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십사(山齋十事)./ 권필
석주집 제3권 / 오언율시(五言律詩)
성 진사(成進士) 노(輅) 를 위해 짓다.
비가 그치자 하늘은 씻은 듯하고 / 雨罷天如洗
산이 추운데 달은 떠오르려 한다 / 山寒月欲生
알지 못하겠어라 온전히 둥근 달이 / 不知全魄露
반쯤 둥근 달과 비교하여 어떠한지 / 何似半輪明
땅이 환하니 개똥벌레 빛을 잃고 / 地白流螢失
숲이 성그니 잠자는 까치 드러난다 / 林踈睡鵲呈
오늘 밤에 도인의 뜻은 / 今宵道人意
맑음을 십분 더하였으리라 / 添得十分淸
위는 ‘동쪽 산 위의 맑은 달〔東岑晴月〕’이다.
시야 속 교외 들판은 외진데 / 望裏郊墟僻
차가운 안개는 곳곳마다 같구나 / 寒烟處處同
희미하게 작은 물가로 이어졌고 / 依微連小浦
길게 끌리어 흐르는 바람을 쫓누나 / 搖曳逐流風
묽은 흰빛이 막 나무를 감싸고 / 淡白初籠樹
옅은 푸른빛이 홀연 허공 가린다 / 輕靑忽掩空
지는 석양이 다시금 일이 많아 / 斜陽更多事
하늘 한쪽을 비춰 붉게 물들이누나 / 照作一邊紅
위는 ‘너른 들판의 저녁 연기〔平野暮烟〕’이다.
흐릿하게 강 가득 비 내리고 / 漠漠連江雨
쓸쓸하게 낙엽이 지는 하늘이라 / 凄凄落木天
성글게 내릴 땐 빗기어 햇살에 어리고 / 踈時斜映日
빽빽이 내릴 땐 멀리 안개와 어울려라 / 密處遠和烟
저물녘 빛은 시름겨운 눈길을 이끌고 / 暮色延愁望
차가운 소리는 취한 꿈과 싸운다 / 寒聲鬧醉眠
무단히 소슬한 뜻이 / 無端蕭瑟意
또 적요한 시편에 드는구나 / 又入寂寥篇
위는 ‘강성의 가을비〔江城秋雨〕’이다.
눈 머금은 하늘 허공 가득 캄캄하고 / 雪意連空黑
추위의 위세는 저물녘에 엉겼어라 / 寒威向夕凝
바람 따라 몰래 방문에 들어오고 / 隨風潛入戶
빗줄기와 함께 가늘게 등잔을 때린다 / 和雨細侵燈
술 데우려니 화로에 불이 없고 / 煖酒壚無火
시 읊으려니 벼루에 얼음이 있어라 / 哦詩硯有氷
여러 해 덮은 베이불 싸늘한데 / 多年布衾冷
오늘 밤에는 더욱 한기가 이는구나 / 此夜轉生稜
위는 ‘산촌의 밤눈〔山村夜雪〕’이다.
질그릇 모습이 몹시 예스럽고 / 瓦器形偏古
탁주는 이름하여 현자라 하누나 / 醇醪號是賢
은빛 기울이는 건 어찌 그렇게 하는가 / 傾銀何乃爾
푸른빛 드는 것도 그저 그러한 것이지 / 拈碧亦徒然
우연히 한가한 흥취를 일으키고 / 偶發閑中趣
이어서 취한 뒤에 잠을 자노라 / 因成醉後眠
돌밭에 가을도 한창 익어갈 제 / 石田秋正熟
애오라지 이로써 여생을 달래노라 / 聊此慰殘年
위는 ‘질항아리의 탁주〔瓦樽濁酒〕’이다.
작은 남새밭이 숲 곁에 있는데 / 圃小依林麓
가로놓인 밭두둑이 초정에 가까워라 / 畦橫近草亭
물 줄 때에는 도리어 항아리를 안고 / 灌時還抱甕
김을 맬 때도 경서를 놓지 않는다 / 鋤處不抛經
부추는 봄에 뿌리가 흰 것이 좋고 / 韭愛春根白
아욱은 이슬 젖은 잎 푸른 게 좋지 / 葵憐露葉靑
따서 현미밥에 반찬으로 삼으면 / 摘來供糲飯
그 쟁반에도 남은 향기가 있어라 / 飣餖有餘馨
위는 ‘작은 남새밭의 이슬 젖은 채소〔小圃露蔬〕’이다.
고요한 방에 아무 일이 없고 / 靜室無餘事
사립문은 저물녘에 비로소 열지 / 柴荊晩始開
아이 시켜 맑은 물 뿌리게 하고 / 敎童洒淸水
대나무 꺾어 먼지를 쓸게 한다 / 折竹掃輕埃
그저 뜰이 깨끗한 것 좋아할 뿐 / 但喜堦庭淨
손님 오는 것과는 상관이 없어라 / 非關車馬來
정녕코 함부로 쓸지 말아라 / 丁寧莫放手
자칫 비단 무늬 이끼가 다칠라 / 恐破錦紋苔
위는 ‘마당을 쓰는 아이 종〔童奚掃庭〕’이다.
한가하면 책 속의 글자 가지고 / 閑將卷中字
무릎 앞의 아이 녀석 가르치노라 / 試敎膝前兒
혀 놀리는 게 처음은 껄끄럽더니 / 弄舌初猶澁
붓 드는 것이 마침내 자연스럽구나 / 拈毫竟不疑
꾀꼬리처럼 좋은 소리 듣는 게 좋고 / 喜聞鸎語好
기러기 행렬 같은 글씨 놀라 보노라 / 驚見鴈行奇
괴이해라 옛날의 도 팽택은 / 遠怪陶彭澤
아들 책망하는 시 괜스레 지었구나 / 空題責子詩
위는 ‘글을 배우는 어린 손자〔癡孫學字〕’이다.
옥자를 마음에 늘 생각하고 / 玉字心長念
금편을 손이 절로 어루만진다 / 金編手自挐
붙은 찌가 가지런한 게 좋고 / 籤懸憐整整
흩어진 책은 비뚤어졌건 말건 / 帙散任斜斜
눈에 가득한 게 모두 신선 비결 / 滿眼皆仙訣
몸에 관계된 건 도가의 방책일세 / 關身是道家
그 옛날에 여 부자는 / 從來呂夫子
이로써 생애를 삼았었지 / 用此作生涯
위는 ‘서안에 쌓인 도서〔道書堆案〕’이다.
아침에 까치가 반갑게 짖더니 / 朝來烏鵲喜
오늘 밤은 이 어떠한 때인가 / 今夕是何辰
좌중의 손님은 낯익은 이들 / 在座非新輩
함께 밤을 보내느니 친구로세 / 連牀卽故人
맘껏 담론하며 속물을 버리고 / 劇談遺俗物
외로이 웃으며 천진을 드러낸다 / 孤笑發天眞
게다가 동이 가득 술이 있으니 / 更有盈尊酒
서로의 흉금 더욱 친밀해지누나 / 襟期轉覺親
위는 ‘자리에 가득한 친구〔親朋在座〕’이다.
[주-D001] 성 진사(成進士) :
성노(成輅 : 1550 ~ 1615)로 자는 중임(重任), 호는 석전(石田),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양주에서 살았다. 스승 정철의 잦은 유배와 동문 권필의 죽음을 보고 세상에 뜻을 끊었다. 저서에 《석전유고(石田遺稿)》 2권이 있다.
[주-D002] 탁주는 …… 하누나 :
현자는 탁주(濁酒)를, 성인은 청주(淸酒)를 가리키는 은어이다. 삼국 시대 위(魏)나라 서막(徐邈)이 상서랑(尙書郞)으로 있을 때 조조(曹操)가 금주령을 내렸으나, 서막이 술을 먹고 대취하였다. 교사(校事) 서달(徐達)이 그에게 관사(官事)를 물었는데, 술에 취해 대답하기를 “나는 성인에 취하였다.〔中聖人〕” 하였다. 서달이 조조에게 보고하자 조조가 대로하였는데, 또 다른 사람이 그를 위해 해명하기를 “평소에 취객들이 청주를 성인이라 하고 탁주를 현인이라 합니다. 서막은 성품이 조심스러운데 우연히 술에 취하여 한 말일 뿐입니다.” 하니, 마침내 조조가 서막을 용서하였다고 한다. 《三國志 魏書 卷27 徐邈傳》
[주-D003] 은빛 기울이는 건 :
은으로 된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다. 두보의 소년행(少年行)에 “농가의 낡은 질그릇 사발을 비웃지 말라. 술 담아 먹음으로부터 자손을 길렀어라. 은 술잔 기울이고 옥 술잔 기울여 사람의 눈 놀라게 하지만, 함께 취하여 대나무 아래 쓰러져 눕는 것은 결국 마찬가지이지.〔莫笑田家老瓦盆 自從盛酒長兒孫 傾銀注玉驚人眼 共醉終同臥竹根〕”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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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