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漢詩) [101 - 200] ▼ | [201 - 300] ▼ | [301 - 400] ▼ |
1. 공후인(箜篌引) - 여옥
2. 꾀꼬리의 노래(黃鳥歌) - 유리왕
3. 우중문에게(遺于仲文) - 을지문덕
4. 외로운 돌(孤石) - 정법사
5. 분개하여 원망하는 시(憤怨詩) - 왕거인
6. 속가로 돌아오는 노래(反俗謠) - 설요
7. 산에서 내려가는 동자를 보내며(送童子下山) - 김지장
8. 가을밤 빗소리에(秋夜雨中) - 최치원
9. 임경대(臨鏡臺)
10. 금천사 주인에게(贈金川寺主人)
11. 우강 역정에서(芋江驛亭)
12. 가야산(題伽倻山)
13. 지광 상인에게(贈智光上人)
14. 밤에 악관에게(夜贈樂官)
15. 윤주 자화사에 올라(登潤州慈和寺)
16. 강남의 여자(江南女)
17. 경주 용삭사(經州龍朔寺) - 박인범
18. 배로 가면서 장수재에게(江行呈張秀才)
19. 장안의 봄날에(長安春日有感) - 최광유
20. 금중 동지의 새 대(禁中東地也新竹) - 최승로
21. 한송정의 가락(寒松亭曲) - 장연우
22. 절구(絶句) - 최충
23. 오자서의 사당(伍子壻廟) - 박인량
24. 송나라로 사신가다가 사주 구산사를 지나며(使宋過泗州龜山寺)
25. 시골 노인이 소를 타다(長源亭應製野 騎牛) - 곽여
26. 청평의 이거사에게(贈淸平李居士)
27. 도를 즐기며(樂道吟) - 이자현
28. 동궁의 봄주련(東宮春帖) - 김부식
29. 안화사에서 재를 올리다(安和寺致齋)
30. 기녀들의 뻐꾸기 노래를 듣고(聞敎坊妓昌布穀歌有感)
31. 감로사의 운을 따라(甘露寺次韻)
32. 관란사의 다락에서(觀瀾寺樓)
33. 서도(평양)(西都) - 정지상
34. 취한 뒤에(醉後)
35. 대동강(大洞江)
36. 단월역(團月驛)
37. 사람을 보내며(送人)
38. 등고사에서(題登高寺)
39. 개성사(開聖寺)
40. 장원정(長源亭)
41. 변산의 소래사(邊山蘇來寺)
42. 강릉에서 풍악으로 가는 안상인을 보내며(江陵送安上人之楓岳) - 김부의
43. 홀에 써서 섭관반에게 드림(書笏呈葉館伴) - 한교여
44. 산장의 비오는 밤(山莊雨夜) - 고조기
45. 먼 사람에게(寄遠)
46. 금양현에 자면서(宿金壤縣)
47. 가을을 느끼다(感秋回文) - 이지심
48. 낙안군의 선원에 자면서(宿樂安郡禪院) - 김돈중
49. 등명사(燈明寺) - 김돈시
50. 기생에게(贈妓) - 정습명
51. 석죽화(石竹花)
52. 경주의 여관에서(東都客館) - 김군수
53. 황룡사 우화문에 쓰다(書黃龍寺雨花門) - 최홍빈
54. 승가굴에서(題僧伽窟) - 정항
55. 평양에서(西都口號) - 이지저
56. 잡흥(雜興)(4수 중에서) - 최유청
57. 진주산수도(晋州山水圖) - 정여령
58. 임실 공관에서(題任實公館) - 김약수
59. 경인년 9월 9일에(庚寅重九) - 김신년
60. 꾀꼬리소리를 듣고(聞鶯) - 임춘
61. 겨울에 길을 가다가(冬日途中)
62. 고기잡이 늙은이(漁翁) - 김극기
63. 서루의 늦은 조망(西樓晩望)
64. 미륵사의 늙은 주지에게(贈彌勒寺住老)
65. 늦가을의 달밤(秋晩月夜)
66. 통달역(通達驛)
67. 여름(夏)(「시골집의 사철」 4수 중에서)
68. 잉불역(仍弗驛)
69. 고원역(高原驛)
70. 천심원의 벽에 쓰다(題千尋院壁) - 이인로
71. 산에 살면서(山居)
72. 정월 보름날 밤의 동릉(元夕燈籠詩)
73. 소상의 밤비(瀟湘夜雨)
74. 은대에 숙직함(夜直銀坮)
75. 지리산에 놀면서(遊智異山)
76. 술벗 이담지에게(贈酒友李湛之)(「네 벗에게」 4수 중에서)
77. 불문의 벗 종령에게(四贈公門友宗聆)
78. 보좌 뒤의 장지에 쓰다(書 座後障上) - 김양경
79. 궁중의 당직(內直)
80. 조상국의 독락원(趙相國獨樂園) - 유승단
81. 혈구사(穴口寺)
82. 보령현에 자면서(宿保寧縣)
83. 앓는 눈(病目) - 오세재
84. 북산잡영(北山雜詠)(三首) - 이규보
85. 우물 안의 달(詠井中月)
86. 저녁의 조망(晩望)
87. 봄날에 절을 찾다(春日訪山寺)
88. 강 위의 달밤에 나그네의 배를 바라보고(江上月夜望客舟)
89. 강 위의 새벽비(江上曉雨)
90. 여름날에(夏日)
91. 물고기(詠魚)
92. 옛 서울을 생각함(憶舊京)
93. 북산에 다시 놀면서(重游北山)
94. 감로사(甘露寺)
95. 여뀌꽃의 백로(蓼花白鷺)
96. 꽃 꺾는 노래(折花行)
97. 늦봄(春晩) - 진화
98. 버들(柳)
99. 봄의 흥취(春興)
100. 가을의 회포(秋日書懷)
1. 공후인( 引)
그렇게도 그 강을 건너지 말라 했는데
당신은 끝내 건너시었소.
건너다 물에 빠져 죽으시니
아아 님이시여, 이 일을 어찌하리까.
고조선의 나루뱃사공인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이 지은 것이다. 자고는 새벽에 일어나 배를 저어 나갔다. 어떤 미치광이 늙은이가 물결이 거센 강을 건너갔는데, 그 아내가 뒤쫓아오면서 만류했으나 미치광이는 듣지 않고 건너가다가 마침내 물에 빠져 죽었다. 그 아내는 공후를 타면서 노래했다. 그 소리가 매우 애절했고, 공후 가락이 끝나자 아내도 마침내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자고가 돌아와 그 아내에게 이 사실을 말하자 그 아내도 매우 슬퍼하면서 공후를 잡아 그 소리를 흉내내었다.
2. 꾀꼬리의 노래(黃鳥歌)
팔팔 날아 오고가는 꾀꼬리들이여
암수컷이 모두 짝을 지었네.
생각하면 나는 외로운 몸
누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리.
왕은 두 여자를 취하였는데 첫째는 화희이니 골천 사람의 딸이요 또 한 여자는 치희이니 한나라 사람이었다. 두 여자는 왕의 사랑을 다투다가 화희가 치희에게 <너는 한나라 사람의 종년으로서 어찌 그처럼 무례하냐> 하였다. 치희는 부끄럽고 슬퍼서 도망쳐 돌아갔다. 왕은 말을 달려 쫓아갔으나 치희는 성을 내어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나무 밑에 앉아 쉬다가 날아드는 꾀꼬리를 보고 느낌이 있어 이 노래를 지었다.
3. 우중문에게(遺于仲文)
당신의 신비로운 계책은 천문을 환히 알고
당신의 미묘한 헤아림은 지리를 꿰뚫었네.
싸움에 이겨 이름 이미 높았거니
만족할 줄을 알아 부디 그만두시오.
수양제가 우중문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을 침노해 들어왔다. 을지문덕은 살수를 의지해 그것을 막으면서 사자 편에 이 시를 보내어 그만 돌아가기를 권하였다.
4. 외로운 돌(孤石)
먼 돌이 바로 공중에 생겨
편편한 호수에 사방이 탁 틔었다.
바위 뿌리에서는 항상 물을 뿌리고
나무 끝에서는 바람을 잠재운다.
물에 누웠어도 그림자 맑고
놀을 침노하다 다시 붉게 오른다.
여러 봉우리 밖에 홀로 빼어나고
흰 구름 속에 외로이 우뚝하다.
정법사(定法師) 고구려 스님. 일찍이 후주(後周)에 들어가 표법사(標法師)와 교유하다.
5. 분개하여 원망하는 시(憤怨詩)
우공이 목놓아 울매 3년 내리 가물었고
추연이 슬픔을 품으매 5월 서리 내렸네.
지금 나의 깊은 시름이 도리어 옛날 같건만
하늘은 말이 없이 그저 푸를 뿐이네.
전당시에 <신라 여왕인 만(曼)때에 어떤 사람이 그 당시의 정치를 비방하여 길가에 방을 써 붙였다. 왕은 그것을 은자 왕거인의 소행이라 생각하고 옥에 가두었다. 거인은 이 시를 지어 감옥의 벽에 써 붙였다>고 하였다.
6. 속가로 돌아오는 노래(反俗謠)
구름 같은 마음이여, 정숙하게 생각하고
골짝의 쓸쓸함이여, 찾는 사람이 없네.
예쁜 풀의 꽃다움이여, 향기로움을 생각하나니
아아, 나는 어찌하리, 이 젊은 청춘을.
전당시에 <설요는 동명국 사람으로서 좌무위장군 승충의 딸로서 15세에 머리를 깍고 출가하여 6년을 지내다가 이 노래를 부르며 속가로 돌아와, 벼슬하기 전에 입던 옷으로 곽원진의 첩이 되었다>고 했다. 생각하건대 동명국은 신라를 가리킴인 듯.
7. 산에서 내려가는 동자를 보내며(送童子下山)
쓸쓸한 공문에서 너는 집을 생각해
운방을 하직하고 구화산을 내려간다.
죽란에서 대말 타기 좋아해 그리 가고
금지에서 금모래를 모으기 게을렀다.
병에 보탤 시냇물에 달을 부르지 말라
차 다리는 병에서는 꽃 즐기기 쉬웠구나.
잘 가거라, 부디 자주 눈물 흘리지 말라
노승이 짝이 되고 놀과 안개 있지 않니 ?
전당시에 <김지장은 신라의 왕자로서 지덕 초년에 바다를 건너 구화산에 살았는데, 이 시는 거기서 지은 것이다>하였다.
8. 가을밤 빗 소리에(秋夜雨中)
가을바람에는 괴로운 시뿐이던가
세상 길에는 친한 벗이 드물구나.
한밤 창밖에 보슬비 내리나니
등불 앞의 마음은 그저 아득하여라.
최치원 : 자는 고운. 12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희종 건부 1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변종사가 되고, 뒤에 본국으로 돌아와 한림학사가 되다. 만년에 가야산에 들어가 세상을 마치다. 시호는 문창후. 문묘에 배향하다. 저서로 [계원필경]이 세상에 유행하다.
9. 임경대(臨鏡臺)
안개 속의 낮은 산들 질펀히 흐르는 물
거울 속의 집들이 푸른 봉을 마주했다.
어디서 온 배 한 척이 바람 받아 가는데
언뜻 보인 외로운 새는 아득히 자취 없다.
10. 금천사 주인에게(贈金川寺主人)
흰 구름 시냇가에 처음으로 절을 지어
삼십년 동안 여기 내리 머무네.
문앞 한 가닥 길을 웃으며 가리키면서
이 산을 내려만 가면 천 갈래 길이 있네.
11. 우강 역정에서(芋江驛亭)
강가에 말 세우고 오는 배를 기다리는데
질펀한 연기물결은 만고의 시름이다.
지금이라도 산을 깎고 물을 말리운다면
이 인간의 이별이 비로소 그치련만…….
12. 가야산(題伽倻山)
돌 사이 쏟는 물에 온 산이 부르짖어
곁의 사람 말소리도 알아듣기 어려워라.
시비 소리 귀에 들까 언제나 두려워해
일부러 흐르는 물로 온 메를 둘러쌌다.
13. 지광 상인에게(贈智光上人)
구름 곁에 절을 짓고
4년 남짓 참선한다.
지팡이는 산 밖을 나간 적 없고
붓은 서울에 보낸 편지 없었다.
대홈통에는 물소리가 급하고
소나무의 창에는 해 그림자 성기다.
높은 경계라 시 또한 끝이 없고
눈을 감고는 진여를 깨닫는다.
14. 밤에 악관에게(夜贈樂官)
사람의 일은 성했다 쇠하나니
덧없는 생이 실로 슬프다.
그 누가 알리, 천상의 그 가락을
이 바닷가에 내려와 볼 줄이야.
물가의 전각에서 꽃 구경하고
바람 드는 창에서 달을 보는 때이다.
수염을 더위잡기 이제 다 틀렸거니
그대와 함께 두 줄 눈물 흘린다.
15. 윤주 자화사에 올라(登潤州慈和寺)
산에 올라 잠깐 동안 세상 일 멀리하여
흥망을 생각하면 한이 더욱 새롭네.
화각 소리 속에는 아침 저녁 물결이요
청산 그림자 속에는 고금의 사람이네.
서리에 꺾인 옥수에는 꽃이 주인이 없고
바람이 따뜻한 금릉에는 풀이 절로 봄이네.
다행히 사령운의 남긴 경치가 있어
시인들의 마음을 항상 시원하게 하네.
16. 강남의 여자(江南女)
강남의 풍속이 참으로 음탕하여
기르는 딸이 아양떨고 예뻤다.
성품 되기는 바느질을 멀리하고
화장을 마치고는 악기 고른다.
그러나 배우는 것 아음 아니요
대개는 봄마음에 끄달리나니.
스스로 일컫기를 꽃다운 얼굴이요
한참 나이를 늘 차지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웃집 여자들의
종일 내내 베 짜는 것 비웃나니
베 짜기에 그 몸을 괴롭히지만
그 비단옷은 네 몫이 아니란다.
17. 경주 용삭사(經州龍朔寺)
으리으리한 신선의 집이 푸른 하늘에 솟아
달 속의 생가 소리 역력히 들려 오네.
등불은 반딧불을 흔들어 새의 길을 밝히고
사다리는 무지개 그림자를 돌아 바위문에 거꾸러졌네.
사람은 흐르는 물을 따르거니 언제나 그칠는고
대는 찬 산을 띠어 만고에 푸르렀네.
시험삼아 옳고 그름과 공과 색의 그 속을 물어보면
한 백년의 시름과 취함이 앉아서 곧 깨네.
박인범 : 벼슬은 저작
18. 배로 가면서 장수재에게(江行呈張秀才)
억새풀꽃 물가에 늦게야 배를 대어
찬 이슬 벌레 소리 언덕에 가득 가을이네.
민물이 떨어지는 오랜 여울에는 모래 부리가 잠기고
해 넘은 찬 섬에는 나무 모습도 시름이네.
강 위를 날으는 기러기 떼를 바람이 몰아가고
하늘 끝의 외로운 배를 달이 보내네.
우리 모두 나그네로 나이는 벌써 늙었나니
이 심사를 말할 때마다 눈물이 몰래 흐르네.
19. 장안의 봄날에(長安春日有感)
삼베옷으로 갈림길의 티끌을 털기 어려워
흰 머리 여윈 얼굴이 새벽 거울에 새롭다.
상국의 좋은 꽃도 시름 속에만 곱고
고향의 꽃다운 나무는 꿈속의 봄이어라.
거룻배의 으스름달에 바다에 뜬 일 생각하고
여윈 말로 관하의 나루 묻기에 고달프다.
다만 형설의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
버드나무의 꾀꼬리 우는 소리에 마음이 너무 슬프다.
최광유 : 중국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다
20. 금중 동지의 새 대(禁中東地也新竹)
죽순 껍질이 막 열려 가루마디가 분명한데
머리 숙이고 길에 들자 녹음이 무르녹다.
님의 놀이에 어찌 구태 하늘풍악 울리랴
금바람 절로 있어 옥소리 내는 것을.
최승로 : 경주 사람. 성종 때에 정광으로 있다가 수시중까지 되었으며 청하후에 봉해지다. 시호는 문정
21. 한송정의 가락(寒松亭曲)
한송정의 밤은 달도 밝아라
경포의 가을에는 물결도 잔다.
슬피 울면서 그 속을 오락가락
갈매기 한 마리는 믿음성이 있어라
22. 절구(絶句)
촛불 켜지 말라, 뜰에 달빛 가득하고
손님 부르지 말라, 자리에 산빛 드네.
거기에 다시 솔거문고가 악보 밖을 타나니
다만 혼자 즐길 뿐, 남에게는 전할 수 없네.
최충(崔沖) : 자(字)는 호연(浩然). 해주 사람. 목종때 급제하고 문종때 문하시랑이 되었는데, 그때 사람들은 그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 일컬었다. 시호는 문헌(文憲).
23. 오자서의 사당(伍子壻廟)
동문에 눈을 걸어 분을 다 풀지 못해
푸른 강은 천고에 물결을 일으킨다.
지금 사람은 옛 현인의 뜻을 알지 못하고
조수 머리가 몇 자나 높은가고 물을 뿐이다.
박인량(朴寅亮) : 자(字)는 대천(代天)
24. 송나라로 사신가다가 사주 구산사를 지나며(使宋過泗州龜山寺)
높은 바위와 괴이한 돌이 산을 이루었는데
그 위에 절이 있어 물이 사방을 돌았다.
탑의 그림자는 물결을 뒤치는 강 밑에 거꾸러졌고
경쇠 소리는 달을 흔들며 구름 속에 사라진다.
문앞의 나그네 배에는 큰 물결이 빠르고
대숲 밑의 중의 바둑에는 한낮이 한가하다.
한번 황화 받들어 참아 이별 아끼나니
여기 또 시를 남겨 다시 오르기 약속한다.
25. 시골 노인이 소를 타다(長源亭應製野 騎牛)
태평스런 모습으로 마음대로 소를 타고
안개비에 반쯤 젖어 밭두둑을 지나간다.
알겠거니, 물가집이 가까이 있겠구나.
그를 따라 지는 해가 시냇물 곁에 있다.
곽여 : 자는 몽득(夢得)
26. 청평의 이거사에게(贈淸平李居士)
청평 산수가 동햇가에 으뜸인데
우연히 또 옛 친구를 만나게 됐네.
삽십년 전에 우리 함께 과거에 급제하고
그 뒤에 천리 밖에 각기 헤어져 살았었네.
뜬 구름은 동리에 들어가도 더러운 일 없었고
밝은 달은 시내를 비추어도 티끌에 물들지 않네.
서로 마주 보고도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는 곳
담연히 옛 마음을 서로 비추어 주네.
27. 도를 즐기며(樂道吟)
내 집은 푸른 산의 이 봉우리
이전부터 보배로운 거문고 있어
언제고 한 가락 탈 수 있지만
이 소리 아는 사람 얼마나 될까.
이자현 : 자는 진정(眞精)
28. 동궁의 봄주련(東宮春帖)
새벽빛은 다락집 모서리에 밝고
봄바람은 버드나무 가지 끝에 분다.
계인은 막 새벽을 알리고 나서
침문에 조회하러 이미 떠났다.
김부식 : 경주 사람
29. 안화사에서 재를 올리다(安和寺致齋)
늦은 가을이라, 뜰앞 나무 그림자가 빽빽하고
고요한 밤이라, 돌 위의 샘물 소리가 높다.
자다 깨어 썰렁하여 마치 비가 내릴 듯
갈대 속 어선에서 자던 일 생각난다.
30. 기녀들의 뻐꾸기 노래를 듣고(聞敎坊妓昌布穀歌有感)
미인들이 아직도 옛노래를 부르는데
뻐꾸기는 날아들고 상수리나무는 드물다.
그것은 마치 예상우의곡 같아
개원의 남은 노인들 눈물이 옷 적신다.
31. 감로사의 운을 따라
속된 사람의 오지 않는 곳
올라와 바라보면 마음 트인다.
산의 모습은 가을에 더욱 좋고
강물 빛깔은 밤에도 밝다.
흰 물새는 높이 날아 사라지고
외로운 배는 홀로 가기 가볍다.
부끄러워라, 달팽이 뿔 위에서
반평생 동안 공명 찾아 허덕였다.
32. 관란사의 다락에서
유월 인간은 더위가 한창인데
이 다락엔 한종일 맑은 바람 넉넉하다.
산 모습과 물빛깔은 예와 이제 없는데
세속 사정과 사람의 정은 다르고 같음이 있다.
거룻배는 거울 속을 외로이 가고
자고새는 그림 속을 짝을 지어 날은다.
슬프다, 세상 일은 마치 재갈과 같아
대머리진 이 늙은이를 놓아주지 않구나.
33. 서도(평양)
서울 거리 봄바람에 보슬비 지난 뒤에
먼지는 일지 않고 버들가지 늘어졌네.
세도집과 안방에서 목메는 노랫가락
바로 그 모두가 이원제자 집들이네.
정지상 : 서경 사람
34. 취한 뒤에
복사꽃 분홍비에 새들은 지저귀고
집 둘레 푸른 산에 간간이 파란 남기
비스듬 오사모를 바루지도 않은 채
술에 취해 꽃둑에 자며 강남을 꿈꾸노라.
35. 대동강
비 개인 긴 둑에는 풀빛도 하 많아라.
그대 보내는 남포에는 슬픈 노래 울리나니.
이 대동강 물은 언제나 다할는고
해마다 이별 눈물이 물결을 더하는 것을.
36. 단월역
술에 취해 병풍 아래 베개 베고 누었는데
앞마을의 첫닭소리에 꿈을 깨었네.
밤이 깊어 비 개던 일 도로 생각하나니
먼 하늘 외론 달이 다락 서쪽에 있네.
37. 사람을 보내며
뜰앞에는 나뭇잎 떨어지고
책상 밑에는 벌레소리 슬프다.
홀홀히 걷잡을 수 없나니
끝없이 자꾸 어드메로 가는가.
한 조각 마음은 산이 끝나는 곳이요
외로운 꿈은 달이 밝은 때이다.
이 남포에 봄 물결 푸르거니
그대는 뒷기약을 저버리지 말라.
38. 등고사에서
돌길은 꼬불꼬불, 이끼는 비단 무늬
이끼 끝나는 곳에 선관에 들어왔네.
땅은 푸른 하늘과 그다지 멀지 않고
중은 흰 구름과 마주해 한가하네.
날이 따스해 제비는 별전으로 날아들고
달이 밝아 원숭이 울어 비인 산을 울리네.
사내 대장부, 본래 사방의 뜻 품었거니
내 어찌 포과처럼 여기 매어 있는가.
39. 개성사
백 걸음에 아홉 굽이 높은 산에 오르노니
반공에 있는 집이 오직 두어 칸이네.
신령스런 맑은 샘에 찬 물이 떨어지고
암담한 오랜 벽에 파란 이끼 아롱졌네.
돌 위의 솔이 늙어, 한 조각의 달이요
하늘 끝에 구름 낮아, 천 점의 산들이네.
속세의 어떤 일도 감히 닿지 못하나니
혼자 유인만이 언제고 한가하네.
40. 장원정
드높은 두 정자가 강을 베고 누웠는데
맑은 밤이라 한 점 티끌도 없네.
나그네 배를 바람이 보내나니 조각조각 구름이요
집 기와에 이슬이 내렸나니 옥이 인린하여라.
버들 속에서 사립문을 여나니 8, 9채의 집이요
밝은 달에 발을 걷나니 세넷의 사람이네.
아득해라, 봉래산은 그 어디쯤인고.
깊은 꿈에 꾀꼬리는 이 봄을 지저귀네.
41. 변산의 소래사
묵은 길이 적막한데 솔뿌리 얽히었고
하늘 가까워 별을 손으로 만질 듯.
뜬구름과 흐르는 물처럼 절에 온 나그네여
붉은 잎 푸른 이끼에 중은 사립문 닫네.
썰렁한 가을 바람은 해질녘에 불고
차츰 밝은 산달에 잔나비 울어예네.
기특해라, 흰 눈썹의 늙은 중이여
여러 해로 시끄러운 세상 꿈꾼 일 없네.
42. 강릉에서 풍악으로 가는 안상인을 보내며
강릉에는 날이 따셔 꽃이 먼저 피는데
풍악은 아직 추워 눈이 녹지 않았으리.
우스워라, 스님의 산수 즐기는 성벽이여
간 곳마다 어디서나 소요하지 못하누나.
김부의 : 김부식의 아우
43. 홀에 써서 섭관반에게 드림
눈물 줄줄 흘리며 헤어지려 하나니
이 생에선 다시 올 기약 없구나.
외람되게 보옥으로 깊은 뜻을 말하노니
물건 볼 때 그대는 그리워하는 이 사람을 잊지 말아라.
한교여
44. 산장의 비오는 밤
송당 어젯밤에 비 내리더니
서쪽 시냇물소리를 누워 들었다.
새벽에 뜰앞 나무 바라볼 때에
자던 새는 아직도 둥우리 안 떠났다.
고조기 : 제주 사람
45. 먼 사람에게
정성어린 이 편지를 옥문관에 부치노니
부디 자중자애하여 음식 많이 드시오.
제후에 봉해짐이 바로 남아 일이거니
누란을 베지 않고는 돌아올 생각 마오.
46. 금양현에 자면서
새벽 서리의 숲에 새들이 지저귀고
평상에 자던 손이 바람에 놀라 깬다.
추녀에는 반달이 아직 남았고
사람은 하늘 끝의 한쪽에 있다.
떨어진 잎은 돌아갈 길을 묻고
찬 가지에는 오랜 안개 걸리었다.
강동으로 갈 길은 아직도 멀었는데
이 강마을에서 이 가을도 다 간다.
47. 가을을 느끼다
더위 흩어져 가을 이른 줄 알고
시름스러워 조금은 슬퍼지네.
어지러운 소나무는 푸른 일산 눕혔고
흐르는 물은 푸른 여라 길었네.
언덕이 멀어 엉긴 연기가 희고
다락이 높아 시원한 기운 나네.
하늘 복판의 밝은 달이 좋아라
그윽한 방에 그 빛을 비추네.
이지심
48. 낙안군의 선원에 자면서
우연히 온 산 곁의 절이여
향기로운 연기에 방문 활짝 열리었다.
깊은 수풀은 대나무 잣나무뿐
경계 고요해 티끌 한 점도 없다.
속인 귀로써 중 이야기 듣나니
시름하는 창자가 술잔 얻은 듯.
조용히 이미 맑고 시원하거니
하물며 또 달빛이 밝음이랴.
김돈중 : 김부식의 아들
49. 등명사
절이 멀리 아득한 푸른 물결 눌렀나니
올라와 바라보면 마치 바다 한복판인 듯.
발을 걷으면 대숲 그림자 성기기도 배기도
베개 기대면 여울물 소리 낮다 또 높네
밤이 고요해 경다락에는 향불 심지 차갑고
달이 밝아 손님의 침상에는 칡두건이 시원하네.
슬프다, 이 좋은 경치에 머물 인연이 없어
한종일 허덕허덕 입을 위해 바쁘네.
김돈시 : 돈중의 아우
50. 기생에게
온갖 꽃 속에서도 맑고 고운 그 얼굴
갑자기 몰아치는 미친 바람 앞에 붉은빛 다 가셨다.
수달골로도 고치지 못하는 옥같은 그 볼이여
오릉의 공자들의 그 한이 끝이 없다.
정습명 : 연일 사람
51. 석죽화
세상 사람은 붉은 모란 좋아해
온 집안에 모두 가꾸네.
누가 알리, 풀 거친 들에도
또한 좋은 꽃떨기 있는 줄을.
마을 뭇둑 달 아래 그 빛깔 투명하고
언덕 나무 바람에 그 향기 불려 오네.
구석진 시골이라 찾는 공자 없기에
아리따운 그 맵시는 촌로에게 맡겨졌네.
52. 경주의 여관에서
무열왕의 자손이요 문열의 집안
계림의 진골들도 자랑할 수 없으리.
저 고향은 아직도 동쪽 하늘 밑에 있거니
지금 다행히 여기 와서 사신이 되었구나.
김군수 : 돈중의 아들
53. 황룡사 우화문에 쓰다
늙은 나무에 북풍이 울고
잔물결 위에 저녁별이 떠돈다.
이리저리 거닐며 지난 일 생각할 때
어느결에 눈물이 옷길을 다 적신다.
최홍빈
54. 승가굴에서
험준한 돌다리를 구름 밟고 가나니
빛나는 이은 하늘이 마치 화성 같아라.
가을 이슬 조금 내려 천리에 시원하고
저녁볕이 멀리 잠겨 온 강이 다 밝네.
허공에 어린 이내는 향기로운 이삭에 이었고
골짝에 우는 한가한 새는 경쇠 소리 갈마드네.
부러워라, 고승의 그 마음이여
세상길의 영리에는 도무지 뜻이 없네.
정항
55. 평양에서
대동강 물은 유리가 파랗고
장락궁 꽃은 비단이 붉다.
임금님의 한 번 거둥이 장한 일이 아니라
태평스런 풍월을 백성들과 함께하리.
이지저
56. 잡흥(4수 중에서)
(一)
봄풀들이 어느새 푸르렀구나.
동산 가득히 나비 날은다.
동쪽 바람이 잠을 꼬드기다가
침상의 옷자락을 불어 일으킨다.
깨어나니 적막해 아무 일 없고
숲 밖의 저녁볕이 쏘아든다.
기둥을 기대 한숨지으려 하다가
어느새 고요히 세상 잊었다.
최유청
57. 진주산수도
몇 점 푸른 산이 호수 베고 누웠는데
그대는 이것을 바로 진양의 그림이라 하네.
물가의 오막살이집 하도 많건만
거기 있는 우리 집은 그림에는 없구나.
정여령
58. 임실 공관에서
늙은 가시숲을 헤치고 오랜 시내 찾아드니
집집마다 나물밥도 한껏 먹지 못하네.
산새들은 백성을 걱정하는 내 뜻 모르고
숲속에서 마음대로 재잘거릴 뿐이네.
김약수
59. 경인년 9월 9일에
서울바닥에 전쟁 일어
사람 죽여 어지러운 삼실 같다.
그러나 좋은 때를 저버릴 수가 없어
흰 막걸리에 노란 국화 띄운다.
김신윤
60. 꾀꼬리소리를 듣고
시골집에 오디 익고 보리는 여물려 하고
푸른 나무에 꾀꼬리 울음 처음 듣는다.
꽃을 좋아하는 서울 나그네를 알아보는 듯
은근히 자꾸 지저귀며 그칠 줄을 모른다.
임춘 : 서하 사람
61. 겨울에 길을 가다가
이른 새벽에 혼자서 낙주성 나와
장정·단정을 얼마나 지났던고.
말을 타고 가면서 가랑눈발 헤치고
채찍 들고 읊으면서 푸른 봉우리 센다.
하늘 끝에 달이 떨어져 돌아갈 마음을 재촉하고
들 밖에 바람이 차가와 취한 술기운 깬다.
가다 머무는 쓸쓸한 외로운 마을
집집마다 언제나 사립문 일찍 닫는다.
62. 고기잡이 늙은이
하늘이 아직 고기잡이 늙은이를 용서치 않아
일부러 강호에 보내 순풍을 적게 했네.
사람 세상의 험함을 그대는 웃지 말라
자기가 오히려 급류에 있는 것을…….
김극기 : 경주 사람
63. 서루의 늦은 조망
강바람은 솔솔 봄숲에 불어오고
찬 해는 어둑어둑 저녁에 누워 있다.
물빛은 하늘에 닿고 연기는 땅을 덮어
산골짝과 여울의 나무꾼, 낚시꾼은 있는 듯 없는 듯도…….
64. 미륵사의 늙은 주지에게
숲 끝은 아득하고 길은 구불구불한데
구석진 이 경계를 속인에게 왜 알렸는가.
오직 솔가지의 눈옷 입은 저 두루미만이
스님이 처음 와서 이 초막 얽음 보았으리.
65. 늦가을의 달밤
저녁 되자 사나운 바람이 나무 끝에 일어나
날으는 서리를 보지는 못하나 나뭇잎 소리 말랐다.
창을 열었으나 밝은 달을 맞이할 생각 없나니
야윈 몸이라 가을이 오면 밤추위를 겁낸다.
66. 통달역
갑자기 금빛 실을 떨치는 연기 속의 수양버들
가고 보내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꺽이었던가.
숲 밖의 매미 한 마리 이별의 설움을 잘 알아
해질녘에 소리를 끌고 와서 그 가지에 오르네.
67. 여름(「시골집의 사철」 4수 중에서)
들의 버들은 그늘이 한창 쏘물고
언덕의 뽕은 그 잎이 아직 드물다.
꿩은 새끼를 위해 여윈 병아리를 먹이고
누에는 철이 되어 굵은 고치 만든다.
더운 바람은 보리밭 뚝에 일고
찬 빗발은 이끼 낀 물가에 어둡다.
적막하여라, 찾는 사람이 없어
시냇가의 사립문을 낮에도 닫아 둔다.
68. 잉불역
멀고도 한가한 산 밑 길이여
말 가는 대로 맡겨 두고 가을을 읊어 본다.
물속에는 까끄라기를 문 게가 보이고
나무에는 잎에 가린 매미 없다.
시냇물 소리는 맑기 비와 같은데
들의 기운은 연기처럼 희부옇다.
밤이 들어 외로운 가게에서 자나니
시골 농부들은 아직 자지 않는다.
69. 고원역
백년의 덧없는 생이 50이 가까운데
기구한 세상 길이 통한 나루 적었네.
나라를 떠나 3년에 무슨 일을 이루었던가
만리에 집에 돌아가는 이 한 몸 뿐이네.
숲속의 새는 정이 있어 나를 보고 우는데
들의 꽃은 말없이 머무는 사람 비웃네.
시마가 재촉해 와서 나를 괴롭히나니
궁한 시름을 기다리지 말라, 이미 고생인 것을.
70. 천심원의 벽에 쓰다
손님을 기다려도 손님은 오지 않고
스님을 찾았으나 스님도 또한 없네.
오직 저 숲 밖에 새들만 있어
술병 들라고 정성껏 부탁하네.
이인로 : 인천 사람
71. 산에 살면서
봄은 갔건만 꽃은 아직도 있고
하늘은 개었으나 골짝은 음침하다.
저 소쩍새가 한낮에 우나니
비로소 사는 곳의 깊음을 알았다.
72. 정월 보름날 밤의 동릉
실바람이라 불똥이 떨어지지 않고
긴 밤이라 차츰 초가 녹는 줄을 알겠다.
한 조각 붉은 마음이 거기 있음을 알라.
겹눈동자인 해와 달의 밝음을 도우려 함이다.
73. 소상의 밤비
모두가 푸른 강물 양쪽 언덕은 가을인데
바람에 날리는 보슬빗발이 뱃전에 흩뿌린다.
밤이 되어 강가에 배를 대고 자나니
댓잎마다 그 소리 모두가 시름이다.
74. 은대에 숙직함
그윽한 병풍 안에 촛불 그림자 희미한데
함께 자던 원앙새는 왜 각기 날으는가.
가련해라, 저 야윈 청루의 계집애들
언제나 남을 위해 시집갈 옷 짓는구나.
75. 지리산에 놀면서
두류산 멀리 높고 저녁 구름 나직하고
만 구릉 천 바위들 마치 회계산 같네.
지팡이 들고 청학동을 찾으려는데
숲 밖에 부질없이 잔나비 소리 듣네.
아득한 누대들은 삼신산이 가깝고
이끼 끼어 희미한 네 자의 제목이네.
묻노니 무릉도원이 그 어디인가
흐르는 물 지는 꽃이 사람을 헤매게 하네.
76. 술벗 이담지에게(「네 벗에게」 4수 중에서)
나는 술을 몇 잔밖에 못 마시는데
그대는 한 말의 술을 마시네.
그러나 도도히 취하고 나면
지극한 즐거움은 모두 다 같네.
두 볼에는 봄이 무르녹는 듯
온갖 시름이 모두 얼음 녹는 듯.
많고 적게 마심을 견주어 무엇하리
우선 알맞게 마실 뿐이네.
77. 불문의 벗 종령에게
지둔은 안석을 따랐고
포소는 혜휴를 사랑하였네.
옛부터 용상의 무리들
때때로 인봉들과 놀았네.
시법이야 서로 방해될 것 있는가
고금에 다 같이 흙 한 줌인 것을.
우리 함께 원적광에 있거니
어찌 이별의 시름이 있겠는가.
78. 보좌 뒤의 장지에 쓰다
동산의 꽃은 붉은 비단이요
궁전의 버들은 파란 실이다.
천만 가지로 말을 잘하는
봄꾀꼬리가 사람보다 낫구나.
김양경 : 경주 사람
79. 궁중의 당직
은대에서 명령 받고 날샐녘에 나오는데
달은 서남에 있고 물시계는 재촉한다.
재배하고 자물쇠 받아 가지고 나오나니
천문 만호가 한꺼번에 문 열린다.
80. 조상국의 독락원
이끼는 단서의 액을 새기고
항아리는 한낮의 신선을 간직했네.
맑은 기쁨은 손님과 함께하나
참 즐거움은 혼자서 차지했네.
뜰에 내리는 비에 파초가 먼저 울고
동산이 개자 풀이 절로 흐리네.
흐르는 물에 복사꽃 떠가나니
무릉도원 신선을 돌이켜 생각하네.
유승단 : 인동 사람
81. 혈구사(穴口寺)
땅이 움츠려 열흘 길을 줄이고
하늘이 낮아 이웃인 듯 가깝다.
비 내리는 밤에도 달이 보이고
바람 부는 낮에도 티끌 일지 않는다.
그믐 초하루는 조수가 달력 되고
추위 더위는 풀이 철을 알린다.
싸움터인 세상을 바라볼 때는
구름 속에 누운 사람 못내 부럽다.
82. 보령현에 자면서(宿保寧縣)
낮에 해풍현 떠나
밤 되어 보령에 닿다.
대를 울리는 바람은 잠을 깨우고
구름에 우는 비는 나그네를 붙든다.
저녁 노을에 머리가 무겁다가
아침 햇빛에 뼈가 잠깐 가볍다.
늙고 병든 몸을 비로소 알겠구나.
오직 음청을 점칠 뿐이다.
83. 앓는 눈(病目)
늙음과 병이 한꺼번에 닥쳐
한평생 동안 베옷으로 지났네.
눈앞 불똥은 갈수록 많아지고
벼루 광휘는 날마다 줄어드네.
등불 밑의 글자는 보기가 두려웁고
눈 온 뒤의 햇빛을 잇기에 부끄럽네.
금방의 이름 보기 기다리다 지치어
눈을 감고 세상 일 잊으려 힘을 쓰네.
오세재 : 자는 덕전(德全), 고창 사람
84. 북산잡영(北山雜詠)
(一)
깊은 골짝에 산꽃이 피어
산중의 봄을 알리려 하지만
꽃이 피고 지는 것 무슨 관계 있으랴.
대개는 선정에 든 사람이거니.
(二)
산사람의 마음을 시험해 보려거든
문에 들어 술에 취해 뽐내어 보라.
끝내 기뻐하거나 성을 내지 않으면
그야말로 참으로 덕이 높은 선비니라.
(三)
산사람은 함부로 드나들지 않아
옛 길에는 이끼에 발이 빠진다.
아마 세속 사람을 두려워하여
여라의 달로 나를 속였으리라.
이규보 :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85. 우물 안의 달(詠井中月)
스님이 저 달빛에 욕심이 생겨
병 속에 물과 달을 함께 길었다.
절에 돌아와 비로소 깨달았으리
병이 기울자 달도 따라 공인 것을.
86. 저녁의 조망(晩望)
이태백과 두보가 지껄이고 간 뒤에
건곤은 쓸쓸한 속에 있었다.
그러자 강산은 스스로 한가하여
조각달을 하늘에 걸어 놓았다.
87. 봄날에 절을 찾다(春日訪山寺)
바람은 부드럽고 햇볕은 따뜻하고 새소리는 시끄러운데
수양버들 그늘 속에 반쯤 문이 닫겨 있다.
뜰에 가득 떨어진 꽃, 스님은 취해 누었나니
절에는 아직 그대로 태평스런 흔적이 남아 있구나.
88. 강 위의 달밤에 나그네의 배를 바라보고(江上月夜望客舟)
벼슬아치는 한가히 피리를 가로잡고 부는데
돛배는 바람을 무릅쓰고 날으는 듯 빨리 간다.
천상의 저 달은 천하 사람이 다 함께 가졌는데
스스로 생각하나니, 나 혼자 배에 싣고 돌아온다고.
89. 강 위의 새벽비(江上曉雨)
강 기슭에 사람은 돌아가고 해오라기는 날으고
고기잡이는 고기 잡아 해 저물어 돌아온다.
희멀건 저 구름이 어떻게 비를 이루었는가.
바닷기운이 하늘을 침범해 어쩌다 가랑비 되었다.
90. 여름날에(夏日)
얇은 옷에 대자리로 창바람에 누웠다가
꾀꼬리 두세 소리에 그만 꿈을 깨었다.
총총한 잎이 꽃을 가리워 봄이 늦게 그대로 있고
엷은 구름에 해가 새어 비 속에 밝다.
91. 물고기(詠魚)
괴로워하는 붉은 고기가 물에 떴다 잠겼다......
사람들은 그것을 마음대로 즐거이 논다 하네.
가만히 생각하면 잠깐도 한가한 때 없나니
어부가 돌아가면 백로가 또 엿보네.
92. 옛 서울을 생각함(憶舊京)
황폐한 내 고향을 차마 어찌 생각하랴.
차라리 멍청이 되어 모두 잊음만 못하리.
그 중에 한층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귀법천 가에 쭈그리고 앉아 보내던 술잔이네.
93. 북산에 다시 놀면서(重游北山)
여러 번 바뀐 해에 항상 자주 놀라면서
10 년 동안 아직도 서생 그대로이네.
오랜 절에 우연히 묵은 자취 찾다가
도리어 고승 만나 옛정 이야기하네.
벽에는 지는 해에 날으는 새 그림자
산에는 가을 달에 잔나비 우는 소리.
깊은 시름과 한결같은 울기를 보내기가 어려워
때때로 뜰에 나가 혼자 거닐어 보네.
94. 감로사(甘露寺)
채색 누대가 마치 비취의 깃 같은데
푸른 산이 감돌고 물이 거듭 둘러쌌다.
해를 비추는 서리는 가을 이슬에 젖고
바다 기운은 구름을 찔러 저녁 가랑비를 흩는다.
기러기는 어쩌다 문자를 이루며 가고
해오라기는 스스로 그림을 그리며 날은다.
실바람도 일지 않아 강은 거울 같은데
길 가는 나그네는 그림자를 마주했다.
95. 여뀌꽃의 백로
앞 여울에 물고기 많아
생각이 있어 물결을 가르고 들어갔다.
사람을 보자 갑자기 놀라 일어
여뀌 언덕에 다시 모여 앉는다.
목을 세우고 사람 가기 기다리며
보스랑비에 털옷이 다 젖었다.
마음은 아직 여울 고기에 있는데
사람들은 세상을 잊고 서 있다고 말하네.
96. 꽃 꺾는 노래
진주 같은 이슬 맺은 모란 한 가지
미인은 그 꽃 꺾어 창 앞을 지나가며
부끄런 웃음으로 단랑에게 묻노니
「내 얼굴과 이 꽃과 어느 것이 더 예뻐요」
님은 일부러 장난기 섞인 말로
굳이 「그 꽃이 더 예쁘다」했다.
미인은 그 말에 시샘을 내어
꽃을 땅에 던져 밟아 문지르면서
「만일 이 꽃이 더 예쁘거들랑
오늘밤은 이 꽃과 함께 자세요」
97. 늦봄
비가 넉넉한 뜰에는 이끼가 떼지어 나고
찾는 사람 없으매 낮에도 사립문 열지 않는다.
섬돌에 떨어진 꽃이 쌓여 깊이가 한 치인데
샛바람이 쓸어갔다 또 쓸어온다.
98. 버들
봉성 서쪽 언덕에 만가지의 금빛이여
봄 시름을 꾀어내어 어둔 그늘 되었구나.
끝없는 거센 바람이 끊이지 않고 부나니
연기를 끌어오고 비에 섞여 가을이 깊어졌다.
99. 봄의 흥취
어린 매화는 떨어지고 버들가지 드리우고
봄바람을 밟는 걸음 한가히 더디어라.
생선집은 문을 닫고 사람 소리 적은데
온 강의 봄비는 파란 실이다.
100. 가을의 회포
부귀도 슬픈 가을을 어쩔 수 없어
더구나 헤어진 옷, 외로이 시만 읊네.
많은 사람의 사랑과 욕을 다 겪었는데
묻노니, 나는 언제나 돌아가 쉴까.
떨어진 나뭇잎은 우물 메우고
다듬이질 소리는 이 다락을 울리네.
애오라지 고달픈 흥취가 일어
베개 기대어 창주를 꿈꾸노라.
한시(漢詩) [101 - 200] ▼ | [201 - 300] ▼ | [301 - 400] ▼ |
1. 공후인(箜篌引) - 여옥
2. 꾀꼬리의 노래(黃鳥歌) - 유리왕
3. 우중문에게(遺于仲文) - 을지문덕
4. 외로운 돌(孤石) - 정법사
5. 분개하여 원망하는 시(憤怨詩) - 왕거인
6. 속가로 돌아오는 노래(反俗謠) - 설요
7. 산에서 내려가는 동자를 보내며(送童子下山) - 김지장
8. 가을밤 빗소리에(秋夜雨中) - 최치원
9. 임경대(臨鏡臺)
10. 금천사 주인에게(贈金川寺主人)
11. 우강 역정에서(芋江驛亭)
12. 가야산(題伽倻山)
13. 지광 상인에게(贈智光上人)
14. 밤에 악관에게(夜贈樂官)
15. 윤주 자화사에 올라(登潤州慈和寺)
16. 강남의 여자(江南女)
17. 경주 용삭사(經州龍朔寺) - 박인범
18. 배로 가면서 장수재에게(江行呈張秀才)
19. 장안의 봄날에(長安春日有感) - 최광유
20. 금중 동지의 새 대(禁中東地也新竹) - 최승로
21. 한송정의 가락(寒松亭曲) - 장연우
22. 절구(絶句) - 최충
23. 오자서의 사당(伍子壻廟) - 박인량
24. 송나라로 사신가다가 사주 구산사를 지나며(使宋過泗州龜山寺)
25. 시골 노인이 소를 타다(長源亭應製野 騎牛) - 곽여
26. 청평의 이거사에게(贈淸平李居士)
27. 도를 즐기며(樂道吟) - 이자현
28. 동궁의 봄주련(東宮春帖) - 김부식
29. 안화사에서 재를 올리다(安和寺致齋)
30. 기녀들의 뻐꾸기 노래를 듣고(聞敎坊妓昌布穀歌有感)
31. 감로사의 운을 따라(甘露寺次韻)
32. 관란사의 다락에서(觀瀾寺樓)
33. 서도(평양)(西都) - 정지상
34. 취한 뒤에(醉後)
35. 대동강(大洞江)
36. 단월역(團月驛)
37. 사람을 보내며(送人)
38. 등고사에서(題登高寺)
39. 개성사(開聖寺)
40. 장원정(長源亭)
41. 변산의 소래사(邊山蘇來寺)
42. 강릉에서 풍악으로 가는 안상인을 보내며(江陵送安上人之楓岳) - 김부의
43. 홀에 써서 섭관반에게 드림(書笏呈葉館伴) - 한교여
44. 산장의 비오는 밤(山莊雨夜) - 고조기
45. 먼 사람에게(寄遠)
46. 금양현에 자면서(宿金壤縣)
47. 가을을 느끼다(感秋回文) - 이지심
48. 낙안군의 선원에 자면서(宿樂安郡禪院) - 김돈중
49. 등명사(燈明寺) - 김돈시
50. 기생에게(贈妓) - 정습명
51. 석죽화(石竹花)
52. 경주의 여관에서(東都客館) - 김군수
53. 황룡사 우화문에 쓰다(書黃龍寺雨花門) - 최홍빈
54. 승가굴에서(題僧伽窟) - 정항
55. 평양에서(西都口號) - 이지저
56. 잡흥(雜興)(4수 중에서) - 최유청
57. 진주산수도(晋州山水圖) - 정여령
58. 임실 공관에서(題任實公館) - 김약수
59. 경인년 9월 9일에(庚寅重九) - 김신년
60. 꾀꼬리소리를 듣고(聞鶯) - 임춘
61. 겨울에 길을 가다가(冬日途中)
62. 고기잡이 늙은이(漁翁) - 김극기
63. 서루의 늦은 조망(西樓晩望)
64. 미륵사의 늙은 주지에게(贈彌勒寺住老)
65. 늦가을의 달밤(秋晩月夜)
66. 통달역(通達驛)
67. 여름(夏)(「시골집의 사철」 4수 중에서)
68. 잉불역(仍弗驛)
69. 고원역(高原驛)
70. 천심원의 벽에 쓰다(題千尋院壁) - 이인로
71. 산에 살면서(山居)
72. 정월 보름날 밤의 동릉(元夕燈籠詩)
73. 소상의 밤비(瀟湘夜雨)
74. 은대에 숙직함(夜直銀坮)
75. 지리산에 놀면서(遊智異山)
76. 술벗 이담지에게(贈酒友李湛之)(「네 벗에게」 4수 중에서)
77. 불문의 벗 종령에게(四贈公門友宗聆)
78. 보좌 뒤의 장지에 쓰다(書 座後障上) - 김양경
79. 궁중의 당직(內直)
80. 조상국의 독락원(趙相國獨樂園) - 유승단
81. 혈구사(穴口寺)
82. 보령현에 자면서(宿保寧縣)
83. 앓는 눈(病目) - 오세재
84. 북산잡영(北山雜詠)(三首) - 이규보
85. 우물 안의 달(詠井中月)
86. 저녁의 조망(晩望)
87. 봄날에 절을 찾다(春日訪山寺)
88. 강 위의 달밤에 나그네의 배를 바라보고(江上月夜望客舟)
89. 강 위의 새벽비(江上曉雨)
90. 여름날에(夏日)
91. 물고기(詠魚)
92. 옛 서울을 생각함(憶舊京)
93. 북산에 다시 놀면서(重游北山)
94. 감로사(甘露寺)
95. 여뀌꽃의 백로(蓼花白鷺)
96. 꽃 꺾는 노래(折花行)
97. 늦봄(春晩) - 진화
98. 버들(柳)
99. 봄의 흥취(春興)
100. 가을의 회포(秋日書懷)
1. 공후인( 引)
그렇게도 그 강을 건너지 말라 했는데
당신은 끝내 건너시었소.
건너다 물에 빠져 죽으시니
아아 님이시여, 이 일을 어찌하리까.
고조선의 나루뱃사공인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이 지은 것이다. 자고는 새벽에 일어나 배를 저어 나갔다. 어떤 미치광이 늙은이가 물결이 거센 강을 건너갔는데, 그 아내가 뒤쫓아오면서 만류했으나 미치광이는 듣지 않고 건너가다가 마침내 물에 빠져 죽었다. 그 아내는 공후를 타면서 노래했다. 그 소리가 매우 애절했고, 공후 가락이 끝나자 아내도 마침내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자고가 돌아와 그 아내에게 이 사실을 말하자 그 아내도 매우 슬퍼하면서 공후를 잡아 그 소리를 흉내내었다.
2. 꾀꼬리의 노래(黃鳥歌)
팔팔 날아 오고가는 꾀꼬리들이여
암수컷이 모두 짝을 지었네.
생각하면 나는 외로운 몸
누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리.
왕은 두 여자를 취하였는데 첫째는 화희이니 골천 사람의 딸이요 또 한 여자는 치희이니 한나라 사람이었다. 두 여자는 왕의 사랑을 다투다가 화희가 치희에게 <너는 한나라 사람의 종년으로서 어찌 그처럼 무례하냐> 하였다. 치희는 부끄럽고 슬퍼서 도망쳐 돌아갔다. 왕은 말을 달려 쫓아갔으나 치희는 성을 내어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나무 밑에 앉아 쉬다가 날아드는 꾀꼬리를 보고 느낌이 있어 이 노래를 지었다.
3. 우중문에게(遺于仲文)
당신의 신비로운 계책은 천문을 환히 알고
당신의 미묘한 헤아림은 지리를 꿰뚫었네.
싸움에 이겨 이름 이미 높았거니
만족할 줄을 알아 부디 그만두시오.
수양제가 우중문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을 침노해 들어왔다. 을지문덕은 살수를 의지해 그것을 막으면서 사자 편에 이 시를 보내어 그만 돌아가기를 권하였다.
4. 외로운 돌(孤石)
먼 돌이 바로 공중에 생겨
편편한 호수에 사방이 탁 틔었다.
바위 뿌리에서는 항상 물을 뿌리고
나무 끝에서는 바람을 잠재운다.
물에 누웠어도 그림자 맑고
놀을 침노하다 다시 붉게 오른다.
여러 봉우리 밖에 홀로 빼어나고
흰 구름 속에 외로이 우뚝하다.
정법사(定法師) 고구려 스님. 일찍이 후주(後周)에 들어가 표법사(標法師)와 교유하다.
5. 분개하여 원망하는 시(憤怨詩)
우공이 목놓아 울매 3년 내리 가물었고
추연이 슬픔을 품으매 5월 서리 내렸네.
지금 나의 깊은 시름이 도리어 옛날 같건만
하늘은 말이 없이 그저 푸를 뿐이네.
전당시에 <신라 여왕인 만(曼)때에 어떤 사람이 그 당시의 정치를 비방하여 길가에 방을 써 붙였다. 왕은 그것을 은자 왕거인의 소행이라 생각하고 옥에 가두었다. 거인은 이 시를 지어 감옥의 벽에 써 붙였다>고 하였다.
6. 속가로 돌아오는 노래(反俗謠)
구름 같은 마음이여, 정숙하게 생각하고
골짝의 쓸쓸함이여, 찾는 사람이 없네.
예쁜 풀의 꽃다움이여, 향기로움을 생각하나니
아아, 나는 어찌하리, 이 젊은 청춘을.
전당시에 <설요는 동명국 사람으로서 좌무위장군 승충의 딸로서 15세에 머리를 깍고 출가하여 6년을 지내다가 이 노래를 부르며 속가로 돌아와, 벼슬하기 전에 입던 옷으로 곽원진의 첩이 되었다>고 했다. 생각하건대 동명국은 신라를 가리킴인 듯.
7. 산에서 내려가는 동자를 보내며(送童子下山)
쓸쓸한 공문에서 너는 집을 생각해
운방을 하직하고 구화산을 내려간다.
죽란에서 대말 타기 좋아해 그리 가고
금지에서 금모래를 모으기 게을렀다.
병에 보탤 시냇물에 달을 부르지 말라
차 다리는 병에서는 꽃 즐기기 쉬웠구나.
잘 가거라, 부디 자주 눈물 흘리지 말라
노승이 짝이 되고 놀과 안개 있지 않니 ?
전당시에 <김지장은 신라의 왕자로서 지덕 초년에 바다를 건너 구화산에 살았는데, 이 시는 거기서 지은 것이다>하였다.
8. 가을밤 빗 소리에(秋夜雨中)
가을바람에는 괴로운 시뿐이던가
세상 길에는 친한 벗이 드물구나.
한밤 창밖에 보슬비 내리나니
등불 앞의 마음은 그저 아득하여라.
최치원 : 자는 고운. 12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희종 건부 1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변종사가 되고, 뒤에 본국으로 돌아와 한림학사가 되다. 만년에 가야산에 들어가 세상을 마치다. 시호는 문창후. 문묘에 배향하다. 저서로 [계원필경]이 세상에 유행하다.
9. 임경대(臨鏡臺)
안개 속의 낮은 산들 질펀히 흐르는 물
거울 속의 집들이 푸른 봉을 마주했다.
어디서 온 배 한 척이 바람 받아 가는데
언뜻 보인 외로운 새는 아득히 자취 없다.
10. 금천사 주인에게(贈金川寺主人)
흰 구름 시냇가에 처음으로 절을 지어
삼십년 동안 여기 내리 머무네.
문앞 한 가닥 길을 웃으며 가리키면서
이 산을 내려만 가면 천 갈래 길이 있네.
11. 우강 역정에서(芋江驛亭)
강가에 말 세우고 오는 배를 기다리는데
질펀한 연기물결은 만고의 시름이다.
지금이라도 산을 깎고 물을 말리운다면
이 인간의 이별이 비로소 그치련만…….
12. 가야산(題伽倻山)
돌 사이 쏟는 물에 온 산이 부르짖어
곁의 사람 말소리도 알아듣기 어려워라.
시비 소리 귀에 들까 언제나 두려워해
일부러 흐르는 물로 온 메를 둘러쌌다.
13. 지광 상인에게(贈智光上人)
구름 곁에 절을 짓고
4년 남짓 참선한다.
지팡이는 산 밖을 나간 적 없고
붓은 서울에 보낸 편지 없었다.
대홈통에는 물소리가 급하고
소나무의 창에는 해 그림자 성기다.
높은 경계라 시 또한 끝이 없고
눈을 감고는 진여를 깨닫는다.
14. 밤에 악관에게(夜贈樂官)
사람의 일은 성했다 쇠하나니
덧없는 생이 실로 슬프다.
그 누가 알리, 천상의 그 가락을
이 바닷가에 내려와 볼 줄이야.
물가의 전각에서 꽃 구경하고
바람 드는 창에서 달을 보는 때이다.
수염을 더위잡기 이제 다 틀렸거니
그대와 함께 두 줄 눈물 흘린다.
15. 윤주 자화사에 올라(登潤州慈和寺)
산에 올라 잠깐 동안 세상 일 멀리하여
흥망을 생각하면 한이 더욱 새롭네.
화각 소리 속에는 아침 저녁 물결이요
청산 그림자 속에는 고금의 사람이네.
서리에 꺾인 옥수에는 꽃이 주인이 없고
바람이 따뜻한 금릉에는 풀이 절로 봄이네.
다행히 사령운의 남긴 경치가 있어
시인들의 마음을 항상 시원하게 하네.
16. 강남의 여자(江南女)
강남의 풍속이 참으로 음탕하여
기르는 딸이 아양떨고 예뻤다.
성품 되기는 바느질을 멀리하고
화장을 마치고는 악기 고른다.
그러나 배우는 것 아음 아니요
대개는 봄마음에 끄달리나니.
스스로 일컫기를 꽃다운 얼굴이요
한참 나이를 늘 차지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웃집 여자들의
종일 내내 베 짜는 것 비웃나니
베 짜기에 그 몸을 괴롭히지만
그 비단옷은 네 몫이 아니란다.
17. 경주 용삭사(經州龍朔寺)
으리으리한 신선의 집이 푸른 하늘에 솟아
달 속의 생가 소리 역력히 들려 오네.
등불은 반딧불을 흔들어 새의 길을 밝히고
사다리는 무지개 그림자를 돌아 바위문에 거꾸러졌네.
사람은 흐르는 물을 따르거니 언제나 그칠는고
대는 찬 산을 띠어 만고에 푸르렀네.
시험삼아 옳고 그름과 공과 색의 그 속을 물어보면
한 백년의 시름과 취함이 앉아서 곧 깨네.
박인범 : 벼슬은 저작
18. 배로 가면서 장수재에게(江行呈張秀才)
억새풀꽃 물가에 늦게야 배를 대어
찬 이슬 벌레 소리 언덕에 가득 가을이네.
민물이 떨어지는 오랜 여울에는 모래 부리가 잠기고
해 넘은 찬 섬에는 나무 모습도 시름이네.
강 위를 날으는 기러기 떼를 바람이 몰아가고
하늘 끝의 외로운 배를 달이 보내네.
우리 모두 나그네로 나이는 벌써 늙었나니
이 심사를 말할 때마다 눈물이 몰래 흐르네.
19. 장안의 봄날에(長安春日有感)
삼베옷으로 갈림길의 티끌을 털기 어려워
흰 머리 여윈 얼굴이 새벽 거울에 새롭다.
상국의 좋은 꽃도 시름 속에만 곱고
고향의 꽃다운 나무는 꿈속의 봄이어라.
거룻배의 으스름달에 바다에 뜬 일 생각하고
여윈 말로 관하의 나루 묻기에 고달프다.
다만 형설의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
버드나무의 꾀꼬리 우는 소리에 마음이 너무 슬프다.
최광유 : 중국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다
20. 금중 동지의 새 대(禁中東地也新竹)
죽순 껍질이 막 열려 가루마디가 분명한데
머리 숙이고 길에 들자 녹음이 무르녹다.
님의 놀이에 어찌 구태 하늘풍악 울리랴
금바람 절로 있어 옥소리 내는 것을.
최승로 : 경주 사람. 성종 때에 정광으로 있다가 수시중까지 되었으며 청하후에 봉해지다. 시호는 문정
21. 한송정의 가락(寒松亭曲)
한송정의 밤은 달도 밝아라
경포의 가을에는 물결도 잔다.
슬피 울면서 그 속을 오락가락
갈매기 한 마리는 믿음성이 있어라
22. 절구(絶句)
촛불 켜지 말라, 뜰에 달빛 가득하고
손님 부르지 말라, 자리에 산빛 드네.
거기에 다시 솔거문고가 악보 밖을 타나니
다만 혼자 즐길 뿐, 남에게는 전할 수 없네.
최충(崔沖) : 자(字)는 호연(浩然). 해주 사람. 목종때 급제하고 문종때 문하시랑이 되었는데, 그때 사람들은 그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 일컬었다. 시호는 문헌(文憲).
23. 오자서의 사당(伍子壻廟)
동문에 눈을 걸어 분을 다 풀지 못해
푸른 강은 천고에 물결을 일으킨다.
지금 사람은 옛 현인의 뜻을 알지 못하고
조수 머리가 몇 자나 높은가고 물을 뿐이다.
박인량(朴寅亮) : 자(字)는 대천(代天)
24. 송나라로 사신가다가 사주 구산사를 지나며(使宋過泗州龜山寺)
높은 바위와 괴이한 돌이 산을 이루었는데
그 위에 절이 있어 물이 사방을 돌았다.
탑의 그림자는 물결을 뒤치는 강 밑에 거꾸러졌고
경쇠 소리는 달을 흔들며 구름 속에 사라진다.
문앞의 나그네 배에는 큰 물결이 빠르고
대숲 밑의 중의 바둑에는 한낮이 한가하다.
한번 황화 받들어 참아 이별 아끼나니
여기 또 시를 남겨 다시 오르기 약속한다.
25. 시골 노인이 소를 타다(長源亭應製野 騎牛)
태평스런 모습으로 마음대로 소를 타고
안개비에 반쯤 젖어 밭두둑을 지나간다.
알겠거니, 물가집이 가까이 있겠구나.
그를 따라 지는 해가 시냇물 곁에 있다.
곽여 : 자는 몽득(夢得)
26. 청평의 이거사에게(贈淸平李居士)
청평 산수가 동햇가에 으뜸인데
우연히 또 옛 친구를 만나게 됐네.
삽십년 전에 우리 함께 과거에 급제하고
그 뒤에 천리 밖에 각기 헤어져 살았었네.
뜬 구름은 동리에 들어가도 더러운 일 없었고
밝은 달은 시내를 비추어도 티끌에 물들지 않네.
서로 마주 보고도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는 곳
담연히 옛 마음을 서로 비추어 주네.
27. 도를 즐기며(樂道吟)
내 집은 푸른 산의 이 봉우리
이전부터 보배로운 거문고 있어
언제고 한 가락 탈 수 있지만
이 소리 아는 사람 얼마나 될까.
이자현 : 자는 진정(眞精)
28. 동궁의 봄주련(東宮春帖)
새벽빛은 다락집 모서리에 밝고
봄바람은 버드나무 가지 끝에 분다.
계인은 막 새벽을 알리고 나서
침문에 조회하러 이미 떠났다.
김부식 : 경주 사람
29. 안화사에서 재를 올리다(安和寺致齋)
늦은 가을이라, 뜰앞 나무 그림자가 빽빽하고
고요한 밤이라, 돌 위의 샘물 소리가 높다.
자다 깨어 썰렁하여 마치 비가 내릴 듯
갈대 속 어선에서 자던 일 생각난다.
30. 기녀들의 뻐꾸기 노래를 듣고(聞敎坊妓昌布穀歌有感)
미인들이 아직도 옛노래를 부르는데
뻐꾸기는 날아들고 상수리나무는 드물다.
그것은 마치 예상우의곡 같아
개원의 남은 노인들 눈물이 옷 적신다.
31. 감로사의 운을 따라
속된 사람의 오지 않는 곳
올라와 바라보면 마음 트인다.
산의 모습은 가을에 더욱 좋고
강물 빛깔은 밤에도 밝다.
흰 물새는 높이 날아 사라지고
외로운 배는 홀로 가기 가볍다.
부끄러워라, 달팽이 뿔 위에서
반평생 동안 공명 찾아 허덕였다.
32. 관란사의 다락에서
유월 인간은 더위가 한창인데
이 다락엔 한종일 맑은 바람 넉넉하다.
산 모습과 물빛깔은 예와 이제 없는데
세속 사정과 사람의 정은 다르고 같음이 있다.
거룻배는 거울 속을 외로이 가고
자고새는 그림 속을 짝을 지어 날은다.
슬프다, 세상 일은 마치 재갈과 같아
대머리진 이 늙은이를 놓아주지 않구나.
33. 서도(평양)
서울 거리 봄바람에 보슬비 지난 뒤에
먼지는 일지 않고 버들가지 늘어졌네.
세도집과 안방에서 목메는 노랫가락
바로 그 모두가 이원제자 집들이네.
정지상 : 서경 사람
34. 취한 뒤에
복사꽃 분홍비에 새들은 지저귀고
집 둘레 푸른 산에 간간이 파란 남기
비스듬 오사모를 바루지도 않은 채
술에 취해 꽃둑에 자며 강남을 꿈꾸노라.
35. 대동강
비 개인 긴 둑에는 풀빛도 하 많아라.
그대 보내는 남포에는 슬픈 노래 울리나니.
이 대동강 물은 언제나 다할는고
해마다 이별 눈물이 물결을 더하는 것을.
36. 단월역
술에 취해 병풍 아래 베개 베고 누었는데
앞마을의 첫닭소리에 꿈을 깨었네.
밤이 깊어 비 개던 일 도로 생각하나니
먼 하늘 외론 달이 다락 서쪽에 있네.
37. 사람을 보내며
뜰앞에는 나뭇잎 떨어지고
책상 밑에는 벌레소리 슬프다.
홀홀히 걷잡을 수 없나니
끝없이 자꾸 어드메로 가는가.
한 조각 마음은 산이 끝나는 곳이요
외로운 꿈은 달이 밝은 때이다.
이 남포에 봄 물결 푸르거니
그대는 뒷기약을 저버리지 말라.
38. 등고사에서
돌길은 꼬불꼬불, 이끼는 비단 무늬
이끼 끝나는 곳에 선관에 들어왔네.
땅은 푸른 하늘과 그다지 멀지 않고
중은 흰 구름과 마주해 한가하네.
날이 따스해 제비는 별전으로 날아들고
달이 밝아 원숭이 울어 비인 산을 울리네.
사내 대장부, 본래 사방의 뜻 품었거니
내 어찌 포과처럼 여기 매어 있는가.
39. 개성사
백 걸음에 아홉 굽이 높은 산에 오르노니
반공에 있는 집이 오직 두어 칸이네.
신령스런 맑은 샘에 찬 물이 떨어지고
암담한 오랜 벽에 파란 이끼 아롱졌네.
돌 위의 솔이 늙어, 한 조각의 달이요
하늘 끝에 구름 낮아, 천 점의 산들이네.
속세의 어떤 일도 감히 닿지 못하나니
혼자 유인만이 언제고 한가하네.
40. 장원정
드높은 두 정자가 강을 베고 누웠는데
맑은 밤이라 한 점 티끌도 없네.
나그네 배를 바람이 보내나니 조각조각 구름이요
집 기와에 이슬이 내렸나니 옥이 인린하여라.
버들 속에서 사립문을 여나니 8, 9채의 집이요
밝은 달에 발을 걷나니 세넷의 사람이네.
아득해라, 봉래산은 그 어디쯤인고.
깊은 꿈에 꾀꼬리는 이 봄을 지저귀네.
41. 변산의 소래사
묵은 길이 적막한데 솔뿌리 얽히었고
하늘 가까워 별을 손으로 만질 듯.
뜬구름과 흐르는 물처럼 절에 온 나그네여
붉은 잎 푸른 이끼에 중은 사립문 닫네.
썰렁한 가을 바람은 해질녘에 불고
차츰 밝은 산달에 잔나비 울어예네.
기특해라, 흰 눈썹의 늙은 중이여
여러 해로 시끄러운 세상 꿈꾼 일 없네.
42. 강릉에서 풍악으로 가는 안상인을 보내며
강릉에는 날이 따셔 꽃이 먼저 피는데
풍악은 아직 추워 눈이 녹지 않았으리.
우스워라, 스님의 산수 즐기는 성벽이여
간 곳마다 어디서나 소요하지 못하누나.
김부의 : 김부식의 아우
43. 홀에 써서 섭관반에게 드림
눈물 줄줄 흘리며 헤어지려 하나니
이 생에선 다시 올 기약 없구나.
외람되게 보옥으로 깊은 뜻을 말하노니
물건 볼 때 그대는 그리워하는 이 사람을 잊지 말아라.
한교여
44. 산장의 비오는 밤
송당 어젯밤에 비 내리더니
서쪽 시냇물소리를 누워 들었다.
새벽에 뜰앞 나무 바라볼 때에
자던 새는 아직도 둥우리 안 떠났다.
고조기 : 제주 사람
45. 먼 사람에게
정성어린 이 편지를 옥문관에 부치노니
부디 자중자애하여 음식 많이 드시오.
제후에 봉해짐이 바로 남아 일이거니
누란을 베지 않고는 돌아올 생각 마오.
46. 금양현에 자면서
새벽 서리의 숲에 새들이 지저귀고
평상에 자던 손이 바람에 놀라 깬다.
추녀에는 반달이 아직 남았고
사람은 하늘 끝의 한쪽에 있다.
떨어진 잎은 돌아갈 길을 묻고
찬 가지에는 오랜 안개 걸리었다.
강동으로 갈 길은 아직도 멀었는데
이 강마을에서 이 가을도 다 간다.
47. 가을을 느끼다
더위 흩어져 가을 이른 줄 알고
시름스러워 조금은 슬퍼지네.
어지러운 소나무는 푸른 일산 눕혔고
흐르는 물은 푸른 여라 길었네.
언덕이 멀어 엉긴 연기가 희고
다락이 높아 시원한 기운 나네.
하늘 복판의 밝은 달이 좋아라
그윽한 방에 그 빛을 비추네.
이지심
48. 낙안군의 선원에 자면서
우연히 온 산 곁의 절이여
향기로운 연기에 방문 활짝 열리었다.
깊은 수풀은 대나무 잣나무뿐
경계 고요해 티끌 한 점도 없다.
속인 귀로써 중 이야기 듣나니
시름하는 창자가 술잔 얻은 듯.
조용히 이미 맑고 시원하거니
하물며 또 달빛이 밝음이랴.
김돈중 : 김부식의 아들
49. 등명사
절이 멀리 아득한 푸른 물결 눌렀나니
올라와 바라보면 마치 바다 한복판인 듯.
발을 걷으면 대숲 그림자 성기기도 배기도
베개 기대면 여울물 소리 낮다 또 높네
밤이 고요해 경다락에는 향불 심지 차갑고
달이 밝아 손님의 침상에는 칡두건이 시원하네.
슬프다, 이 좋은 경치에 머물 인연이 없어
한종일 허덕허덕 입을 위해 바쁘네.
김돈시 : 돈중의 아우
50. 기생에게
온갖 꽃 속에서도 맑고 고운 그 얼굴
갑자기 몰아치는 미친 바람 앞에 붉은빛 다 가셨다.
수달골로도 고치지 못하는 옥같은 그 볼이여
오릉의 공자들의 그 한이 끝이 없다.
정습명 : 연일 사람
51. 석죽화
세상 사람은 붉은 모란 좋아해
온 집안에 모두 가꾸네.
누가 알리, 풀 거친 들에도
또한 좋은 꽃떨기 있는 줄을.
마을 뭇둑 달 아래 그 빛깔 투명하고
언덕 나무 바람에 그 향기 불려 오네.
구석진 시골이라 찾는 공자 없기에
아리따운 그 맵시는 촌로에게 맡겨졌네.
52. 경주의 여관에서
무열왕의 자손이요 문열의 집안
계림의 진골들도 자랑할 수 없으리.
저 고향은 아직도 동쪽 하늘 밑에 있거니
지금 다행히 여기 와서 사신이 되었구나.
김군수 : 돈중의 아들
53. 황룡사 우화문에 쓰다
늙은 나무에 북풍이 울고
잔물결 위에 저녁별이 떠돈다.
이리저리 거닐며 지난 일 생각할 때
어느결에 눈물이 옷길을 다 적신다.
최홍빈
54. 승가굴에서
험준한 돌다리를 구름 밟고 가나니
빛나는 이은 하늘이 마치 화성 같아라.
가을 이슬 조금 내려 천리에 시원하고
저녁볕이 멀리 잠겨 온 강이 다 밝네.
허공에 어린 이내는 향기로운 이삭에 이었고
골짝에 우는 한가한 새는 경쇠 소리 갈마드네.
부러워라, 고승의 그 마음이여
세상길의 영리에는 도무지 뜻이 없네.
정항
55. 평양에서
대동강 물은 유리가 파랗고
장락궁 꽃은 비단이 붉다.
임금님의 한 번 거둥이 장한 일이 아니라
태평스런 풍월을 백성들과 함께하리.
이지저
56. 잡흥(4수 중에서)
(一)
봄풀들이 어느새 푸르렀구나.
동산 가득히 나비 날은다.
동쪽 바람이 잠을 꼬드기다가
침상의 옷자락을 불어 일으킨다.
깨어나니 적막해 아무 일 없고
숲 밖의 저녁볕이 쏘아든다.
기둥을 기대 한숨지으려 하다가
어느새 고요히 세상 잊었다.
최유청
57. 진주산수도
몇 점 푸른 산이 호수 베고 누웠는데
그대는 이것을 바로 진양의 그림이라 하네.
물가의 오막살이집 하도 많건만
거기 있는 우리 집은 그림에는 없구나.
정여령
58. 임실 공관에서
늙은 가시숲을 헤치고 오랜 시내 찾아드니
집집마다 나물밥도 한껏 먹지 못하네.
산새들은 백성을 걱정하는 내 뜻 모르고
숲속에서 마음대로 재잘거릴 뿐이네.
김약수
59. 경인년 9월 9일에
서울바닥에 전쟁 일어
사람 죽여 어지러운 삼실 같다.
그러나 좋은 때를 저버릴 수가 없어
흰 막걸리에 노란 국화 띄운다.
김신윤
60. 꾀꼬리소리를 듣고
시골집에 오디 익고 보리는 여물려 하고
푸른 나무에 꾀꼬리 울음 처음 듣는다.
꽃을 좋아하는 서울 나그네를 알아보는 듯
은근히 자꾸 지저귀며 그칠 줄을 모른다.
임춘 : 서하 사람
61. 겨울에 길을 가다가
이른 새벽에 혼자서 낙주성 나와
장정·단정을 얼마나 지났던고.
말을 타고 가면서 가랑눈발 헤치고
채찍 들고 읊으면서 푸른 봉우리 센다.
하늘 끝에 달이 떨어져 돌아갈 마음을 재촉하고
들 밖에 바람이 차가와 취한 술기운 깬다.
가다 머무는 쓸쓸한 외로운 마을
집집마다 언제나 사립문 일찍 닫는다.
62. 고기잡이 늙은이
하늘이 아직 고기잡이 늙은이를 용서치 않아
일부러 강호에 보내 순풍을 적게 했네.
사람 세상의 험함을 그대는 웃지 말라
자기가 오히려 급류에 있는 것을…….
김극기 : 경주 사람
63. 서루의 늦은 조망
강바람은 솔솔 봄숲에 불어오고
찬 해는 어둑어둑 저녁에 누워 있다.
물빛은 하늘에 닿고 연기는 땅을 덮어
산골짝과 여울의 나무꾼, 낚시꾼은 있는 듯 없는 듯도…….
64. 미륵사의 늙은 주지에게
숲 끝은 아득하고 길은 구불구불한데
구석진 이 경계를 속인에게 왜 알렸는가.
오직 솔가지의 눈옷 입은 저 두루미만이
스님이 처음 와서 이 초막 얽음 보았으리.
65. 늦가을의 달밤
저녁 되자 사나운 바람이 나무 끝에 일어나
날으는 서리를 보지는 못하나 나뭇잎 소리 말랐다.
창을 열었으나 밝은 달을 맞이할 생각 없나니
야윈 몸이라 가을이 오면 밤추위를 겁낸다.
66. 통달역
갑자기 금빛 실을 떨치는 연기 속의 수양버들
가고 보내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꺽이었던가.
숲 밖의 매미 한 마리 이별의 설움을 잘 알아
해질녘에 소리를 끌고 와서 그 가지에 오르네.
67. 여름(「시골집의 사철」 4수 중에서)
들의 버들은 그늘이 한창 쏘물고
언덕의 뽕은 그 잎이 아직 드물다.
꿩은 새끼를 위해 여윈 병아리를 먹이고
누에는 철이 되어 굵은 고치 만든다.
더운 바람은 보리밭 뚝에 일고
찬 빗발은 이끼 낀 물가에 어둡다.
적막하여라, 찾는 사람이 없어
시냇가의 사립문을 낮에도 닫아 둔다.
68. 잉불역
멀고도 한가한 산 밑 길이여
말 가는 대로 맡겨 두고 가을을 읊어 본다.
물속에는 까끄라기를 문 게가 보이고
나무에는 잎에 가린 매미 없다.
시냇물 소리는 맑기 비와 같은데
들의 기운은 연기처럼 희부옇다.
밤이 들어 외로운 가게에서 자나니
시골 농부들은 아직 자지 않는다.
69. 고원역
백년의 덧없는 생이 50이 가까운데
기구한 세상 길이 통한 나루 적었네.
나라를 떠나 3년에 무슨 일을 이루었던가
만리에 집에 돌아가는 이 한 몸 뿐이네.
숲속의 새는 정이 있어 나를 보고 우는데
들의 꽃은 말없이 머무는 사람 비웃네.
시마가 재촉해 와서 나를 괴롭히나니
궁한 시름을 기다리지 말라, 이미 고생인 것을.
70. 천심원의 벽에 쓰다
손님을 기다려도 손님은 오지 않고
스님을 찾았으나 스님도 또한 없네.
오직 저 숲 밖에 새들만 있어
술병 들라고 정성껏 부탁하네.
이인로 : 인천 사람
71. 산에 살면서
봄은 갔건만 꽃은 아직도 있고
하늘은 개었으나 골짝은 음침하다.
저 소쩍새가 한낮에 우나니
비로소 사는 곳의 깊음을 알았다.
72. 정월 보름날 밤의 동릉
실바람이라 불똥이 떨어지지 않고
긴 밤이라 차츰 초가 녹는 줄을 알겠다.
한 조각 붉은 마음이 거기 있음을 알라.
겹눈동자인 해와 달의 밝음을 도우려 함이다.
73. 소상의 밤비
모두가 푸른 강물 양쪽 언덕은 가을인데
바람에 날리는 보슬빗발이 뱃전에 흩뿌린다.
밤이 되어 강가에 배를 대고 자나니
댓잎마다 그 소리 모두가 시름이다.
74. 은대에 숙직함
그윽한 병풍 안에 촛불 그림자 희미한데
함께 자던 원앙새는 왜 각기 날으는가.
가련해라, 저 야윈 청루의 계집애들
언제나 남을 위해 시집갈 옷 짓는구나.
75. 지리산에 놀면서
두류산 멀리 높고 저녁 구름 나직하고
만 구릉 천 바위들 마치 회계산 같네.
지팡이 들고 청학동을 찾으려는데
숲 밖에 부질없이 잔나비 소리 듣네.
아득한 누대들은 삼신산이 가깝고
이끼 끼어 희미한 네 자의 제목이네.
묻노니 무릉도원이 그 어디인가
흐르는 물 지는 꽃이 사람을 헤매게 하네.
76. 술벗 이담지에게(「네 벗에게」 4수 중에서)
나는 술을 몇 잔밖에 못 마시는데
그대는 한 말의 술을 마시네.
그러나 도도히 취하고 나면
지극한 즐거움은 모두 다 같네.
두 볼에는 봄이 무르녹는 듯
온갖 시름이 모두 얼음 녹는 듯.
많고 적게 마심을 견주어 무엇하리
우선 알맞게 마실 뿐이네.
77. 불문의 벗 종령에게
지둔은 안석을 따랐고
포소는 혜휴를 사랑하였네.
옛부터 용상의 무리들
때때로 인봉들과 놀았네.
시법이야 서로 방해될 것 있는가
고금에 다 같이 흙 한 줌인 것을.
우리 함께 원적광에 있거니
어찌 이별의 시름이 있겠는가.
78. 보좌 뒤의 장지에 쓰다
동산의 꽃은 붉은 비단이요
궁전의 버들은 파란 실이다.
천만 가지로 말을 잘하는
봄꾀꼬리가 사람보다 낫구나.
김양경 : 경주 사람
79. 궁중의 당직
은대에서 명령 받고 날샐녘에 나오는데
달은 서남에 있고 물시계는 재촉한다.
재배하고 자물쇠 받아 가지고 나오나니
천문 만호가 한꺼번에 문 열린다.
80. 조상국의 독락원
이끼는 단서의 액을 새기고
항아리는 한낮의 신선을 간직했네.
맑은 기쁨은 손님과 함께하나
참 즐거움은 혼자서 차지했네.
뜰에 내리는 비에 파초가 먼저 울고
동산이 개자 풀이 절로 흐리네.
흐르는 물에 복사꽃 떠가나니
무릉도원 신선을 돌이켜 생각하네.
유승단 : 인동 사람
81. 혈구사(穴口寺)
땅이 움츠려 열흘 길을 줄이고
하늘이 낮아 이웃인 듯 가깝다.
비 내리는 밤에도 달이 보이고
바람 부는 낮에도 티끌 일지 않는다.
그믐 초하루는 조수가 달력 되고
추위 더위는 풀이 철을 알린다.
싸움터인 세상을 바라볼 때는
구름 속에 누운 사람 못내 부럽다.
82. 보령현에 자면서(宿保寧縣)
낮에 해풍현 떠나
밤 되어 보령에 닿다.
대를 울리는 바람은 잠을 깨우고
구름에 우는 비는 나그네를 붙든다.
저녁 노을에 머리가 무겁다가
아침 햇빛에 뼈가 잠깐 가볍다.
늙고 병든 몸을 비로소 알겠구나.
오직 음청을 점칠 뿐이다.
83. 앓는 눈(病目)
늙음과 병이 한꺼번에 닥쳐
한평생 동안 베옷으로 지났네.
눈앞 불똥은 갈수록 많아지고
벼루 광휘는 날마다 줄어드네.
등불 밑의 글자는 보기가 두려웁고
눈 온 뒤의 햇빛을 잇기에 부끄럽네.
금방의 이름 보기 기다리다 지치어
눈을 감고 세상 일 잊으려 힘을 쓰네.
오세재 : 자는 덕전(德全), 고창 사람
84. 북산잡영(北山雜詠)
(一)
깊은 골짝에 산꽃이 피어
산중의 봄을 알리려 하지만
꽃이 피고 지는 것 무슨 관계 있으랴.
대개는 선정에 든 사람이거니.
(二)
산사람의 마음을 시험해 보려거든
문에 들어 술에 취해 뽐내어 보라.
끝내 기뻐하거나 성을 내지 않으면
그야말로 참으로 덕이 높은 선비니라.
(三)
산사람은 함부로 드나들지 않아
옛 길에는 이끼에 발이 빠진다.
아마 세속 사람을 두려워하여
여라의 달로 나를 속였으리라.
이규보 :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85. 우물 안의 달(詠井中月)
스님이 저 달빛에 욕심이 생겨
병 속에 물과 달을 함께 길었다.
절에 돌아와 비로소 깨달았으리
병이 기울자 달도 따라 공인 것을.
86. 저녁의 조망(晩望)
이태백과 두보가 지껄이고 간 뒤에
건곤은 쓸쓸한 속에 있었다.
그러자 강산은 스스로 한가하여
조각달을 하늘에 걸어 놓았다.
87. 봄날에 절을 찾다(春日訪山寺)
바람은 부드럽고 햇볕은 따뜻하고 새소리는 시끄러운데
수양버들 그늘 속에 반쯤 문이 닫겨 있다.
뜰에 가득 떨어진 꽃, 스님은 취해 누었나니
절에는 아직 그대로 태평스런 흔적이 남아 있구나.
88. 강 위의 달밤에 나그네의 배를 바라보고(江上月夜望客舟)
벼슬아치는 한가히 피리를 가로잡고 부는데
돛배는 바람을 무릅쓰고 날으는 듯 빨리 간다.
천상의 저 달은 천하 사람이 다 함께 가졌는데
스스로 생각하나니, 나 혼자 배에 싣고 돌아온다고.
89. 강 위의 새벽비(江上曉雨)
강 기슭에 사람은 돌아가고 해오라기는 날으고
고기잡이는 고기 잡아 해 저물어 돌아온다.
희멀건 저 구름이 어떻게 비를 이루었는가.
바닷기운이 하늘을 침범해 어쩌다 가랑비 되었다.
90. 여름날에(夏日)
얇은 옷에 대자리로 창바람에 누웠다가
꾀꼬리 두세 소리에 그만 꿈을 깨었다.
총총한 잎이 꽃을 가리워 봄이 늦게 그대로 있고
엷은 구름에 해가 새어 비 속에 밝다.
91. 물고기(詠魚)
괴로워하는 붉은 고기가 물에 떴다 잠겼다......
사람들은 그것을 마음대로 즐거이 논다 하네.
가만히 생각하면 잠깐도 한가한 때 없나니
어부가 돌아가면 백로가 또 엿보네.
92. 옛 서울을 생각함(憶舊京)
황폐한 내 고향을 차마 어찌 생각하랴.
차라리 멍청이 되어 모두 잊음만 못하리.
그 중에 한층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귀법천 가에 쭈그리고 앉아 보내던 술잔이네.
93. 북산에 다시 놀면서(重游北山)
여러 번 바뀐 해에 항상 자주 놀라면서
10 년 동안 아직도 서생 그대로이네.
오랜 절에 우연히 묵은 자취 찾다가
도리어 고승 만나 옛정 이야기하네.
벽에는 지는 해에 날으는 새 그림자
산에는 가을 달에 잔나비 우는 소리.
깊은 시름과 한결같은 울기를 보내기가 어려워
때때로 뜰에 나가 혼자 거닐어 보네.
94. 감로사(甘露寺)
채색 누대가 마치 비취의 깃 같은데
푸른 산이 감돌고 물이 거듭 둘러쌌다.
해를 비추는 서리는 가을 이슬에 젖고
바다 기운은 구름을 찔러 저녁 가랑비를 흩는다.
기러기는 어쩌다 문자를 이루며 가고
해오라기는 스스로 그림을 그리며 날은다.
실바람도 일지 않아 강은 거울 같은데
길 가는 나그네는 그림자를 마주했다.
95. 여뀌꽃의 백로
앞 여울에 물고기 많아
생각이 있어 물결을 가르고 들어갔다.
사람을 보자 갑자기 놀라 일어
여뀌 언덕에 다시 모여 앉는다.
목을 세우고 사람 가기 기다리며
보스랑비에 털옷이 다 젖었다.
마음은 아직 여울 고기에 있는데
사람들은 세상을 잊고 서 있다고 말하네.
96. 꽃 꺾는 노래
진주 같은 이슬 맺은 모란 한 가지
미인은 그 꽃 꺾어 창 앞을 지나가며
부끄런 웃음으로 단랑에게 묻노니
「내 얼굴과 이 꽃과 어느 것이 더 예뻐요」
님은 일부러 장난기 섞인 말로
굳이 「그 꽃이 더 예쁘다」했다.
미인은 그 말에 시샘을 내어
꽃을 땅에 던져 밟아 문지르면서
「만일 이 꽃이 더 예쁘거들랑
오늘밤은 이 꽃과 함께 자세요」
97. 늦봄
비가 넉넉한 뜰에는 이끼가 떼지어 나고
찾는 사람 없으매 낮에도 사립문 열지 않는다.
섬돌에 떨어진 꽃이 쌓여 깊이가 한 치인데
샛바람이 쓸어갔다 또 쓸어온다.
98. 버들
봉성 서쪽 언덕에 만가지의 금빛이여
봄 시름을 꾀어내어 어둔 그늘 되었구나.
끝없는 거센 바람이 끊이지 않고 부나니
연기를 끌어오고 비에 섞여 가을이 깊어졌다.
99. 봄의 흥취
어린 매화는 떨어지고 버들가지 드리우고
봄바람을 밟는 걸음 한가히 더디어라.
생선집은 문을 닫고 사람 소리 적은데
온 강의 봄비는 파란 실이다.
100. 가을의 회포
부귀도 슬픈 가을을 어쩔 수 없어
더구나 헤어진 옷, 외로이 시만 읊네.
많은 사람의 사랑과 욕을 다 겪었는데
묻노니, 나는 언제나 돌아가 쉴까.
떨어진 나뭇잎은 우물 메우고
다듬이질 소리는 이 다락을 울리네.
애오라지 고달픈 흥취가 일어
베개 기대어 창주를 꿈꾸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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