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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과 나

淸潭 2007. 11. 3. 17:48
 

책임과 나


 

자유와 방종에 대해서 우리는 일찌감치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다.

그리고 그 고귀하다는 자유에는 책임과 의무가 똑같은 무게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는 것도 무수히 들어왔다.


 

어디까지가 책임이고 어디까지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정도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어쩌면 책임을 너무 경시하지는 않았을까.

의무도 마찬가지이나 이제는 스스로 책임지는 자세를 다시 더듬으며 둘러봐야 하겠다.


 

자유로운 영혼에 대해 가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존중되어져야 하는 우리의 영혼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존중되어질 수 있는 영혼,

스스로의 자존(自尊)을 자신에게 당당히 세울 수 있는 영혼을 이제는 준비하자.

이미 많은 걸음을 휘적휘적 걸어 나가신 분도 계시리라.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첨예하다 할만한 예리한 각(角)으로

자신을 바라보기에는 아직도 많이 어슬프고 익숙하지 못하다.

아니 어떤 이는 오히려 두려워 뒤로 숨으려고도 한다.


 

착하다, 선하다는 말과 바보스럽다는 말이 때로 혼용되어 쓰여지는 것을 본다.

뭐가 뭔지 몰라서, 스스로 판단과 분간이 서지 않아서 “그래, 좋아..”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너무도 착하다는 모습과 동일시 되면 그것은 참 곤란한 일이다.

제대로 된 판단 하에 모두를 포용하는 마음자리와 말이다.

 

 

사노라면 가끔 거절하기 어려운 때를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남의 권유에 떠밀려 어떤 상태에 갈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자신이 선택한 것이고

자신이 “아니라”고 의사를 분명히 밝히지 못하였다면 그 또한 모두 자신의 책임이다.

소신이 없어서라도,

거절할 용기가 없어서라도,

판단을 잘못했더라도,

남을 배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억울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자신의 행위로서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남의 탓으로 돌려보려는 마음을 자신에게 허용해서는 안된다, 결코.


 

사회에는 法이라는 통제가 있다.

“法”이라고 하면 말을 못하고 받아들이고

“法”의 테두리에 있지 않다 싶으면

다른 양태를 보이는 일들을 볼 수 있다.


 

다생소활에서는

“의식상승”을 강조하며 이 “의식상승”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기다리던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으며

바야흐로 그 세상 안에서

참으로 그 세상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자비와 사랑은 그에게서 기본적인 의식이 되어있는 자라야

그 곳을 향해 발자국을 떼어 볼 수 있다고 하는 절대적 평등의 경지.


 

다생소활은

그런 의식의 세상을 위해,

사람들과 많은 존재들을 통해 그런 빛세상을 준비시키고 있다.


 

그 빛세상에서는 法이란 거추장스러운 것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法의 테두리 안에 ‘있고 없고’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각자가 자신의 책임을 다 할 줄 알고

누가 뭐라고 하는 것과도 상관없이

자신이 해야 할 일과 맡은 바의 의무까지도 마땅히 잘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정하거나 의사를 표한 일에서 더구나 자신을 곧추세우는 일임에랴...


 

멋진 의식의 성장을 이루거나

혹은 큰 진동수의 존재

혹은 빛나는 영혼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기운을 잘 느끼고 운용하거나

말을 잘한다거나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거나 

영적 능력이 좀더 남다르다거나

혹은 직관이 좀더 열려졌다거나 하는 등등으로

그 사람의 의식이나 진동수, 영적 수준을 가늠하는 것을 곧잘 본다.

더불어 자신들도 그런 상태를 추구하고자 한다.


 

이제 진정한 의식상승을 도모하는 우리,

이제는 그만하자.

그러한 우둔한 놀이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한마디로 “천만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보여지는 것과 내면의 의식 정도는 비례하며 맞아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남에게 들이대는 것이 아닌,

자신에게 향하는 예리한 칼날을 가져보자.

그리하여 자신에게 좀더 철저해져 보고 냉정해져도 보자.

그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로만 느끼던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간

또다른 자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덕명 쓰다.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