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의 의미 |
수행을 통해 도달한 궁극적 경지를 불교에서는 해탈이나 열반이라는 말로 부른다. 해탈(解脫, vimoksa, vimukti)은 결박이나 장애로부터 벗어난 해방·자유 등을 의미하고, 열반(涅槃, nirvana)은 '불어 끈다(吸滅)'는 뜻으로서 번뇌의 뜨거운 불길이 꺼진 고요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 두 술어는 우파니샤드 철학이나 이계파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었던 것을 석존이 불교 수행의 궁극적 경지를 표현하는 술어로 채택한 것이다. 이것은 그 경지가 그러한 개념에 통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위에서 불교의 여러 가지 수행법 가운데 십업설과 사제설을 살펴보았다. 먼저 십업설에서 수행이 궁극에 이른 경계라면 십악업이 단절된 상태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십악업에서 근본이 되는 것은 세 가지 의업(意業) 즉 욕심(貪欲)·성냄(瞋)·어리석음(痴暗)의 소위 삼독심(三毒心)이다. 구업(口業)과 신업(身業)은 의업(意業)이 밖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십악업에서의 궁극의 경지는 탐(貪)·진(瞋)·치(痴)가 사라진 상태라고 말해도 좋다. 사제설에서도 팔정도의 수행이 궁극에 이른 경지는 탐·진·치가 사라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앞서 소개한 사과설의 각 단계에서 단절되는 결박의 번뇌를 보면, 예류(預流)에서는 삼결(三結:有身·戒取·疑)이 끊어지고, 일래(一來)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탐·진·치가 박약해지며, 불환(不還)에서는 삼결(三結)과 탐·진(五下分結)이 끊어지고, 아라한에 이르러 탐·진은 물론 치(痴)까지도 끊어진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전에서 열반(涅槃)은 그러한 탐·진·치가 영원히 끊어진 상태라고 설명되어 있다. "열반이란 탐욕이 영진(永盡)하고 진에가 영진하고 치암이 영진한 것이니, 일체 번뇌가 영진한 것을 열반이라고 이름한다."<잡아함 卷18> 따라서 열반이란 개념은 십업설과 사제설에 두루 적용될 수 있는 궁극적 경지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 술어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두루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열반이란 개념이 갖는 본래의 뜻은 생사의 구속을 벗어난 해탈의 경지에 있다고 생각된다. 경전에 사용된 예를 보면 열반은 대부분이 사제설과 결합되어 있으며<잡아함 卷2>, 사제설이 지향하는 바는 무명(無明)의 망념을 멸하여 생사의 괴로움으로부터 해탈(解脫)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오온(五蘊)을 여실하게 아는 까닭에 오온(五蘊)에 불착(不着)한다. 오온에 불착하는 까닭에 해탈을 얻는다."<잡아함 卷15> 해탈에는 혜해탈(慧解脫)과 심해탈(心解脫)의 두 가지가 설해지고 있다. 혜해탈(慧解脫, prajna-vimukti)은 오온이나 십이연기에 실체가 본래 없는 것을 봄으로써 지적으로 해탈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연기한 것이 무아(無我)라는 것을 직관하는 것(正見)만으로는 마음의 번뇌가 완전히 멸하는 것이 아니다. 정정(正定)을 통해 마음에서 그것을 멸해야만 한다. 이것이 심해탈(心解脫, ceto-vimukti)이다. 열반은 이러한 두 가지 해탈이 갖추어질 때(俱分解脫)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열반은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난 세계이다. 그 곳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무상함은 없다. "유위(有爲)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지만 무위(無爲)에는 생주이멸이 없다. 이것을 모든 행(行)이 적멸한 열반이라고 한다."<잡아함 卷 12>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는 다음과 같은 게송도 이런 경지를 표현하고 있 다. "모든 행은 무상하니 그것은 생멸의 법이다. 생멸을 멸해버리면 적멸(寂滅)은 즐거움이 된다."<잡아함 卷22> 불교에 있어서 열반(涅槃)은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삼법인설(三法印說)에도 이 뜻을 포함하는 경우가 있다.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열반적정(涅槃寂靜)의 셋을 드는 경우가 그것이다. 출처 - 서재영의 불교 기초교리 강좌 url-http://www.buruna.org <현대불교미디어센터 ⓒ 2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