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문학/漢詩

여종출신 시인 雪竹

淸潭 2018. 10. 30. 18:20

여종출신 시인 雪竹


조선에 한 여인이 있었다.

영특했고 미모도 뛰어났다.

그러나 신분이 여종이었다.

신분제 사회에서 종으로 태어난 여인에게 미모며 영특함은 오히려 짐일 수 있었다.

영특한 머리로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가를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의 설죽(雪竹)이 그런 여인이다.

설죽의 원래 이름은 알현(閼玄)인데 생몰연대는 불분명하다.

취선(翠仙), 또는 월연(月蓮)이란 호를 갖고 있었는데 조선 중기 사림파의 일원이었던

충재(冲齋) 권벌(權橃) 가문의 여종이었다.

 


권벌의 손자 석천(石泉) 권래(權來)의 시청비(侍廳婢)라고 전하고 있으니

대략 15세기 말엽에서 16세기 초엽의 인물일 것이다.

사대부가 여인들도 언문이라 불렸던 한글 이외에

진서(眞書)라고 불렸던 한자를 배우기는 쉽지 않은 시대였다.

 


비슷한 시기 명문 반가(班家) 출신인 허난설헌이 오빠들에게 학문을 배운 것도

이례적이라고 전해지는 판국에 여종 출신의 설죽이

어떻게 한시를 지을 정도의 학문을 배울 수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자신의 딸에게도 한문을 가르치지 않는데

여종 출신에게 배우게 했을 리가 만무하다.

그만큼 그녀는 영특했던 것이다.

원유(遠遊) 권상원(權尙遠)의 시문집 백운자시고(白雲子詩稿)

말미에 필사된 설죽의 시는 166수에 달한다.

 


설죽이 자유자재로 한시를 지을만큼 뛰어난 학문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는데

시들은 한결같이 빼어난 수준이다.

 


- 早 春 [조 춘] 이른 봄 / 雪 竹 [설 죽] -

 

春雨梨花白 [춘우이화백] 봄비 내리자 배꽃이 하얗고

東風柳色黃 [동풍유색황] 봄바람 불자 버들개지 노랗네

誰家吹玉笛 [수가취옥적] 옥피리를 누가 부는가

搖揚落梅香 [요양락매향] 매화향기 흩날리누나

 

 피리 소리 따라 매화향기가 흩날린다는 표현은

자연물과 자신의 심경이 하나가 되는 경지를 노래한 것이다.

설죽도 나이를 먹으니 한 남성에게 의탁해야 했다.

여종 출신의 여류 시인은 누구에게 의탁해야 하는가?

설죽은 양반가의 첩이 되는 길을 택했다.

 


수촌(水村) 임방(任埅)이 지은 수촌만록(水村漫錄)에는

설죽이 석전(石田) 성로(成輅)에게 몸을 의탁하는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성로가 봉화 유곡의 정자에 도착하자 사대부들이 모였다.

 


이때 설죽도 자리를 함께 했다.

사대부들은 석전 성로가 죽었을 때 부를 만시(輓詩)를 지어

좌중을 울리면 성로의 시침을 들게 추천하겠다고 말했다.

설죽은 즉석에서 만시를 지었고 좌중은 모두 눈물을 흘렸는데

이때부터 그녀의 시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전하고 있다.

 


설죽은 성로의 호 서호정(西湖亭)을 따서 만시를 지었다.

 

寂寞西湖鎖草堂 [적막서호쇄초당] 서호정 초당 문은 닫혀서 적막한데

春臺無主碧桃香 [춘대무주벽도향] 주인 잃은 봄 누각에 벽도향만 흐르네

靑山何處埋豪骨 [청산하처매호골] 청산 어느 곳에 호걸의 뼈 묻으셨는지

唯有江流不語長 [유유강류불어장] 오직 강물만 말없이 흘러가네요.

 


두보나 이태백이 울고 갈 정도로 잘 구성되어진 詩.

 




보면 볼 수록 가슴속에 스며든다.

 성로는 죽었어도 강물은 무심히 흘러간다는 내용에

인생무상을 느낀 사대부들이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설죽은 성로를 따라 한양으로 왔다.

설죽은 자신 때문에 성로가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딱히 그 때문만은 아니고 광해군을 풍자한 궁류시(宮柳詩)를 지은 동학 권필이

귀양가다가 폭음사(暴飮死)한 후 세상을 등지고 시와 술로 생애를 보냈다.

 


성석전과 나눈 시 중에는

 

蠶嶺煙霞主 [잠령연하주] 잠두봉 경치도 으뜸이고

石田詩主人 [석전시주인] 석전의 시도 으뜸이라오

相逢不覺醉 [상봉불각취] 그대를 만나 취하기 전인데

 月墮楊花津 [월타양하진] 양하진에 벌써 달이 기우네요.

 

이런 설죽에게 고향과 부모는 어떤 의미였을까?

 


幾年流落幾沾裳 [기년유락기첨상] 여러 해 떠돌며 치마에 눈물 흘러

鶴髮雙親在故鄕 [학발쌍친재고향] 고향에는 백발된 부모님 계시네

一夜霜風驚雁陳 [일야상풍경안진] 긴 밤 무서리에 기러기떼 놀라 날다가

天涯聲斷不成行 [천애성당불성행] 하늘가에 울음 그치니 가지를 못하네

 


가난한 여인(貧女)이란 시는 일부만 전해지는데

그녀의 사회의식이 드러나 있다.

 


 

- 貧 女 [빈 녀] 가난한 여인  / 雪 竹 [설 죽] -

 


貧女上織機 [빈녀상직기] 가난한 여인이 베틀에 앉아

終日織不多 [종일직불다] 종일 베를 짜지만 많지 않네

飢來手無力 [기래수무력] 배는 고파오고 손에 힘 없는데

何以能擲梭 [하이능척사] 어떻게 북을 놀릴 수 있겠어요.

 


성로가 광해군 때의 정치에 분개했다면

설죽은 그를 뛰어넘는 신분제와 가난에 분개한 셈이다.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여류시인 설죽.

이제는 세상으로 나올 때가 되었다.

묻혀 있는 그녀의 주옥같은 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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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여성 시인하면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 매창을 떠올린다.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은 사대부 집안의 여성인 만큼 현대에 와서도 제대로 대접을 받은 것이고, 황진이나 매창과 같은 기녀 시인도 유명 인사와의 교류를 통한 일화가 많이 남아있으므로 인해 평가가 활발했다. 하지만 조선 선조 때 승지 조원(趙瑗'1544~1595)의 첩실이었던 이옥봉(李玉峯)이나 경북 봉화 출신 여성 시인 설죽(雪竹)에 대한 연구나 평가는 그들의 신분으로 인한 이유로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

지난 10월 13일 봉화 닭실 청암정에서는 경상북도 주최로 작지만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이 마을 출신인 설죽의 삶과 시에 대해 이원걸 박사의 집중적인 조명이 있었던 것이다.

설죽은 권벌(權橃)의 손자였던 권래(權來'1562~1617)의 여종이었다고 한다. 권래는 시로 문명을 떨쳤던 권필(權韠)의 인척이었고, 권필은 성로(成輅'1550∼1615'호는 석전)와 절친한 친구였다. 권필과 성로는 송강 정철(鄭澈)에게서 학문을 배운 동문수학의 친구였다. 권필이 광해군 때 필화사건으로 귀양을 가다 울분에 차서 죽자, 석전 성로가 자신의 시를 불태우고 세상을 한탄하며 술로 세월을 보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우정을 알 만하다.

상상을 펼쳐본다. 벼슬보다는 시에 뜻이 있어 한평생을 시와 술과 친구와 더불어 사는 풍류객이 바로 성로였다. 성로는 아내와 사별하고 울적함을 달래기 위해 권필의 고향인 닭실에 놀러 갔다. 그곳에서 어여쁘고 재기 발랄한 설죽을 만났다. 그는 첫눈에 설죽에게 반했다. 설죽 역시 감수성 뛰어난 시인이었던 성로가 좋았다. 그들은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어 금방 사랑에 빠졌다. 친구의 사정을 눈치 챈 권필은 친척인 권래에게 부탁해 설죽의 신분을 해방시켜 성로에게 시집갈 수 있게 한다. 그들은 서울로 올라와 서호(西湖'현재의 양화나루 근처)에서 십 년을 살았다.

"십 년간 석전과 짝하여 한가히 노닐며/ 양자강 가에서 취해 지냈어요/오늘 홀로 떠난 임 계신 곳 찾아오니/ 옛 섬엔 백빈향만 가득합니다.(十年閑伴石田遊, 揚子江頭醉幾留, 今日獨尋人去後, 白蘋香滿舊汀洲)"

둘의 행복은 석전의 사망으로 인해 10년 만에 끝이 났다. 이때 설죽의 나이가 26세로 추정된다. 이후 설죽의 행적은 호서지방에서 보인다. '해동잡기', '패관잡기' 등의 여러 문헌에서 설죽은 호서 기생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때 설죽이 지은 시 중의 하나로 '완산 객사에서 피리 소리를 듣고'라는 작품이 있다.

"피리 소리에 원망이 가득 담겼고/ 밤중의 창가엔 달이 기울어요/ 매화곡 연주하지 마세요/ 외로운 저의 애간장을 태우니까요.(逐秦龍吟怨思長, 月斜窓外夜中央, 遊人莫弄梅花曲, 獨妾天涯易斷腸'한시 번역은 이원걸)"

설죽이 어떻게 해서 호서의 기생이 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녀는 약 20년 정도 호서지방에서 생활하다가 한양으로 올라온다. 한양에서도 고향 닭실을 그리워하는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설죽 생의 마지막은 닭실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이원걸 박사에 의하면 설죽이 남긴 시는 놀랍게도 167편이나 된다. 권상원(權商遠)의 시집인 '백운자시고'(白雲子詩稿) 뒤편에 166수, '청장관전서'에 한 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다른 조선의 여성 문사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양이다. 또한 그녀의 시는 대부분 깔끔하고 산뜻하다. 앞으로 설죽 시에 대한 연구의 활성화와 함께 설죽을 봉화와 경북의 문화콘텐츠로 활용하는 방안도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대구경북만큼 많은 문화유산을 가진 시'도도 드물다. 어떻게 잘 꿰느냐 하는 것이 바로 후손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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