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조계종

[이것이 한국불교 최초]14. 국사(國師)·왕사(王師)

淸潭 2008. 9. 11. 10:29

[이것이 한국불교 최초]14. 국사(國師)·왕사(王師)
혜거 스님, 968년 한국불교 첫 국사 책봉
기사등록일 [2008년 09월 10일 수요일]
 
한국불교 첫 국사인 혜거 스님의 부도.
우리나라 역사를 돌이켜 보면 옛 통치자들은 고승들을 스승으로 삼아 정치,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 대한 자문을 받으며 국가를 통치함으로써 백성의 신뢰를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최근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공직사회의 종교편향이 이어지면서 ‘숭기억불(개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억압한다는 뜻)’의 시대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사회가 분열되고 있는 양상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통치자가 고승을 스승으로 섬기며 국정을 운영한 시기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통치자, 즉 임금이 스승으로 삼은 고승을 역사에서는 국사(國師)라고 한다. 국사는 중국 북제에서 550년 법상(法常)이 제왕의 국사가 된 것이 시초이며, 우리나라에서는 공식적으로 고려시대 광종이 혜거대사에게 국사의 칭호를 내린 것이 처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미 신라시대에도 승관제(僧官制)가 있어서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에 따르면 진흥왕 12년(551)에 고구려에서 귀화한 혜량(惠亮) 스님을 국통으로 삼아 국가의 대사를 의논하고 국가차원의 불교행사를 주도하도록 했다. 신라의 국통은 대규모의 불교행사를 주관함으로써 통치이념과 불교를 전파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 역할이 결코 국왕의 정치와 무관하지 않았다. 진흥왕이 혜량을 국통에 임명하면서 백고좌강회와 팔관회 같은 국가적 불교의식을 거행하도록 한 것이 바로 그 증거다.

혜량 스님, 신라시대 최초 국통

 
마지막 국사 무학대사 진영.

신라 진흥왕 당시 백고좌강회는 전쟁에서의 승리, 반란의 진압, 국왕의 병 치료 등을 목적으로 한 호국적인 형식을 갖췄고, 팔관회는 악행을 멀리하고 청정한 정심을 닦아 일상생활을 정화하는데 목적을 둠으로써 결국 이러한 대규모 불교행사를 주도한 국통은 민심을 규합하고 국론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했다.

신라시대에는 혜량을 비롯해 자장, 환희사, 혜훈, 상율사 등 모두 5명의 국통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 국사의 위치에 걸맞는 국통의 역할을 한 인물은 혜량과 자장이 대표적이며 자장은 선덕왕대에 대국통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불교를 널리 홍포하는 한편 국통 제도를 두었던 진흥왕은 국가의 모습을 갖추고 왕권을 강화하는 시기에 불교를 국권과 왕권을 밑받침하는 매개체로 인식했고, 이에 따라 국통에게 왕권강화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맡겼던 것이다. 그러나 승관제에는 국가가 직접 스님들을 통제하고 보호하겠다는 의지도 포함돼 있었다. 따라서 크게 국통, 대도유나, 대서성, 주군통 등 4계열의 승관제로 스님들을 조직해 관리가 편하도록 한 측면도 있었다.

혜량은 기록에서 고구려를 염탐하는 거칠부를 도와준 인연으로 신라가 고구려 땅 10군을 점령했을 때 신라에 귀화한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일부에서는 신라가 고구려의 고승을 모셔온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즉, 불교교리에 밝고 사회·국가적 통찰력을 갖춘 스님을 찾기 어려웠던 신라에서 고구려 고승 혜량을 스카우트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기록에 더 이상의 자세한 언급이 없어 사실 관계를 정확하게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첫 왕사는 고려시대 경유 스님

이어 신라 선덕여왕은 삼국통일을 앞둔 비상시기를 맞아 국난을 타개하고자 자장율사를 대국통에 임명해 왕의 최고자문을 맡기는 한편 그로 하여금 종교와 국민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어 삼국통일의 기틀을 잡게 했을 만큼 국통의 역할은 컸다.

한국불교사에서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첫 국사(國師)는 고려 광종 19년(968) 혜거(惠居·899∼974) 스님이다. 혜거 스님에 대해서는 알려진 자료가 없었으나, 1917년 잡지 「조선불교총보」에 이능화가 혜거의 비문을 소개하면서 존재가 드러났다. 혜거 스님의 비문인 ‘고려국수주부화산갈양사변지무애원명묘각흥복우세혜거국사법휘지광시 홍제존자보광지탑비명병서’에 따르면 스님은 명주 박씨이며, 출가해서 922년 선운사 선불장에서 활동하는 등 후백제 영역에서 활동하다 924년에 경애왕의 초청으로 분황사에 주석했다. 이어 929년 경순왕의 초청으로 영묘사에 있다가 후삼국 통일 후 정종 2년(947)에 왕사로 책봉됐고, 광종 19년(968)에 최초의 국사 자리에 올랐다.

혜거는 국사로 책봉돼 왕의 스승으로 역할을 하던 중 970년 봄 “수주부 갈양사가 산이 밝고 물이 아름다워 국가 만대의 복된 터전이 되니 국가의 복을 축원하는 장소로 삼기를 바란다”며 갈양사로 하산할 것을 청했다. 광종이 선뜻 허락하지 않자 스님은 수 차례에 걸쳐 간청한 끝에 마침내 972년 하산해서 입적할 때까지 갈양사에서 조계의 선풍을 따라 참선정진에 매진했다. 스님은 하산한지 2년 만인 974년 2월 15일 후학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나는 근원으로 돌아간다. 너희들은 부지런히 공부하라”는 유훈을 남기고 입적했다. 세상에 혜거 스님의 존재를 알린 비(碑)는 입적하고 20여 년이 지난 후 고려 성종이 “혜거 국사는 두 임금을 모신 뛰어난 스님”이라며 비를 세울 것을 명해 994년에 세워졌다.

혜거 스님이 국사의 자리에서 물러나고도 후임을 정하지 못하던 광종은 혜거 스님이 갈양사에서 입적하자, 974년(광종 25)에 탄문(坦文·900∼975) 스님을 국사에 책봉했다. 탄문 스님은 경기도 광주 고봉 사람으로 원효가 살던 향성산의 옛 절터에 암자를 짓고 수년간 수도한 뒤 북한산 장의사에서 신엄에게 화엄경을 배웠다. 914년에 구족계를 받은 탄문은 태조로부터 별화상이라는 칭호를 받고 926년 왕후 유씨가 임신하자 왕명으로 아들을 낳도록 기도를 올려 왕자를 낳게 한 뒤 더욱 총애를 받았다.

지방에서 메뚜기로 인한 피해가 심각해지자 『대반야경』을 강(講)해 물리치는 등의 법력을 보이기도 한 탄문 스님은 혜종과 정종 두 왕에게 스승의 대우를 받았고, 968년(광종 19)에 귀법사 주지가 되고 이어 왕사가 되었다. 스님은 광종 25년(974)에 국사가 된 후 1년 여 만에 노환으로 서산 보원사로 돌아가 입적했다. 이에 광종은 스님에게 법인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법인 스님이 세운 사찰 중 남아 있는 것으로는 현재 남양주 봉선사가 가장 유명하다.

국사(國師) 뿐만 아니라 왕사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왕사(王師)는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살았고, 고려 태조 왕건이 개국하면서 스승으로 모신 경유(慶猷·871∼921) 스님이다. 888년 당나라에 건너가 도응에게 법요를 배우고 형미, 여엄, 이엄 등과 함께 해동사무외(海東四無畏)라는 호칭을 받고 908년 귀국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921년 나이 50에 입적해 큰 빛을 보지 못했다. 일부 자료에서 921년 왕사가 된 이언 스님을 첫 왕사로 기술하기도 하지만 생몰 연대를 감안할 때 경유 스님이 첫 왕사라는 게 일반적 견해다. 고려시대 왕사는 모두 27명이었다.

조선 무학대사가 마지막 국사

통치자가 고승을 스승으로 섬기며 국정운영에 대한 자문을 받고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던 국사·왕사 제도는 조선시대 무학대사를 마지막으로 폐지됐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마지막 국사이자 왕사였던 무학대사는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될 것이라는 꿈풀이를 해주는 것으로 인연을 맺었고, 조선 건국 후 이성계의 이념적·정신적 스승이 되어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때문에 태조는 훗날 묘엄존자라는 칭호를 내리기도 했다.

국사·왕사 제도는 이처럼 신라 진흥왕 때 귀화한 고구려 승려 혜량이 국통에 임명된 이래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초 무학대사까지 이어졌고, 조선 태종 이후 성리학자들에 의해 그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왕조는 결국 자중지란 끝에 섬나라 일본에게 나라의 주권을 내주고 말았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964호 [2008-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