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의 산책
- 봄비
- 허난설헌(許蘭雪軒),春雨
春雨暗西池 輕寒襲羅幕
춘우암서지 경한습라막
愁倚小屛風 墻頭杏花落
수의소병풍 장두행화락
봄비가 서쪽 지당에
남몰래 내리니
가벼운 추위
비단장막 속으로 엄습하네
시름에 겨워
자그마한 병풍에 몸을 기대건만
담머리에는 어느새
살구꽃만 지네
*
저만치 뜨락 서쪽에 있는
연못에서 들려오는 소리
수면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보슬비 내리고 있네
비단 장막 쳐 있어도
느껴지는 한기..
자그마한 병풍에나마
몸을 기대고 수심을 억누르는
여인의 마음
보슬비에 떨어지는 꽃잎
그 꽃잎은
여인의 희망이 아니었을까
그 희망은
올 봄에도 지난 해 봄에도 접어야 했던
여인의 희망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여인에게
들려 주고 싶은 말
꽃잎이
떨어지고 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꽃 대궁에 살구 열매가
자라난다는 것을..
창문을 내다 본다.
보슬비가 오고 있다.
봄과 여름 사이의 짧은 날을
찰나의 계절이라 했던가?
시름시름 내리는 봄비에
산에도 못가고
하나 둘 ,
셋 넷 ..
손가락으로
빗줄기 세고 있다.
*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본명 초희(楚姬). 난설헌은 호.
별호는 경번(景樊).
본관 양천(陽川).
허균(許筠)의 누이로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워
천재적인 시재를 발휘했으나
27세로 요절했다.
남편 김성립(金誠立)과는
금슬이 좋지 못했다.
작품으로 유선시(遊仙詩) 등 142수와
가사작품으로 규원가(閨怨歌),
봉선화가 등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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