 사치한 생각이고 기대하지도, 할 수도 없었다. 


방마다 피난민들이 이미 들어서서 우리 일행이 한곳에서 잘 수는 없었다. 이방 저 방으로 분산해서라도 추위라도 피하려 했다. 조금은 공간의 여유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려하니 이미 차지한 어른들이 못 들어오게 한다. 먼저 차지한 어른들이 자기네 가족끼리만 발이라도 쭉 뻗고 편하게 자겠다는 심뽀다! 아이들은 말도 못하고 그렇게 방에서 쫓겨나왔다. 어려울 때 사람들의 밑바닥은 드러나게 마련이지만 아이들만 못한 속 좁은 어른들은 어디서든 있게 마련인 세상이니 어쩌라! 혹한 속에서 아이들과 함께하기를 차갑게 거부한 어른들은 순진한 아이들에게 무서운 이기적인 삶을 가르치고 있었다. 


사정을 할 수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자존심을 지키다가 이날 밤 고생을 사서했다. 이렇게 방에서 쫓겨난 아이들은 그 집 대문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고, 처마 밑 둔덕에 모두들 서 있다가 별 변통이 없자 그 자리에서 다리를 모으고 쪼그리고 앉아 이불을 덮고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초가집 짧은 처마에서 떨어지는 눈 녹은 낙수 물이 고드름을 타고 떨어지며 무릎을 덮은 이불을 적신다. 똑~똑~똑! 떨어지는 낙수를 세며 새벽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시간은 차라리 정지된 시간 속에 벌어지는 형벌(刑罰)의 유희(遊戱)같았다.


온몸이 추위 속에 뼈 속까지 서럽게 저려왔지만 어쩔 도리가 없어 졸며 깨며 하면서 새벽을 기다리는 아이들은 긴 겨울밤이 원망스러웠다. 두 동생을 책임을 지겠다고 데리고 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한대(寒帶)잠을 재우는 것 이였으나 얼려 죽일 수는 없었다. 일행 중 한살 위 ○基 조카가 말했다. 추위에 잠들면 얼어 죽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나서 깊이 잠든 녀석들을 몇 번이나 깨웠다. 생사(生死)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지만 나부터 잠이 쏟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이 살면서 편한 잠을 자는 것처럼 행복한 일도 없나보다. ‘하늘은 참을 수 있을 만큼 고통을 준다’고 했다. 잔인했던 긴 겨울밤도 아이들의 아픔을 밟고 새벽 동이 트였다. 새벽하늘에 눈을 떳지만 다리가 펴지지 않고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아이들 모두가 동사(凍死)의 문턱까지 갔었나 보다. 모두가 선수들이 준비운동 하듯 온몸을 움직인 후에야 새댁들이 차려 준 아침을 뜨고 버릇처럼 또 길을 떠나는 우리 일행이 대견스러웠다.


"어릴 적 고생은 은전(銀錢)을 주고 산다"고 했다. 자주 들어온 어른들의 말씀이었지만 나는 이렇게 괴로움을 당하고도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겪어 보지도 못한 훈장(訓長)님들의 교훈일 뿐이라 생각했다. 뿌연 하늘이 짙어지니 오늘도 눈을 퍼부을 것만 같았다.


 

<사진 - 후퇴하는 미군들(1951년 1월)>

(9회)예고
*폭설(暴雪)
*외딴집
*미군의 강간(强姦)
*돼지우리에서 하룻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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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한강을 건너다


1951년 1월 5일 늦은 오후 15살에서 10살까지의 꼬마 피난민 5명 일행은 아무도 기다려주지도 않은 남쪽을 향해 무작정 집을 나섰다. 동네집들이 더러는 포탄으로 흉물스럽게 주저앉았고 창덕궁을 지나 운현궁(雲峴宮)을 거쳐 종로로 나오니 가로수나 전봇대에 탄환을 맞아 패인 자국들이 수없이 눈에 띄었고 포탄을 맞고 뼈대만 남아 검게 그을린 건물들이 휑하니 뚫린 창으로 삭풍이 넘나든다.


지난 가을 유엔군이 인천상륙을 거처 서울수복(50년9월28일) 때 있었던 치열했던 시가전(市街戰)의 흔적들이 모두가 떠난 지금 더욱 을씨년스럽다. 뒤로 본 중앙청도 그을린 채 석양빛에 초라하다. 전주(電柱)가 더러는 동강이 나 매달린 전선들이 탄력을 잃고 바람에 흔들리고 남대문 지붕에 쌓인 눈이 괴이한 바람소리와 함께 흩날리며 꼬마들의 피난길에 안위를 빌어주는 듯 했지만 아이들은 갈 길이 바쁘다.


서울역 광장에 그 많던 사람들을 다 실어 날랐는지 눈 먼지만 날리고 있다. 이렇게 가로등 하나 없이 버려진 서울은 해가 지면서 어둠 속에 조용히 얼어붙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삼각지를 지나 전쟁의 피해가 심했던 용산에 이르렀을 땐 어두움이 짙게 깔렸다. 어디서 출발해 왔는지 많은 피난민들이 얼어붙은 한강으로 몰려들었다. 우리 일행도 피난민 대열에 섞여 어른들의 뒤를 밟으며 한강 백사장 아래로 내려갔다.


지난 여름 시골에서 식량을 구해 인민군 병사와 함께 나룻배를 타고 오다 전폭기의 공격목표가 되어 기총소사를 당하고도 살아남았던 용산 쪽 나루터가 바로 이곳인데 오늘은 얼음 위를 건너야 하다니! 어디 우리들뿐이랴. 한강나루에 얽힌 수많은 사람들의 한(恨)을 얼음으로 굳게 덮고 한강은 묵비(黙秘)하고 있었다. 끊어진 인도교와 철교를 원망할 겨를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건너는 곳은 얼어붙은 한강 빙판길이다. 해가 지고 어두운 후에도 한강엔 수없이 몰려들었다. 우리가 건너기 며칠 전 밤에 벌써 한강 부교(浮橋)마저 폭파했단다.


겨울방학이면 가끔은 스케이팅하러 몰려 온 즐거운 빙판이지만 오늘 첫발을 디디는 순간은 마치 등 뒤에서 누군가가 떠밀어 건너가는 것처럼 두려웠다. 얼음바닥이 가라앉기라도 한다면 하는 무서운 상상에서 한동안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한겨울 강바람은 아이들의 얼굴을 에이는 듯 했지만 공포감은 추위를 잊을 만큼 넘어섰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그 많은 피난민들이 아무도 안내나 지휘도 하지 않았는데 모두가 성급한 마음을 자제하고 차례를 지켰다. 모두가 한 줄로 서서 질서를 지키고 건너가고 있었다. 빙판에 미끄러진 사람에게 손길을 건네주고 격려하면서 얼어붙은 한강 빙판을 한발 한발 내딛고 있었다. 우리 앞을 걷는 몇몇 어른들은 새끼줄로 신발과 발등을 동여매서 미끄러운 빙판에서 “아이젠'을 대신하고 있었다. 건너는 도중에 얼음이 강추위에 팽창(膨脹)하며 갈라지는 금속성이 날카롭게 온몸을 찌르듯 전해올 때 마다 온몸이 오그라드는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때마다 경험이 많으신 어른들이 "얼음의 두께가 있어서 절대로 내려앉지는 않는다"는 위로의 말씀을 들려주셨다. 아이들은 공포의 침묵 속에서 서로를 향해 안도의 미소를 주고받았지만 얼음이 갈아 앉을 수도 있다는 공포에서 쉽게 벗어나 질 못 했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똑같은 피난길인데 기차를 서로 먼저 타겠다고 난리를 치던 기차역에 비하면 늦게 출발해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가려는 이들 역시 모두가 다급한 혼란 속에서도 외길에 한 줄로 서서 건너는 이런 피난민 집단의 여유로운 모습이 내겐 작은 감동이었다. 
 

<사진 - 1951년1월 뒤늦게 피난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혹한의 칼바람을 맞으며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고 있다>



흑석동(黑石洞)에서 첫날밤을


용산 쪽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며 한강의 빙판길을 건너는 시간은 두어 시간도 더 걸렸나보다. 얼어붙은 강바닥만을 보며 오금이 저려오며 무사히 한강을 건넜다. 노량진 언덕에 올라 모처럼 바라본 강 건너 남산 밑 서울은 작은 불빛 하나 없는 칠흑 속이었고 강추위로 얼어붙은 한강줄기만이 희미한 형광(螢光)을 내비치고 있었다. 


병환중인 老할머니와 부모님을 강 건너 북쪽 어둠속에 버리고 온 죄책감을 살아서 다시 한강을 건너오겠다는 다짐으로 “불효를 갚을 수 있을까?” 했지만 어둠보다 더 까맣게 타 들어가는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철없는 아이는 잠시 눈물을 글썽였지만 짐작이나 했을까? 바쁜 마음에 문안 쪽을 바라보는 것은 잠시였다. 하지만 무거운 마음은 계속 어머니를 그리고 있었다.
 

피난민 어른들이 걸어가는 길을 따라 큰길을 건너 언덕으로 한참을 쫓아 올라간 곳은 빼곡히 집들이 들어선 흑석동 어느 언덕배기였다. 그 많은 사람들이 마치 제집처럼 대문을 열고 들어가 짐을 내려놓고 벌써 이방 저 방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빈집들이 많아 우리들도 어느 집 방 한구석에 짐을 풀고 앉았는데 이제야 일행 다섯 명의 숫자가 다 있는지를 몇 번을 둘러보며 세어보았다. 누군가가 아궁이에 불을 지폈는지 한참 후에 방바닥에 온기가 올라온다. 낯선 잠자리지만 온종일 얼었던 몸이 풀리며 며칠 만에 모두가 정신없이 깊은 잠에 빠졌다.


이날 밤 배가 몹시 고팠는데 무엇인가를 먹고 허기를 채웠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나는 자다가 일어나 정신없이 변소를 찾다가 나는 윗목 한 구석에 아무렇게나 오줌을 갈겨 댔다. 아주 시원하게 싼 후에야 이곳이 방안 이였다는 생각에 정신이 좀 들었지만 이내 잠자리에 기어들었다. 다음날 아침 창피스럽기도 했지만 모두가 곤하게 잠든 틈이라 끝내 입을 다물고 등짐으로 지고 온 내 이불을 적시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도둑이 흠친 집에다 똥을 싸고 가면 안전하다고 하던데, 내가 쉬~하고 나온 것도 길조(吉兆)인가?


새벽 추위에 잠을 깨어 보니 함께 자던 피난민들이 이집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서둘고 있었다. 우리들도 쫓기듯 일어나 짐을 챙기고 그 집을 나섰다. 고갯길을 내려와 영등포를 거쳐 시흥으로 이어지는 낯익은 신작로(新作路)를 따라 걸었다. 우리들을 포성(砲聲)이 뒤쫓고 있었다.


 

< 사진 - 1951년 1월 서울북방에서 미군의 포화>


잊지 못할 할머니


한강을 건넜다는 안도감으로 조금은 긴장이 풀렸는지 추위가 온몸으로 덮쳐왔다. 잔설(殘雪)이 덮인 신작로와 과수원으로 보이는 언덕에 포탄이 떨어져 크고 깊게 파인 웅덩이들이 우리들의 갈 길을 재촉한다. 나이 드신 어른들은 이런 큰 연못만한 웅덩이는 삐이십구(B-29 중폭격기)에서 새우젓 독 만한 폭탄이 떨어져 패였다고들 했다.


한낮에 우리들은 지난 여름 묶었던 외가댁에 도착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간 안채에서도 아무 기척이 없다. 우리들이 사랑채 툇마루에 걸터앉아 시끄럽게 빈집임을 확인하려하자 안방에서 낯선 할머니가 "누구냐!" 하신다. 서울에서 온 아무개라고 인사를 드리자 서울 소식을 물으시는 외가댁 친척 되시는 ‘모사니 할머니’시다.
 

"외가댁 식구들은 모두 피난 갔는데 이 늙은이야 누가 잡아가겠어! 그래서 혼자 집을 지키고 있지. 다리도 끊어졌다는데 용케도 건너 와꾸나 배들 고프겠다. 찬은 없지만 밥을 먹어야지 춘 겨울에 어린것들이 먼 길을 떠나오다니 쯔쯔쯔..." 할머니의 따듯한 인정에 곧 구면이 되었다. 몸도 성치 않으신 할머니께서는 가마솥에 따뜻한 밥을 지어주셔서 저녁까지 잘 먹었다. 우물 물을 길어 손발도 씻고, 석유등잔에 불을 밝히고 아랫목 장판 바닥이 까맣게 누른 따끈한 안방에서 아이들은 할머니와 함께 잠을 청했지만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한밤중에 총을 들이댄 중공군(中共軍)


선잠을 자는데 몇 시 쯤 되었을까? 벽시계가 희미한 등잔불빛에 밤 12시는 넘었나보다.
별안간 기관총 퍼붓는 소리가 가까이서 여러 번을 볶아대더니 조용해 졌다. 깊이 잠들 리 없었다. 그래도 몇몇은 따듯한 온돌위에서 모처럼 마음 놓고 깊은 잠에 빠졌다. 감나무 밑에 장독대와 우물이 있는 뒷마당에서 알아듣지 못할 말소리가 들려왔다. 유엔군들 중 어느 나라 군인들인가? 앞마당에서도 같은 말소리가 들린다. 그들이 이 집을 에워싼 듯 했다.


작은 창문 창호지에 손바닥만 하게 붙인 유리를 통해 바라본 앞마당에 건장한 군인들이 총을 겨누고 서성이고 있다. 불안한 나는 앉아서 계속 밖을 훔쳐보고 있었을 때였다. 우리가 자고 있는 안방 문을 부서져라 열어 제치더니 M-1 소총보다 더 크게 생긴 총 뿌리를 내 가슴에 찌르면서 알아듣지 못할 말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번쩍 들고 자고 있는 열 살짜리 막내 동생 등에 올라앉았다.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모른다. 그들이 연발로 총을 쏘아대면 모두가 죽겠지만 막내만은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장 우리 모두를 사살할 것만 같았다. 자다가 엉거주춤 일어나 총을 드리댄 쪽을 보며 모두가 온몸이 굳어지며 새파랗게 질렸다.


허연 누비옷을 입고 붉은 별이 붙은 털모자를 눌러쓴 이들은 바로 인해전술(人海戰術)로 밀고 내려왔다는 그 무서운 중공군이 아닌가! 할머니와 어린 녀석 다섯을 확인한 이들은 마음이 놓였는지 웃으면서 겨누던 총을 거두고 벽을 가르키며 계속 무엇을 찾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이 먹을 것을 찾는 줄 알고 일어나서 부엌으로 데리고 가서 가마솥을 열면서 밥 한 그릇을 보였더니 머리를 저으며 아니란다.


나를 끌고 나갈 때는 불안했다, 이방 저 방을 끌고 다니더니 헌책을 찾아 종이 한 장을 찢어서 ‘풍년초’ 같은 잎담배를 말아 피우며 내게 환하게 웃는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던 것이다. 아까 벽을 가르킨 것은 벽지(壁紙)였고 “지~ 지~”라고 했었다. 바로 종이(紙)를 찾았던 것이다. 그토록 무섭다고 알려진 거구의 중공군은 어린 우리들에게는 적대감이 없는 어느 중국 호떡집 아저씨 같았다. 얼마 후 4,5명의 중공군은 대문 밖으로 나갔다.
 

해가 뜨면 중공군이 몰려 온 이 작은 동네가 바로 쌕쌔기(제트 戰爆機)의 공격목표가 된다는 생각에 우리들은 오밤중에 몰려오는 잠도 마다하고 모여앉아 의견을 주고받으며 당장 이곳을 빠져나갈 피난계획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서둘러 모두를 깨워 앉혔다.
"해가 뜨기 전에 이곳을 피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 공습으로 죽을 수도 있다. 내가 이곳 지형을 잘 아니까 저기 둑방을 넘고 십리이상은 죽을 힘을 다해 남쪽으로 뛰어야한다!"고 하니 모처럼 따듯한 방에서 푹 자고 싶었던 어린 녀석들 모두가 동이 트기 전에 이곳을 떠야 한다는데 뜻을 같이 했다. 


이 말을 옆에서 듣고 계셨던 할머니께서 한밤중에 밥을 지으셔서 깨소금을 넣은 주먹밥을 바가지에 잔뜩 넣고 보재기에 싸 주셨다. 쌀도 몇 바가지 주셨나 보다.
"조심들 해 가거라! 외삼촌댁이 계셨으면 좋았으련만 이것밖에 줄 것이 없구나. 지금 군인(중공군)들이 공회당(동 인민위원회=洞 사무소)에 몰려있단다. 저 군인들이 남쪽으로 가는 너희들을 보면 가만 안 있을꺼다. 공회당 쪽에서 안 보이게 조심해서 가야한다." 하셨다.


인정으로 보살펴 주신 고마우신 할머니께 작별의 인사를 드리고 공회당에서 안 보이는 돼지우리나 초가집 옆으로 허리를 굽히면서 있는 힘을 다해 둑방을 넘고 달렸다. 숨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새벽 추위 속에서 해가 솟을 때까지 뛰면서 걸으면서 남쪽으로 달려갔다.


<사진 - 미 해병 제1사단을 공격 중에 있는 중공군 제40군>

 

(8회)예고
*육군소위 부인들
*끔찍한 시체들
*수원역이 화염(火焰)에
*어린 노숙자(露宿者)들


                                                                                       Posted by 민병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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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크리스마스

1950년12월말 모두가 떠난 서울은 날이 갈수록 동네가 쥐죽은 듯 조용하다. 어쩌다 동네에서 만난 모르는 사람들에게 인사는 안하고 스치지만 반가웠다. 저분은 어떤 피치 못 할 사정으로 이날까지 피난을 못 가셨을까?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이런 뜻인가 보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는 날을 앞두고 힘들고 외로움을 함께 하는 낯선 이웃이라도 있다는 건 어린 녀석에게도 작은 위안인가 보다. 전쟁 중 한 겨울 생존의 기본인 식량과 땔감의 공급이 막막한 이제부터 텅 빈 서울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연로(年老)한 사람들이 외롭게 지켜야 했지만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창덕궁 고목(古木)들도 그 많던 철새들을 멀리 보내고 500년 고도(古都)를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 의연하게 지키고 있었다.

1950년12월 24일 밤 이었다. 나는 교인은 아니었지만 간간이 부처님과 예수님에 대한 얘기는 흘려들었다. 예년 같으면 크리스마스이브엔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새벽까지 집집을 돌아다니며 찬송가를 불렀지만 이날은 이처럼 조용할 수가 없었다. 아기 예수의 말구유도 일찌감치 남쪽으로 피난을 가셨나 보다. 가난하고 힘들고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태어나셨다는 아기 예수는 먼저 남쪽으로 떠나 간 그들에게 찾아 가셨을까? 아니 하느님은 진정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분이신가?

노환으로 거동조차 어려운 가엾은 우리 할머니를 보살펴 드려야 할 우리 가족들은 함께 살고 함께 죽기로 했지만 老할머니에게 찾아와 따뜻한 위로의 한마디라도 전해 줄 이웃조차 없다는 게 서러워 눈물을 흘렸지만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다는 하느님이 보낸 아기예수는 외로운 소년의 눈물 속에 함께했다고 믿어도 보았다. 아니면 정한수를 떠놓고 군대 간 아들의 안위를 조석으로 비시는 이웃 할머니가 정성스럽게 모시는 그런 절대자(絶對者)라도 상관이 없었다. 전쟁의 혼돈 속에선 구원(救援)의 선(善)도 외면하는가? 

1950년의 크리스마스 캐롤은 간간이 들려오는 포성으로 대신했다. "고요한 밤"은 아니었어도,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서울을 뜨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는 "거룩한 밤"이었을까? 철없는 어린 녀석은 뒤척이며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어떻게든 서울을 탈출해야 살 수 있다는 엉뚱한 결심을 다짐하고 어림도 없는 계획을 꾸미며 잠이 들었다. 
 

<사진 - LST(Landing ship for tank=전차 양육함)를 타려고 몰려든 함흥 피난민들>

암흑천지(暗黑天地)

지난 1948년5월14일에 북한은 남한에 송전(送電)을 중단해 남한 공장의 5%만이 가동된다고 했으니 가정용 전등은 초저녁에만 잠시 켤 수 있었다. 아예 가정에서는 촛불이나 석유 등잔을 밝히고 살았고 점포들에서는 카바이드 불로 밝혔다. 더구나 한국전쟁이 터지고 난 후 부터는 모두가 저녁을 일찌감치 먹고 자야했다. 어쩌다 한집에 있는 라디오로도 뉴스를 들을 수 없어서 누가 시작을 했는지 콩알만 한 게르마늄 광석을 구해 "광석 라디오"로 만들어 HLKA 서울방송국을 듣거나 '미국의 소리' 방송 뉴스를 들으며 전세(戰勢)가 궁굼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뉴스들이 입소문으로 퍼졌다.

모두가 피난길에 오른 1950년12월말 경에는 점포문도 모두 닫았다. 석유등잔도 붙일 수 없는 지경에서 뉴스조차 들을 수 없으니 눈앞도 마음도 암흑천지였다. 뉴스에 목마른 세상만큼 답답하고 어두운 사회는 없나보다. 버려진 사람(棄民)이란 이런 것인가? 이때부터 전세(戰勢)에 관한 뉴스와 판단은 포탄소리의 크고 작음이나, 미 공군 전투기들의 행방으로 오늘은 어디쯤 전선(戰線)이 형성되었음을 짐작 할 뿐이다. 저녁이면 높이 날라 집을 찾아 가는 이름 모를 겨울새 울음소리가 외로운 아이들의 겨울밤을 짙게 덮고 갔다.  

<사진 - 1950년12월28일 끊어진 한강철교, 그 옆이 임시로 만든 부교(浮橋)>

 

간절한 애원 "나는 살고 싶어!"

고난의 1950년을 불안한 나날로 보내고 아무 감동도 없는 1951년의 새해를 맞은 지도 며칠이 지나 "서울 철수의 날" 1월 4일의 해도 기울고 있었다. “1.4후퇴”라 했다. 오늘이 피난 갈 사람들은 모두 서울을 떠나는 마지막 날이다. 지난 주에 속으로만 세웠던 내 피난계획을 어른들에게 차마 말씀 못 드리고 혼자 앓으며 포탄소리에 선잠을 깨며 자며 뒤척였다. 

1월5일의 아침이 밝았다. 서울을 떠나야 할 사람들은 다 떠난 날이다. 한강의 부교(浮橋)도 벌써 폭파되었단다. 서울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절망을 안겨주는 소식이다. 떠날 생각조차 안한 사람들에게도 다가오는 운명처럼 희망의 문을 굳게 잠가버리는 것이었다.

앓아 누워계신 할머니를 뵈면 내가 꾸민 황당한 피난계획도 설명 할 말이 떨어지질 않는다. 상의할 분은 오직 내말을 들어 줄 만만한 어머니뿐이다. 오늘 떠나지 않으면 꼭 어떻게 될 것만 같은 초조함으로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었다. 당돌하게 말씀 드렸다.

"어머니 저 피난 갈게요. 피난가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라요. 동생들을 데리고 가겠어요!"
"老할머니가 누워계셔서 우리가 피난을 못 갔지만 이 추운 겨울에 네가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가다니? 너희들끼리만 보낼 수 없다!" 
"어머니! 나는요 다 계획이 있어! 어머니! 동생들 데리고 살아 올 자신 있어요! 어머니!“
이렇게 몇 번이고 떼를 쓰며 우겨댔다.

가당치도 않은 어린 자식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지만 나는 대청마루 앞 댓돌에 서서 이렇게 수없이 어머니께 허락을 호소하며 울면서 애원했다. 살고 싶다는 어린 자식의 애원 앞에 얼마나 괴로워 하셨을까? 눈물을 감추면서 어머니는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추위도 잊고 마루에 걸터앉은 철없는 녀석은 '정말 내가 해 낼 수 있을까'하면서 안방에 누워계신 老할머니의 힘없는 기침소리에 저렇게 불편하신 몸으로 얼마나 더 사실까? 하는 불길한 생각으로 가슴이 조여 오는 아픔으로 새삼 죄스러웠다. 그래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보살펴 드린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방으로 들어가신 어머니가 부르신다.
"이거 입어봐라 맞을지 모르겠다"
어머니께서는 이불 소창을 뜯어 솜을 두둑히 넣고 누벼서 우리 삼형제의 조끼를 짧은 시간에 만들어 입혀주셨다. 이렇게 따듯한 조끼는 처음 입어보았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했는데 어머니는 우리가 떠나는 길에 조끼를 만들어 주심으로 어린 아들의 피난길을 허락하셨다. 엄동설한에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음을 아파하시면서 피난 갈 보따리까지 싸 놓으셨다.

그 속에는 덮고 잘 이불과 겨울옷 몇 가지와 전구에 씌워 천을 덧대고 기운 양말 등이 전부였나 보다. 어머니가 안아주시는 순간 나는 가슴에 뜨거운 불길 같은 것이 왈칵 올라오며 어머니의 따듯한 사랑에 다시 눈물이 솟았다.
"동생들 데리고 무사히 다녀오너라! 먼저 시흥 외삼촌댁으로 찾아가거라!" 
"어머니! 이 조끼를 입으면 어떤 추위에도 견딜 수 있어! 꼭 살아 돌아올 거야! 나 자신 있어! 어머니!!"

포탄에 희생될 수도 있는 엄동설한에 정처 없이 길을 떠나는 어린자식들을 보내는 어머니의 아린 가슴을 나는 얼마나 헤아렸을까? 먼 길을 떠나는 자식들의 용기를 꺾을까 끝내 눈물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하셨지만 이슬이 맺힌 눈빛으로 대견스러운 당신 자식으로 자라 살아 돌아오는 날을 기원하셨으리라. 이후 많은 밤들을 뜬눈으로 지새웠을 어머니에겐 나는 불효자였다. 왜 나는 그때 "어머니 사랑해요!" 하는 말을 남기지 못했는지? 그때는 "사랑"이란 말을 쓸 줄도 모르는 숙맥(菽麥)이었나 보다.

“이 세상에 효자는 없다. 효자는 모두 어미가 잘한 것만 감싸서 효자”라고 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14살의 철없는 어린 아들의 엉뚱한 피난계획을 믿어주신 어머니의 괴로운 결단이 고마웠다. 하지만 동생들과 함께 살아 돌아 와야 할 책임감이 내 작은 몸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구체적인 대책도 없이 무작정 남쪽으로 가겠다는 것이 험한 세상을 모르는 내 어리석은 생각일지 모르지만, 언젠가 오늘의 결정을 포기해서 후회할 날이 온다면 그것은 내가 가고 싶은 내 길이 아니지 않은가?  

<사진 - 1950.12.18 대구역. “총알을 요리조리 잘 피해서 어예든동 살아오이라.” “어무이 걱정 꽉 붙들어 매이소. 어무이 아들 아잉기요. 내는 꼭 살아 돌아올 깁니다.”>



동행이 나타나다

우리 옆집에는 항렬(行列)로 형님 벌 되는 학자 한분이 계셨는데 해양학(海洋學)의 전문가로서 해방 후 방송국에서 오랫동안 해양에 대한 강의도 하시고, 해방 후 우리 해군 창설자의 한 분이신데 형수 되시는 분은 내 당숙모의 형님이 되시는 풍양 조씨(豊壤趙氏)시니 가깝고도 먼 집안인데 호칭이 어린 내게는 혼란스러웠다. 바로 옆집에 사셨는데 담을 터놓고 살아올 만큼 한 집안처럼 어려울 때 서로 상의하고 조석(朝夕)을 걱정하며 살아왔다.

그 날 아침부터 소란을 핀 내주장에 동조하셨는지 아들 ○基(16세) △基(13세) 둘과 피난을 함께 떠나라고 하신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피난 대열은 12살에서 15살까지의 남자 녀석 다섯 명이 되었다. 철없는 나는 내주장이 이웃에도 동의를 얻은데 좀 더 용기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먼 길을 떠나야하는 불안과 공포감은 조금은 줄어든 것 같았고 어머니도 조금은 마음에 안정을 찾으신 듯 했다. 모두들 피난 보따리를 둘러메고 어른들께 작별의 인사를 드리고 집을 나섰다. 아직도 한겨울의 칼바람이 매섭게 빰을 때리듯 스쳐가는 1951년 1월 5일. 해가 서산에 기울려 하고 있었으니 오후 4시경 쯤 되었을까?


(7회)예고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다
*흑석동에서 첫날밤을
*잊지 못할 할머니
*한밤중에 총을 들이댄 중공군(中共軍) 

                                                                                    - Posted by 민병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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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참전(參戰)


라디오와 신문에서는 자랑스럽게 국군의 평양입성을 대대적으로 전해왔다. 최선봉에 선 한국군 제6사단은 압록강 물을 수통에 떠다가 리승만 대통령에게 바쳤다는 "늬우스"도 있었다. 리승만 대통령이 숙원 하던 '북진통일'이 눈앞에 다가오는 듯 했다. 전쟁이 터진지 다섯달이 지났다. 미제(美製)의 대량살상무기를 퍼붓는 한국군과 UN군의 물량공세에 인민군은 물론 북한 땅에서는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편 8년간 항일투쟁(제2차 國共合作)과 4년간의 국공내전(國共內戰)후 1949년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했다. 같은 해 12월 장개석(蔣介石) 국민당정부는 타이완(臺灣)으로 국민당 정부를 옮겨야 했다.), 1950년 10월1일 중국 역사상 최초로 중국전역을 평정한 중공군(八路軍이 주축)으로서는 오랜 내전으로 지칠 대로 지쳐 북한을 도와줄 여력이 없다고 판단한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부는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을 예상치 못 했다.


인민군이 압록강까지 밀리자 김일성은 중공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중화인민공화국 주석(主席) 모택동은 10월19일에 4개 군단과 3개 포병사단 등 30만명의 중공군을 한국전에 참전하도록 마지막 명령을 내렸고, 만주에 중공군 50만명을 대기시켰다. 모택동(毛澤東)은 소련의 공중지원과 군사물자 원조를 조건으로 "중국인민지원군"이라는 명목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했다. 10월 하순에 한국군에 의해 중공군 포로가 잡혔으나 미군측은 신뢰하지 않았다고 했다. 11월6일에야 맥아더 총사령관은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을 뒤늦게 인지하고 공식 성명했다.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에 모두가 긴장했다.


당시 미소(美蘇)의 첨예한 냉정 속에서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 전체가 또 다시 세계대전(大戰)으로 휘말릴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극동의 작은 땅 한반도는 미소(美蘇)간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격돌하는 대리전을 치러야 하는 불행한 희생양이 아닐 수 없었다. 2차 대전 후 평화로운 세상을 기대하던 우리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3.8선이 그어진 것처럼, 다시 한번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약소국(弱小國) 한국의 비애(悲哀)인 것이다.


<사진 - 모택동(毛澤東) 중공 주석(主席)과 주덕(朱德)중공군총사령이 한국전에 참전할 중국인민지원군 검열(사열)을 하고 있다.>


<사진 - 한국전 참전 중공군사령관 팽덕회(彭德懷)와 김일성>


 <사진 - 압록강을 넘을 준비하고 있는 30만 중공군 / 1950년 10월 김일성이 압록강까지 쫓기자 중공군 지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중국은 팽덕회(彭德懷)를 사령관으로 30만 대군을 보냈다.>


전황(戰況)은 다시 역전


제공권(制空權)을 완전 장악한 미 공군 중폭격기의 융단폭격과 전폭기의 로켓포공격 기총소사 네이팜탄의 위력과 UN 16개 지상군의 막강한 화력은 누구나 천하무적으로 알았지만 12월에 들어서자 요란한 승전보(勝戰報)에 뒤섞여 들려오는 전황은 엇갈리고 있었다. 
곧 백두산에 태극기를 꼽을 것 같더니 중공군에게 밀린다는 소식에 국민들에게는 또 다시 불안감이 밀려왔고, 여유 있는 사람들은 소문 없이 남쪽으로 피난을 간다고들 했다. 지난 여름 숱한 고생을 하고 겨우 살아남은 우리가족들이 또 다시 전쟁의 화마(火魔)속으로 내몰려야 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 다가오는 악몽 같은 검은 그림자가 가슴을 조여 왔다. 이웃집들이 한집씩 남쪽으로 떠나기 시작했고, 가까운 친척들이 인사도 없이 대구로 부산으로 벌써 떠났단다. 어린 마음에 찾아온 것은 섭섭함 뿐만이 아니라 각박하고 무서워진 세상인심이다.


노환(老患)으로 거동조차 불편한 할머니를 엄동설한에 누가 어디로 어떻게 모실까? 가엾은 우리 할머니! 한산이씨(韓山李氏範字 稙字) 명문에서 태어나 지필묵(紙筆墨)을 언제나 가까이 하셨던 할머니. 봄이면 앞뒤마당에 꽃나무를 모종하시고 정향나무(丁香=라일락)의 향기를 즐겨 하시던 할머니. 한말(韓末) 때 불란서 공사의 귀부인으로 ‘파리’에도 오랫동안 계셨던 분이셨다. 어딜 가시나 당당하셨던 멋쟁이 할머니가 이렇게 안전한 피난대책도 없이 전화(戰火)에 휘몰려 초라한 최후를 맞을 것인가? 손자들을 가장 사랑하셨던 할머니! 왜정치하(倭政治下)와 해방 후 혼란 속에서 이재(理財)에 밝지 못해 가계(家計)는 기울었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냉엄한 현실에 적응치 못한 가계(家系)였다. 앞뒤 사정을 짐작한 어린 가슴에도 가엾은 할머니에 대한 연민의 정이 아프게 메어왔다. 


<사진 - 1951년 미 공군 중폭격기가 북녘에 폭탄을 퍼붓고 있다.>



<사진 - 1950년 12월9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혹한 속에 후퇴하는 유엔군>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


중공군은 한국전쟁에 30만명의 인민의용군을 투입했지만 누가 보아도 미 공군이 제공권(制空權)을 완전히 장악하고 UN의 이름으로 참전한 16개국 지상군의 무제한한 화력(火力) 앞에는 견딜 수 없어 머지않아 리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미 극동군 총사령관이 주장했던 북진통일(北進統一)의 날이 올 것을 아무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12월에 들어서면서 최전선의 날씨는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면서 서부전선은 압록강과 동부전선은 혜산진(惠山鎭-우리나라 최고의 蓋馬高原 甲山)까지 밀고 올라간 최전선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희비(喜悲)가 엇갈렸고, 신뢰를 잃은 정부 발표에 또 다시 서울시민들은 불안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해 할 수 없었지만 중공군에게 밀리고 있었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최대한 활용했다는 중공군은, 미 공군의 융단폭격과 전투기들의 폭탄 세례를 피하는 전략이었겠지만, 낮에는 쉬고, 밤만 되면 침투 잠복해서 북과 꽹가리를 치고 날라리(피리)와 나팔을 불면서 떼 지어 몰려오는 인해전술로 기습 돌진하며 중공군의 사기를 진작하는 고전적 전술을 원용했다고 했다.
거기에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혹한에 견디지 못하고, 수면부족의 미 지상군들의 home sick을 최대한 자극하여 사기를 저하시키는 기상천외의 심리전술 앞에 보급로가 멀어지고 끊기며, 너무 앞서나가 포위까지 당하자 최신병기로 무장된 UN군(한국군과 미군이 중심이지만)의 과학적 최신 전략전술도 중공군의 어눌한 고전적 심리전술 앞에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속수무책으로 다시 퇴로(退路)를 찾아야 했다.


당시에 내가 듣기로는 중공군들은 모두가 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모두가 ‘방망이 수류탄‘은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전사자가 생기면 총을 지급받지 못한 중공군이 그 총을 받아서 싸웠다고 할 만큼 소총의 수도 모자랐다고 하지만 중공군의 인해전술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고 했다. 한밤중에 기습적으로 엄청난 숫자로 몰려와서 사살하면 또 그만한 숫자가 계속 물밀듯이 몰려오는 인해전술에는 당할 수가 없다고 했다. 혹한 속 전쟁의 경험이 없고 사기가 저하된 미 지상군들은 ‘작전상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를 하게 되자 맥아더 미 극동군 총사령관은 만주폭격과 중국연안봉쇄, 대만의 국부군(國府軍=蔣介石 군대)의 사용 등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트루먼 대통령과의 의견대립으로 1951년 4월 맥아더는 미 극동군총사령관의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귀국 후에는 레밍턴 랜드 사장으로 취임하였고, 정치적으로는 공화당 보수파(保守派)에 속하여 공화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적도 있다.


‘노병(老兵)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한국 사람들은 맥아더의 주장에 동조했지만, 극동에서 또 다시 세계대전의 빌미를 막았다는 트루먼 대통령의 판단이 지혜로웠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사진 - 1951년 초 눈 덮인 강원도 횡성지역에서 진군 나팔소리에 돌진하는 중공군 병사들>



'루머'


1950년12월의 서울은 몹시 추웠다. 탐스러운 함박눈이 밤새도록 내리면 아이들 무릎 밑까지 빠졌다. 지붕 끝 처마마다 길게 고드름이 매달리면 그것을 따서 칼싸움도 하던 동네 악동 녀석들이 보이질 않는다. 모두들 남으로 피난을 갔단다. 동네 집들이 한두 집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지난 6월에 겪은 고통들을 다시 되풀이 할 수는 없었을 게다. 당장 눈앞에 불똥이 튀지 않는 한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외로운 것은 없나보다.
  

12월부터 서울에는 '루머'가 퍼졌다.
"중공군이 처 들어오면 부녀자들을 모조리 강간을 당한다"
"청장년들은 의용군으로 전선으로 끌려가거나 아니면 총살 당한다"
"군인과 경찰가족들은 살아남지 못한다"

 
정부는 지난 6월에 서울시민의 90%이상이 서울에 남아있어서 인민군에게 부역을 했거나 인민군으로 끌려갔거나 납치를 당한 일을 후회했다. 그 후에 들은 얘기지만 국군의 병력 보충을 위해서도 전략적으로 90%의 서울시민들을 피난시키는데 '루머'는 성공했다고 한다.


1.4후퇴 후 중공군이 서울에 들어와서 서울시민들이 거의 피난 간 것을 보고는 지난 여름 인민군들이 서울을 점령하고 어떻게 했기에 이토록 인심을 잃었느냐고 했다고 전한다. 아마도 그것은 해방 후 좌우(左右)로 갈라진 정치적 단체들의 극한적 대립과 투쟁 속에서 쌓여진 앙금들이 한국전쟁을 겪으며 노골적으로 표출된 악감(惡感)들이 서로가 “죽여도 된다”는데 까지 스스로 정당성(?)을 갖지 않았을까? 씻을 수 없는 우리 민족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사진 - 언제 떠날지 모르는 기차, 석탄을 실었던 무개차량에도 남행기차라면 타야했다.>

 

1.4 후퇴


아이들은 잘 몰랐지만 1951년1월4일은 서울을 완전히 철수하는 날로 정한 날이었다.
1월 4일전에 서울을 떠나야 산다고 했다. 12월말 서울의 기차역들은 피난민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이고 아비규환(阿鼻叫喚)이다. 질서와 통제란 말은 혼란과 무질서로 바뀌었다. 이들 중 짐 보따리를 잃은 사람은 약과이고, 군중 속에서 어린아이의 손을 놓쳐 찾고 있는 엄마, 엄마를 잃고 엄마를 찾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추운 겨울 공중에 얼어붙곤 할 뿐 날씨보다 더 차가운 각박한 인심 속에서 모두가 내 가족 내 새끼 챙기는데 정신을 팔 뿐인데 어찌하랴?


트럭이란 트럭은 전부 남행이고, 힘없는 더 많은 사람들은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남으로 남으로 걸어 갈수 밖에 없었다. 정부도 누구에게 도움을 주지도, 정부에 바랄수도 없는 버려진 서울시민들은 스스로 목숨을 건져야 하는 자구책만이 있을 뿐이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세(戰勢)를 지난 6개월간의 체험으로 나름대로 숙지한 서울시민들은 또 다시 서울이 피아간(彼我間)의 최전선으로 대치되는 서울이 포화의 불구덩이가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살아남기를 바랄 수 없는 생사의 기로에서 객사(客死)를 각오하고 혹독한 추위 속에 뒤늦게 남행의 길을 무작정 떠날 수밖에 없는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사진 - 북한에서 탈출하는 피난민들>


(6회)예고
*거룩한 크리스마스
*암흑천지(暗黑天地)
*간절한 애원 “나는 살고 싶어!”
*어머니의 따듯한 사랑
*동행이 나타나다

                                                                                 - Posted by 민병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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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9.28 서울수복

서울을 점령한지 불과 한 달 안에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대구(大邱) 북방 7km까지 남진한 인민군은 8월초 낙동강 연안에서 한국군과 미군들과의 대치하며 남한 점령의 최후 일전(一戰)을 겨루고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다부동(多富洞=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전투는 인민군이 부산까지 밀고 내려가 남한을 완전 점령하느냐? 이를 격퇴하느냐? 하는 국운을 건 싸움이었다. 예컨대 낙동강 서쪽 구미(龜尾) 약목(若木) 간 5.6km * 12km(=67.2 평방km) 안에 미 공군의 B-29 중폭격기 98대가 3,234(=960톤)개의 폭탄을 26분 동안 쏟아 붓는 융단폭격을 했다. 낙동강 연안전투에서 인민군 사망자 6,867명, 다부동 전투에서 사망자 5,690명 등 8월 한 달 동안 12,000명이 사망했고, 한국군 2016명 미군 1,282명 경찰 111명 등 3,409명이 사망할 만큼 치열했는데 이곳에서 한국군 30~40%의 병력 손실이 있었고 이 전투에 신병(新兵)보충으로 참가한 한국군의 많은 수는 급박한 상황에서 일보(日報)에도 기록하지 못한 병사들이었다. 그들이 오늘날 ‘무명용사’로 국립묘지에 묻힌 청장년들이다.

이처럼 낙동강 전투에 미군의 본격적인 전투참여와 폭탄의 물량공세로 피아가 밀고 밀리는 교착전이 계속되고 있을 즈음 유엔군 측은 인민군들을 그들의 후방에서 공격하여 보급로를 차단하고 병력과 장비를 섬멸한다는 계획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미 극동군총사령관 맥아더 원수(5성장군)의 계획이 인천바다의 조수간만(潮水干滿)의 차와 항공지원의 항속거리밖에 있다는 이유로 성공하기 힘들다는 미군 수뇌부의 반대에 부딪치기도 했으나
“북한군 지휘관들도 당신들과 같이 훌륭한 장군들이다. 여러분이 인천상륙작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북한장군들도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인천 방비(防備)가 소홀 할 것이다. 이 허점을 친다면 성공할 수 있다. 사실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이렇게 설득한 맥아더는 역시 전략가이고 명장이고 전쟁의 영웅이었다.


유엔군 제7합동기동부대의 항공모함을 포함 미주리함과 순양함, 구축함 등 261척의 함정에 미 해병 1개 사단, 한국해병 제1연대, 미 육군 7사단, 한국육군 17연대로 구성된 총 병력 75,000명으로 9월15일 첫 작전으로 수도 서울의 점령을 포괄하는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었다.


<사진 - 함상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



패주하는 인민군들이 농사꾼 복장으로 갈아입고 관악산 쪽으로 들고 튄지 몇 분 후였다.
뚝방 앞 누렇게 벼가 익어가는 논으로 허리도 굽히지 않고 총을 든 미군들이 동내로 몰려들어온다. 껌을 씹기도 하고 담배(chewing tobacco)를 씹으며 누런 침을 뺏으면서 긴장한 모습으로 총을 겨누며 오고 있었다. 내가 밖으로 나가 미군들을 맞았으나 그들은 관악산 쪽으로 달아나는 인민군들을 뒤쫓고 있었다. 최전선이 서울 쪽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인천에 맥아더 장군이 해병대를 이끌고 상륙했단다. 이날부터 밤새도록 조명탄으로 밤을 밝히고 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지축을 뒤흔들더니 9월28일 서울을 되찾았다.


다음날부터 국도에는 연일 지프차 탱크 수륙양용장갑차 야포 지엠씨 트럭으로 군인들을 태우고 비포장 국도에 먼지를 날리며 북으로 달리고 있었다. 우리도 빨리 서울 집으로 가자고 했지만 한강을 건너는 도강증(渡江證)이 없으면 건널 수 없다고 한다. 며칠이 지나 상류 쪽으로 한강을 건넜다. 급하게 생사를 확인할 가족들의 안부가 화급했다.


다동(茶洞)에 사는 큰누나 집으로 찾아갔다. 이게 웬일인가! 집 전체가 폭격을 맞아 거친 평지로 폭삭 가라앉았다. "여기가 지하 방공호(防空壕) 자리다. 이 밑에서 죽었을 꺼다! 여기를 파보자!“ 돌과 토막 난 나무기둥 벽돌을 들어 올리면서 시체라도 찾자고 했다. 이때 앞집 아주머니가 찾아와
"윤씨 댁은 수유리 화계사(華溪寺)로 피난 가셔서 안전하다"고 했다.


한편 관훈동 고모 댁에 피신중인 둘째 누이에게서도 기별이 왔다. 바로 옆집에 떨어진 박격포탄 파편이 창문을 뚫고 날라와 베고 자던 베개에 꽃혔으나 기적적으로 다친 데는 없었다.
머리와 불과 몇cm 옆에 파편이 박혔단다. 착한 둘째 누나를 하늘은 기적으로 살려 주셨다. 다음날 아침 집안 이곳저곳에 박히거나 떨어진 파편조각을 바께스로 잔뜩 담았을 정도로 위험했단다. 유리창은 모조리 깨지고, 지붕 위 기와장이 날라 가고 깨졌는데 관훈동 고모 댁 가족 모두 무사했다.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 했다. 이렇게 우리 가족 모두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사진 - 월미도에서 사살 당한 인민군 시체들>


 
전쟁의 참상

지난 7월에 떠날 때 본 서울이 아니다. 서울의 많은 건물들이 내려앉았다. 길가에 널려 있는 건 끔찍하게 훼손된 시체들이다. 사람 썩는 냄새가 역겹게 코를 찌르고 타다 남은 건물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갈아 앉은 건물에서 통곡하는 가족들! 부녀자들! 아이들! 서울의 9월은 지옥의 한 모퉁이다. 지옥(地獄)은 하느님이 사람을 선별해 보내는 곳이 아니다. 인간 의 욕심이 스스로의 울타리를 치고 만들어 낸 곳이 아닌가! 생각이 다르다는 핑계를 앞 세워 야욕을 숨기며 살육을 정당화 하는 전쟁! 과연 한국전쟁은 예외인가? 


아마도 서울시내에서는 격렬한 시가전(市街戰)이 있었던 것이다.
지난 7월경 인민군들은 시가전을 예상을 했는지 주택가 골목입구마다 페인트로 "막다른 골목"을 표시했던 생각이 난다. 서울근교 산에서는 간혹 총성이 들렸는데 퇴각하는 인민군 패잔병과의 교전이었을 게다. 포성이 점점 멀리 들리는 게 쾌조의 북진(北進)인 것이다.


초저녁에 도착한 동내는 그동안 모두가 어디 숨었다 나타났는지 골목마다 조금은 활기가 있다. 군 적령기 동원의 대상자들은 벽장이나 지하에 몇 달을 숨었다 나와서 얼굴은 창백하고 수염과 머리는 자랄 대로 자라있었다. 하지만 납치되었거나 의용군에 끌려간 사람들의 가족들은 가슴은 어떠했을까?


동내 인민위원장의 동생이 잡혔다. 양팔이 뒤로 묶이고 가슴과 등에 "김일성 아들" "스탈린 손자" 라고 써 붙이고 동내 방내로 종을 돌리고 있었다. 수 십명이 그 뒤를 따랐고, 몇몇 사람은 그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질 발길질을 하며 따귀도 후려치며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그중 한사람은 오랫동안 모군일을 하는 건장한 아저씨인데 9월27일 밤 인민위원회에 잡혀가 구름다리 앞에서 여러 사람을 가로 세워놓고 한사람씩 총살을 했단다. 자기 차례가 왔을 때 총을 쏘는 순간 쓸어졌는데 아픈데도 없어 총알이 피해갔다고 생각해서 죽은 척 하다가 그들이 원남동 쪽으로 달아난 후에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 왔다고 했다. 이런 아저씨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양팔이 묶인 사람은 성난 군중 속에서 죽음을 각오한 사람처럼 말없이 이런 수모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90여일 만에 전세(戰勢)가 바뀔 줄은 아무도 예상을 못 했다. 어느 쪽이던 패자(敗者)는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때마침 헌병이 나타나서 짚차에 실고 갔으나 그 후 소식은 모르겠지만 혼란한 전쟁 중이라 살아남기는 어려웠겠다. 조석(朝夕)으로 인사하며 지내던 이웃 간에 이토록 살벌한 원수지간으로 바뀐 이런 세상이 내겐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할머니께서는 잠자리만 잡아도 “살려고 태어난 미물이지만 죽여서는 안 된다”고 노상 내게 말씀하셨는데, 그가 누구든 사람의 귀중한 목숨을 사람의 손으로 죽어야 하는 이 (思想)이란 게 뭔가? 잡은 사람도 잡힌 사람도 왜 죽여야 했으며, 왜 죽어야 했는지를 아이들과 그 후손들에게 어떻게 알아듣게 설명할 수 있을까?


참으로 기이한 일은 두어 달 집을 비운 사이에 우리 집 기와지붕 위 여기저기에 두자높이의 풀이 기괴하게 자라고 있었다. 사람이 살고 있을 때는 없었던 일인데... 사람의 몸에서 뿜어내는 기(氣)가 있나 보다. 몇몇 알려진 이웃 인민위원회 간부들의 집들은 흉가(凶家)처럼 비어 있었다. 그중 한집은 박격포탄에 명중돼 폭삭 내려앉았다. 바로 이 집이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일본 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 한다‘는 라디오 생방송을 나와 함께 듣던 친구네 집이기도 하다. 그때 해방의 순간을 맞은 것이다. 해방의 깊은 뜻도 모른 채. 


<사진 - 1950년9월28일 서울시 서대문구 아현동에서의 시가전(市街戰)>

<사진 - 폐허가 되어버린 서울 서울시가와 피난민들(1950년 9월28일 서울수복당시)>



 전후에 달라진 사람들

전쟁이 일어난 지 불과 석 달 만에 서울 사람들은 많이 변하고 있었다. 전쟁을 겪으면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는가보다. 전통적으로 서울 사람들은 배가 골아도 장사를 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전 까지도 서울 사람들은 체면을 우선하고 사회적으로 층하(層下)를 두며 마음 한구석에서 사농공상(士農工商) 순으로만 세상을 나누는 무능한 사람들이었을까?


내가 사는 원서동은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더 많았지만 그 동네에 가게라고는 단 두 곳 밖에 없었고, 싸전도 한두 군데뿐이고 계동(桂洞)에 가야 육고기간, 생선전, 청요리 집, 아이스크림 집, 한약방(桂山한의원-한국 최초의 한약방)등만이 있을 만큼 점포들은 드물었다.


몇 달 사이에 격은 생활고 때문인가? 골목 어귀마다 노점들이 줄을 섰다. 지금의 낙원시장은 그때 운현궁 앞이나 천도교 앞에 늘어선 노점상이 낙원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몸빼를 입고 허리에 전대(錢帶)를 차고 열심히 장사하는 것을 서울의 여염집 부녀들은 놀라움으로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북에서 내려와 극성맞게(?) 장사를 한 사람들은 당시에는 종로4가를 중심으로 있던 "배우개시장"을 동대문까지 늘려 오늘의 동대문시장을 형성하는데 주역이 되었고, 남대문시장 도깨비시장 등 확장에도 같은 역할을 했다. 맨몸으로 내려와 갖은 고생을 하며 먹고 살며 아이들 가르치며 악착하게 살아야 했던 북한 피난민 아줌마들을 ‘또순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 이었고, 몫 돈을 마련하는 계(契)모임도 이때부터 번지기 시작했다. 얌전(?)했던 서울 부녀자들이 체면 따위는 벗어버리고 돈 버는 방법을 조금씩 이들에게서 배웠던 것 같다.


전쟁발발 얼마 후 얘기이긴 하지만 어찌 보면 한국전쟁의 발발을 기점으로 그동안 남아 있던 농경문화권의 윤리나 가치관의 허상들을 급격하게 마감하는 계기가 되었던 게 아닌지? 사람들의 마음은 피폐해 지면서도...


청계천 수표교(水標橋) 밑은 해방 후까지 물고기가 살만큼 맑았는데 물자가 귀하던 당시 뒤로 흘러나온 미 군복을 검은색으로 염색하거나 회색으로 탈색해 입을 수 있도록 도라무통(Drum 통)을 半동강을 내서 솥으로 쓰며 군복을 염색이나 탈색을 해 팔았는데 그 본거지가 청계천 이였고 이곳 역시 생활고에 시달린 북한 피난민들의 생활 터전 이였다. 청계천 변에 하꼬방(왜말-판자집)을 짓고 살아 생활 오수(汚水)와 염색물감을 흘려보내 이때부터 청계천이 심하게 오염되기 시작했다.


그 후 얘기지만 당시 남대문시장에는 한 시간 안에 1개 사단을 완전무장 할 만큼 미군 군복을 비롯한 군수 물자가 쌓여있었다고 하는 농담도 했다. 지금 남대문시장 쪽에 많은 천막 파는 집이나 등산용품 파는 집들의 원조(?)가 그렇게 자리 잡았다. 


사람이 무섭다

9.28 서울수복. 1950년9월28일 3개월 만에 서울이 수복되었다. 흩어졌던 사람들이 동내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인공(人共)이 물러간 자리에 청년들이 모여 동내마다 치안대(治安隊)를 결성하고 밤이면 딱딱이를 치면서 야경(夜警)을 돌고, 인공 3개월 동안에 인공에 부역한 사람들을 찾아내는 일이 우선 이였나 보다. “빨갱이 들를 찾아 잡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인민군보다 동내 빨갱이가 더 못된 짓을 했다!"
"저놈은 회색분자야!"

빨갱이도 여러 층으로 나눈다고 했다. 
‘수박 빨갱이’-겉은 파랗지만 속은 진짜 빨갱이란다.
"사과 빨갱이"-겉은 빨갛지만 속은 아니야! 많은 증인들이 있어 사과 빨갱이는 풀려났다. “토마토 빨갱이”-오랫동안 들어 내놓고 활동한 겉도 속도 빨간 남노당원을 말한다. 
하지만 사상전쟁의 혼란 속에서 "저놈 빨갱이다!"하면 쉽게 풀려날 도리가 없었을 게다. 월북한 사람도, 납북된 사람도 많았고, 중간지대에 있던 억울한 죽음도 많았을 게다.


서울수복 후 우리 동내에서는 젊은 사람들은 창덕궁 안에서 죽은 시체들을 묻어주는 일에 한동안 동원되었다. 인공치하 동안 그곳에 인민군 특수부대(?)가 자리 잡고 반동분자들을 잡아들여 심문하고 사살하기도 해서 창덕궁 북쪽 숲속에 수 십 구의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삼복을 지난 탓일까? 더러는 알아 볼 수도 없는 시신들도 많았고, 떠난 지 얼마 안 된 시신도 있었는데 마스크도 없이 시신을 수습하는 사람들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송장 썩는 냄새였다. 세상에서 가장 참기 힘든 냄새는 야채 쓰레기도 죽은 동물도 아닌 시신의 부패인 것 같다. 누군가가 “세상에서 가장 심한 악취(惡臭)는 사람 썩는 냄새인 것은,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가장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맞는 얘기 같았다.              

누가 자기 쪽에 협조하지 않았거나 나와 생각이 달랐다는 이유로 동족의 손에 살육 당해야 한다면 어느 한쪽의 씨가 마르기 전까지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이런 야만적 행위가 계속되어야 하는지? 사상이란 게 뭣인지도 몰랐지만 무지한 것은 사상을 앞세운 무서운 인간들이다.


<사진 - 대전에서 희생된 민간인들>

<사진 - 1953년 남대문시장 안 풍경>



철새들의 수난(受難)

낮에 본 끔찍한 시신들이 얼른거려 쉽게 잠을 잘 수가 없었지만 철없는 녀석들은 그런 전쟁의 뒷얘기들이 화제일수 밖에 없었다. 이웃의 악동들 중 보이지 않는 몇몇은 인민위원회에서 일을 보았던 부모들을 따라 월북을 했거나 어디론가 잠적했다고 했다.

"xx 아버지는 사상가(思想家)"란다. "xx 삼촌은 밤이면 담벼락에 붉은 페인트로 김일성 장군...이라고 썼는데 월북 했데" 알듯 모를듯한 생소한 '사상가'란 말들을 쉽게 했지만 불과 석 달 만에 함께 뒹굴며 가깝게 지내든 동내 친구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두고두고 서운했다. 옛날 전쟁처럼 땅 따먹기 싸움이 아닌 사상의 전쟁은 이처럼 어린 친구들도 갈라놓았다. 생각이 다르면 남이 되고. 죽이고 죽을 수도 있는 세상이 되기도 하는 세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늦가을의 을씨년스러운 날씨는 걸친 옷이 시원치 않아서인지 야윈 팔뚝에 소름이 돋기도 했지만, 창덕궁 돌담 넘어 고목 위에 수없이 날라드는 왜가리나 황새 떼들의 멋진 비상(飛翔)과 사뿐한 안착을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지켜보는 것이 낙이였고 위안이기도 했다. 외롭고 심심할 땐 창덕궁의 날라든 철새 떼를 지켜보는 것이 오랜 즐거움이었는데 창덕궁 안에 인민군들이 들어와서는 총질을 하고 그 화약 냄새에 황새와 왜가리 수가 많이 줄었다고 했다.

내가 어려서 바라보고 좋아했던 세 가지는 별(星)과 눈(雪)과 철새(鳥)들이었다. 모두 하늘에 뜨거나 내리거나 나는 것이다. 그것이 어려서부터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고 꿈이고 친구 같은 것 이였다. 별 없는 밤하늘, 눈 안 내리는 겨울, 철새가 찾아오지 않는 숲은 아이들이 꿈꾸며 사는 평화로운 세상이 아니지 않은가?

귀하게나 볼 수 있는 별똥의 신비로운 비행대신 표적을 찾는 예광탄(曳光彈)이 날라 가는 밤하늘과, 밤새도록 쌓인 눈밭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발자국이 아닌 잔인한 살육의 붉은 흔적들이, 전쟁의 총소리로 철새들도 달아난 고목위에 빈 새집들을 말없이 바라보는 아이들에게 주는 상실감을 어른들은 알기나 했을까?


<사진 - 지금은 멸종 위기의 황새지만, 50년까지는 수 백 마리가 창덕궁에 날아들었다.>

<사진 - 왜가리 무리>



(5회)예고

*중공군의 참전
*전황(戰況)은 다시 역전(逆轉)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
*“루머”
*1.4후퇴

                                                                              - Posted by 민병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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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신년특집으로 민병설 연구위원님의 한국전쟁 체험기가 연재됩니다. 한국전쟁을 격은 세대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가운데 한국전쟁을 격은 세대가 그때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매우 가치있고 귀중한 작업이라 생각됩니다. -(편집자 주)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서울시민들


한강다리가 끊기니 육로나 기차 길이 막혀 큰길에는 어쩌다 인민군의 차량들이 오갈뿐 인공치하(人共治下)의 서울은 지방에서 올라와야 할 식량수송로가 차단되었다.
전쟁이 터지고 며칠이 지나자 대부분의 집에서는 식량이 떨어지기 시작해 조금 남은 쌀이나 보리쌀로 끼니수를 줄이거나 죽을 쑤어먹었으나 더 지나자 바닥이 나니 싸전이나 가게들은 문을 닫은 곳이 많아졌다. 이때 북한 화폐도 함께 사용하긴 했는데 북한 화폐를 신기한듯 몇 번 보기는 했어도 사용한 적은 없었다. 남쪽 화폐와 1:1로 사용한 것으로 기억된다.
먹을 것이 귀하니 사람들은 뚝섬같은 채소밭을 찾아가 채소를 사다가 쌀이나 보리 혹은 밀가루를 조금 넣고 죽도 아닌 '풀떼기'를 쑤어 먹기도 했다. 풀떼기란 말도 처음 들었다.  


어린 나이지만 난리 통이라 배고픈 티도 못 내고 함께 견디며 참아왔지만 한참 먹을 나이에 먹이지 못하는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지금도 어쩌다 꿈에서 만나 뵈면 뜨겁게 가슴으로 울면서 잠을 깨곤 한다. 형제들이 많아 넉넉히 차례가 오지 못했지만 속이 안 좋다고 한 수저라도 내게 더 덜어주셨던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철없는 불효 자식에게는 늦게서야 오래도록 지울 수 없는 아픔으로 밀려오곤 했다.  


이렇게 연명하는 것도 한계에 달해 외가댁이 있는 시흥 쪽으로 식량을 구하러 여러번 아버지와 함께 나섰다. 한강나루에서 나룻배를 타고 노량진을 거쳐 영등포를 지나 시흥으로 가는 신작로(新作路)를 따라 두어시간 걸으면 마장교(馬場橋) 바로 직전 지금의 신대방동에 도착한다. 외삼촌은 피난 가셨고 삼촌댁과 우리 또래 아이들뿐인데 그곳에도 식량은 바닥이 나기 직전이다. 밭에 나가 챙길 수 있는 채소를 뽑아오거나, 멀리 떨어진 농촌을 찾아가 옷가지를 주고 보리쌀이라도 바꿔 오는 날은 행운이다.


해방 전후에 생필품은 절대 부족이었다. 예를 들면 선생님이 자기반 학생들을 세워놓고 운동화나 학생복을 검사해서 가장 낡은 옷이나 운동화 신은 학생 10명 정도를 찾아내서 그 10명에게만 상품교환권을 주면 그 표를 가지고 가야만 지정된 곳에서 운동화나 학생복을 살 정도로 생필품이 귀했다. 그러니 옷가지는 말 할 것도 없었다. 광목(廣木-무명으로 짠, 폭 넓은 표백도 안 된 천)이나 세탁비누조차 배급을 받았을 정도니까 시골은 그나마 더 귀했나 보다. 물론 돈 많은 사람들은 그때도 남대문시장 같은 야미시장(暗市場의 왜말)에서 일제 밀수품까지 모든 것을 살수는 있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다


이렇게 먹을 것을 찾아 가까운 시골을 한번 다녀오면 한주일 정도는 겨우 견딘다.
하지만 배를 채우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하는 줄은 미처 몰랐다. 용산쪽 한강 나루터를 가자면 번번이 인민군이 군수물자를 나루까지 옮겨 달라고 하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한강다리 위에는 언제나 미 공군 정찰기가 떠서 아래를 내려다보거나 사진을 촬영하는지 온종일 한강 상공을 맴돌고 있었다.


하루는 노량진에서 먹거리를 한짐 지고 나룻배를 타려는데 인민군이 "동무 같이 탑시다!"한다. 뉘라서 거절하랴! 인민군 두 명과 함께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오는데 용산쪽 나루에 거의 도착했을 때 언제 우리 탄 배를 찾아냈는지 하늘에서 세이버 제트기(F-84)가 우리가 탄 나룻배를 향해 무섭게 내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인민군 둘과 함께 탓으니 먹이 깜을 찾은 독수리처럼 거의 수직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하강하면서 기관포를 "탕 탕 탕 탕..." 사정없이 난사하는데 순간 죽었구나 하면서도 모래사장으로 뛰어내려 엎어졌는데 아마도 2,30발은 퍼붓는 것 같았지만 뱃사공까지 5명 모두는 무사했다. 살았구나! 모두 살았다! 혼이 빠져 한참을 엎어진 채로 있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아버지도 일어나셨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한순간이다. 그동안 길에서 본 많은 시체중 하나가 될 뻔 했다. 하늘이 도우신 구사일생(九死一生)이다. 우리들을 쫓던 제트기도 멀리 날라 가고 있었다. 목숨을 잡히고 식량을 구해 와야 하나?  식량 보따리를 찾으려 뱃전으로 가면서 생각했다. 어린 녀석을 보고는 명중시킬 수가 없었는지? 아니면 서툰 조종사였나?! 목숨을 살려 준 조종사에게 한국전에서 임무를 끝내고 무사히 귀국했으면 했고, 나룻배에 함께 탓던 인민군 병사도 어느 집 귀한 자식이니 부모를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했다.


가끔은 내려 꼽는 제트기를 향해 따발총으로 응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초라한 대응이었다. 인민군들도 보급로를 위해 한강수면 밑으로 밤새도록 시민들을 동원해 부교(浮橋)를 설치하고 보급품을 나르긴 했지만 미 공군기들은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매일 그것을 찾아내고 폭파하느라 한강 위에는 언제나 정찰 비행기나 폭격기들이 맴돌고 있었다.   


<사진> 북한 출격 - 북한의 상공에서 공격을 감행하는 미공군기.

 

서울을 떠나자


"이렇게 몇 번을 시골로 다닌다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다. 네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지고 온 음식을 내 목으로 넘길 수 없다. 더구나 며칠 전에도 최○○ 인민위원장이 다시 찾아와 아버지를 인민위원회에 나오라고 당부를 하고 갔는데 심상치 않다. 모두 외가댁으로 가자!
그 곳이 시골이라 그래도 안전 할 꺼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우리 가족 모두가 찬성했다. 다음날인가 가볍게 보따리를 싸고 이른 아침에 인민위원회가 있는 원서동 길을 피해 마루터기를 넘어 중앙중학교가 있는 계동(桂洞)길을 따라 황급히 종로 을지로 남대문 용산을 거쳐 나룻배를 타고 시흥 외가집으로 찾아갔다. 대가족이 먹을 것을 찾아갔으니 농사짓는 시골집인들 반가워 할 일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도 인민위원회가 생겨 시골동네의 많은 것을 관장하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잡혀갔고 몇몇 사람은 설쳐대고 있다고 한다. 농촌에서 그들 인민위원회에 대해 수군수군 했다. 그들은 벼 한 포기에서 벼의 낱알이 몇 개가 달렸으니 논 한마지기에서 쌀을 얼마 수확한다는 통계를 내서 추수할 때 꼼짝없이 공출(?)을 하게 될 거라는 풍문이 돌고 있었다. 분위기가 냉랭했다. 아마도 왜정치하에서 식량을 공출(供出)해 갔던 억울한 기억을 했을 게다.
시골의 몇몇 지주들은 꼼짝도 못하고 소작인들이나 머슴(?)들이 자기 앞으로 돌아올지도 모를 지주들의 논밭을 넘보고 있다고들 했다. 밭에 나가면 주인이 따로 없다. 누구나 다 거두어간다. "네것 내것이 어디 있느냐"고도 했다.


막상 찾아간 시골이지만 밭에 먹을 것이라고는 호박밖에 없다. 토마도도 한물이 갔는지 작고 파란 것뿐이다. 호박은 남았는데 그것도 청둥호박도 아니고 애호박도 아닌 호박만이 있어 그걸 삶아서 조선간장에 찍어 먹었다. 그것도 하루에 한 끼 정도다.
한 여름 푹푹 찌는 더위에 삶은 호박을 먹고 나면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이 현기증이 나고 무더위 속에서 진땀을 흘리며 장신 없이 잠에 빠져든다. 앞날이 캄캄한 그때는 언제 끝날 줄 모르는 전쟁 속에서 이렇게 굶주리는 날들이 계속될 것만 같아 절망만이 있을 뿐 이었다.  
해만 뜨면 언제나 정찰기나 제트 전폭기가 하늘을 날고 남으로 향하는 인민군을 향해 기총소사를 퍼붓는 광경을 가까이 보면서 철없는 아이들에게는 흥미진진한 구경꺼리였다. 
 

<사진> 6.25 당시 피난민 대열엔 젊은이는 없고 노인들과 부녀자뿐.


 

배고픈 아이들


삼복더위의 한복판에서 밥 먹듯이 굶고 몇 달을 지나니 사람이 짐승만도 못하게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이 먹을 것뿐이다. 어린 마음에도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닫아버리는 것이 낫다 싶었다.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어린 녀석이 죽고 싶다는 세상까지 온 것이다. 어쩌면 "죽고 싶다"는 건 "살고 싶다"는 절실함일지도 모르겠다.
우물물만 마시고 두 세끼가 아니라 2,3일을 굶는 것이 예사였으니 푹푹 삶아대는 더위에 정신조차 흐려지는 것 같았다. 언제쯤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 희망이 보이질 않는다. 어른들은 "산다는 게 죄(罪)"라고 하셨는데 아이들이 사는 것이 무슨 죄인가? 


안쓰러운 얘기이지만 하늘높이 하얀 꼬리를 그리며 북쪽으로 멀리 날라 가는 중폭격기를 보거나 한강 쪽으로 네이팜탄을 토하며 다시 솟아오르는 제트기를 보고 있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배고픔을 잊고 달래는 시간 이였다.
저건 B-29 중폭격기, F-84 전투기, F-86전투기, 정찰기... 아이들은 모두가 항공기 판별 전문가가 되었다. 9월에 들어서도 벼는 여물지 않고 속에는 우유 같은 진한 수분뿐이다. 좀 기다리면 쌀밥을 먹을 수 있단다. 언젠가는 이름 모를 잎이 살찐 풀을 따다가 데쳐먹기도 하고 나무껍질을 먹어보기도 했는데 빈속을 채우기도 어렵거니와 먹을 수도 없었다. 차마 함께 고통을 받고 있는 어머니에게는 배고프단 말은 못하겠다. 철이 들어서가 아니라 아이들은 전쟁 속 어려움에서 이렇게 순치(馴致)되었나 보다.


<사진> 한국전쟁 속에 배고픈 아이(사진-데이비드 던칸)



패주하는 인민군


외가 집 창문으로 가까이 보면 시흥으로 가는 국도에 관악산 쪽에서 내려오는 넓은 개천에 다리(마장교)를 쌕쌔기(제트기)가 폭파하는 바람에 그 옆에서 참외를 팔던 노인이 붕 떠서 날아가기도 했다. 가끔은 국도변으로 찾아가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시체를 보러 가면 기겁을 하지만 생사가 걸린 위험에도 아이들의 호기심은 언제나 우선이다.


노인들은 모이면 정감록 얘기를 했고 아주머니들은 어디서 들었는지 달밤이면 대야에 물을 담고 거울을 담그고 보면 거울에 비친 달에서 태극무늬가 보인다고 했다. 그건 곧 국군이 들어온다는 기대였나 보다.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은 낙동강 전투가 치열하다느니 곧 부산이 인민군에 점령당할 날이 머지않았느니 임시정부가 제주도로 옮긴다느니 했는데 한참을 지나 대포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기관총 소리가 콩 볶듯 하더니 조용해졌다.


별안간 인민군 패잔병들이 이 동네로 몰려오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가 허겁지겁 대문 안으로 들어서더니 인민군복을 벗어버리고 아무 옷이나 달란다. 총도 안든 군인도 있었다. 거절할 수 없어 옷 몇 벌을 내주었다. 밀짚모자도 달란다. 전폭기가 저공비행으로 도망치는 인민군을 향해 기총소사를 퍼붓고 있었는데 인민군들은 관악산 쪽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20대 전의 애띤 인민군들도 있었다. 핫바지에 밀짚모자를 쓰고 농사꾼으로 변장한 인민군들은 도주하면서 미 공군 전폭기의 기총소사를 피하는 위장이었다. 
 

<사진> 부산 인근에서 벌거벗은 채 줄맞춰 이동 중인 인민군 포로들의 모습당시 AP통신의 맥스 데스포 기자가 사진에 담았다. (■ 자료출처 : 맨스필드연구소)


 

(4회) 예고
*인천 상륙작전/9.28 서울수복
*전쟁의 참상
*전후에 달라진 사람들
*사람이 무섭다
*철새들의 수난

                                                                                               Posted by 민병설

 
가져온 곳 : 
카페 >♣ 이동활의 음악정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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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jubila|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