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회진언 옴 살바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바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조계종 종립특별선원으로 1982년부터 지금까지 25년간 초파일을 제외하고 일반인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됐던 금단의 성역. ‘문 없는 문’을 열어젖히기 위해 생사를 건 수행자들의 치열함만이 존재한다는 선승들의 영원한 고향 문경 봉암사. 거센 폭풍우도 숨죽여 지날 만큼 침묵과 고요에 잠겨있던 이곳 천년고찰 봉암사가 10월 19일 거대한 메아리에 휩싸였다.
조계종이 이날 개최한 봉암사 결사 60주년 기념대법회는 꼭 60년 전 이곳에서 탄생했던 현대판 신화 ‘봉암사 결사’라는 프리즘을 통해 오늘날 한국불교의 자화상을 함께 들여다보고 참회하는 결연한 자리였다. 동시에 수행종풍을 진작시켜 한국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또 하나의 가슴 벅찬 입재식이기도 했다.
폭우 속에서도 스님 1000여 명과 재가불자 9000여 명 등 모두 1만명이 넘는 대중들이 동참함으로써 봉암사 경내를 빼곡히 메운 채 진행된 이날 대법회는 다섯 번의 깊고 웅장한 범종소리로 시작했다. 종정 법전 스님과 총무원장 지관 스님, 수좌계를 대표한 고우 스님이 부처님 전에 정성껏 향을 올린 후 이곳 주지 함현 스님이 봉암사 결사 경과를 대중에게 고했다. 이어 봉암사 선원장 정광 스님은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로 1947년 봉암사에 모였던 선객들이 스스로 제정했던 서슬 푸른 청규 ‘공주규약(共住規約)’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삼엄한 계율과 숭고한 조사들의 가르침을 부지런히 닦을 것, 불조의 가르침 이외의 사견은 절대 배격, 소작인의 세조 및 신도의 특별 보시 거부, 나무 발우 사용금지, 하루 2시간의 의무적 노동, 정기적인 포살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한평생 납자의 길을 오롯이 걷고 있는 정광 스님의 비장한 목소리는 대중들로 하여금 그 옛날 이곳에서 출가수행자의 본분으로 돌아가기 위해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내딛었던 청담, 성철, 향곡, 자운, 월산 스님 등 30여 명 선지식의 모습을 떠올리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총무원장 지관 스님은 기념사를 통해 “60여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속에 우리가 봉암사 결사의 뜻을 쇠잔하게 만들었다면 우리는 선사들에게 큰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 후 “성성적적한 모습의 불교, 추상같은 계율과 수행가풍을 이어가는 조계종단을 만드는 것이 바로 오늘 사부대중 모두의 과제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선원수좌회 대표 혜국 스님은 결사 60주년 기념선언문을 통해 “선대의 숭고한 결사 정신을 등지고 명리에 끄달려 분파를 만들고 서로 비방하고 남을 탓하며 구업으로 지은 허물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며 “이로 인해 세간이 출세간을 비난하며 염려하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혜국 스님은 특히 “그 어렵던 고난의 시절에도 정법을 되살리고자 수행 결사하신 선대의 정신을 따라 뼈저린 참회를 통해 초심으로 수행과 전법의 본분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하고, 그 구체적인 실천지침으로 △일체의 명리를 버리고 본분에 충실하자 △수행을 생활화, 사회화하자 △우리 국민 각자 주어진 직분에 충실하자 등 3가지를 제시해 10000여 동참대중으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이러한 자성과 참회의 목소리는 각계의 동참사에서도 계속됐다. 중앙종회 의장 자승 스님은 “요즘 우리 종단이 안팎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여기 모인 우리가 60년 전 봉암사 결사의 정신을 되살릴 수 있다면 이러한 어려움은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고, 교구본사 주지 스님 일동도 “봉암사 결사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우리부터 참회하고 변화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1000만 재가불자를 대표한 김의정 중앙신도회장도 “다시 태어나는 마음으로 종도로서의 책무와 불자로서의 자긍심을 되찾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이번 대회의 절정은 역시 자정과 참회의 시간이었다. 점점 더 거세져가는 빗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합장으로 자리를 지킨 스님과 재가불자들이 외우는 참회진언은 거대한 함성이 되어 희양산을 감쌌다. 특히 선원수좌회 의장 영진 스님의 결연한 참회문 낭독이 이어지자 여기저기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스님들과 불자들의 모습도 간혹 눈에 띄었다.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 전에 참회합니다.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고, 갈등을 극복하고, 희망을 안겨주어야 함에도 오히려 중생에 아픔을 주고 걱정을 끼치고 갈등을 유발하는 존재가 되어 있음을 참회합니다.”

10여분간의 참회 뒤 봉암사는 깊은 침묵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리고 그 깊은 적막을 깨운 건 당시 봉암사 결사에 동참했던 조계종정 법전 스님의 주장자 소리였다.
“산새울음 소리가 이 산중에 가득하니 법계가 일가를 이루도다. 흐르는 물소리는 대승의 돈설(頓說)이요, 맑은 바람은 종풍(宗風)을 연설하도다. 이 가운데 시비를 뚫고 지나가는 관문이 있는가, 없는가? 곧은 것과 굽은 것을 모두 놓아버리면 시방의 종지가 한 곳으로 모일 것이요. 정(正)과 사(邪)의 시비가 원융을 이룰 것이다.”
지난 수개월간 언론과 방송의 온갖 폭로와 비리의혹 등으로 만신창이가 된 한국불교. 60년 전 봉암사 결사가 암울한 일제 식민지 불교의 잔재 속에서 한국불교의 정수리에 희망을 들이부었듯 이번 봉암사 결사 60주년 기념대법회가 한국불교를 거듭나게 하는 분기점이 될 것인지에 다시 세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921호 [2007-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