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허난설헌(許蘭雪軒)은 1563년(명종 18년)에 태어나서 1589년(선조 22년) 3월 19일, 27세로 사망했다. 본관은 양천(陽川), 이름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이다. 경번이라는 자는 난설헌 자신이 중국에서 옛부터 전해내려오는 여선(女仙)인 번부인(樊夫人)을 사모하여 지은 것이라고 한다. 난설헌이라는 호의 유래는 직접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고 다만 난초(蘭)의 이미지와 눈(雪)의 이미지에서 지어진 것이라 생각된다. 그녀의 시에 나오는 꽃 가운데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이 난초이고, 눈이라는 단어도 아홉 번이나 나왔다.
난설헌은 임영(臨瀛-지금의 강릉) 초당리에서 아버지 허엽(許曄)과 어머니 김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나 7세 무렵까지 인접한 사천면 화평리의 외가(외조부-김광철)를 오가며 유년기를 보냈다. 이후 서울 건천동에서 장성했고 결혼 생활도 서울에서 한 것으로 보인다. 건천동은 김종서, 정인지, 이순신, 유성룡을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된 곳이라 한다.
"글을 읽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다. 여자가 이에 힘쓰면 그 해로움이 끝없을 것이다."
김성립은 신혼 초부터 아내 난설헌을 내버리고 한강 서재에서 과거 공부를 하였다.
寄夫江舍讀書
燕掠斜?兩兩飛 洛花?亂撲羅衣 洞房極目傷春意 草綠江南人未歸 |
강사에서 글을 읽는 낭군에게
기울어진 처마 스쳐 짝지어 제비 날고 낙화는 분분하게 비단옷을 치고 있네 동방 깊은 곳에 임 생각 상한 마음 푸른 강남 가신 임은 돌아오질 아니하네 |
한강가 서당에서 글을 읽는 남편을 생각하면서 난설헌이 쓴 시이다. 그러나 김성립은 과거 공부에 힘쓰지 않고 기생집만 즐겨 찾았다. 결혼하고도 10년 이상이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다. 허균의 기록에 의하면 부부간의 사이는 좋지 않았고, 고부간 갈등도 심했던 것 같다. 시어머니쪽에서 보자면 선대의 명성에 반하여 자꾸 낙방하는 아들과 달리, 글쓰기를 좋아하는 재능있는 며느리가 예뻐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난설헌에게 힘이 되어준 것은 그녀가 낳은 두 아이와 시작(詩作)이었다.
1579년 5월(난설헌 17세)에 아버지 허엽이 경상감사가 되어 내려갔다. 다음해인 1580년 2월(난설헌 18세), 아버지가 병에 걸려 서울로 올라오다 상주 객관에서 사망했다. 이때부터 허씨 집안이 기울기 시작한다.
난설헌에게는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었는데 아들의 이름이 희윤(喜胤)이었다. 그러나 딸을 먼저 잃고 다음 해에 아들을 잃었다. 이들이 태어나고 죽은 연도는 명확하지 않다. 희윤의 묘비명을 허봉이 지어준 것을 보면 모두 허봉이 귀양(난설헌 21세 때) 가기 전의 일들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강직한 성격의 허봉은 1583년(난설헌 21세)에 율곡 이이를 탄핵하다가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1585년 봄 (난설헌 23세)에 방면되지만 서울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떠돌아다녔다. 1588년 9월(난설헌 26세), 금강산에서 황달과 폐병으로, 향년 38세의 나이로 객사를 한다.
送荷谷謫甲山
遠謫甲山客 咸原行色忙 臣同賈太傅 主豈楚懷王 河水平秋岸 關雲欲夕陽 霜風吹雁去 中斷不成行
|
갑산으로 귀양가는 하곡 오라버니께
멀리 갑산으로 귀양가는 나그네여 함경도 가느라고 마음 더욱 바쁘시네 쫓겨나는 신하야 가태부시지만 임금이야 어찌 초나라 회왕이시랴 가을 비낀 언덕엔 강물이 찰랑이고 변방의 구름은 저녁노을 물드는데 서릿바람 받으며 기러기 울어 예니 걸음이 멎어진 채 차마 길을 못 가시네
|
난설헌은 몰락해 가는 집안에 대한 안타까움과 자식을 잃은 아픔, 부부간의 우애가 좋지 못함과 고부간의 갈등, 그리고 사회의 여성에 대한 억압 등등을 창작으로 승화시켰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항상 화관(花冠)을 쓰고 향안(香案: 향로나 향합 따위를 올려놓는 상)과 마주앉아 시사(詩詞)를 지었다고 한다(이능화李能和,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 자신의 세계에서 이미 신선이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난설헌이 지은 시와 문장이 집 한 간에 가득 찼다고 한다.
난설헌의 죽음은 신비롭다. 4년 전에 죽는 해를 암시하는 시를 쓴다.
"을유년(1585년) 봄에 나는 상을 당해 외삼촌댁에 있었다. 하루는 꿈 속에서 바다 가운데 있는 산에 올랐는데, 산이 온통 오색이 영롱한 구슬과 옥으로 되어 있었다. 그곳에 두 여인이 있었는데 나이는 스물쯤 되어 보이고, 얼굴도 뛰어났다. 그 여인들을 따라 산꼭대기에 올라가니, 그만한 절경이 없었다. 두 여인은 내게 이곳은 신선 세계 십주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광산산이니, 시를 한 수 지어 이 곳에 기록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절구 한 수를 읊었다. 두 여인이 크게 기뻐하며 '한 자 한 자 모두 신선의 글이다.'고 했다. 그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한 떨기 붉은 구름이 떨어져 봉우리에 걸렸다. 북을 둥둥 치는 소리에 그만 꿈에서 깨었다. 베개 밑에는 아직도 아지랑이 기운이 자욱했다."
꿈 속에서 지은 시가 다음 시이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넘노니 (碧海浸瑤海)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와 어울렸구나. (靑鸞倚彩鸞)
아름다운 연꽃 스물일곱 송이 (芙蓉三九朶)
붉게 떨어져 달밤 서리에 싸늘하네. (紅墮月霜寒)
그 뒤에 그녀의 나이 27세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9수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今年乃三九之數, 今日霜墮紅)‘하고는 유연히 눈을 감았다. 3·9는 27이라, 난설헌이 세상에 살다 간 세월과 같다. 집안에 가득 찼던 그녀의 작품들은 다비(茶毗: 불교용어로 불태우는 것. 화장.)에 부치라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모두 불태워졌다.
누이의 작품을 아깝게 여긴 허균은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작품과 기억하고 있던 작품들을 추려 모아서 임진왜란시 지원군과 함께 온 명나라 사신이며 시인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일부를 주었다. 주지번은 중국으로 돌아가 시집 <난설헌집>을 간행했고, 세상 사람들의 격찬을 받으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 후 명나라 사신이 중국에 올 때마다 난설헌의 시를 얻기 위해 허균의 집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1711년에는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 간행되어 애송되었다.
중국에서 얻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이 조선에 역출간된 것은 100년도 더 지나서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출간된 난설헌의 작품집은 찬사 대신 수많은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품행이 방정해야 할 규방 여인이 점잖지 못하게 남녀 간의 연애시나 썼다는 이유에서였다. 심지어는 깨인 학자라 일컬어지는 연암 박지원마저 ‘열하일기’에서 난설헌에 대하여 좋지 않게 평하였다.
‘규중 여인이 시를 짓는다는 것이 원래부터 좋은 일은 아니다.
조선의 한 여자 이름이 중국에까지 퍼졌으니 대단히 유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부인들은 일찍이 이름이나 자를 찾아볼 수 없으니,
난설헌의 호 하나만으로 과분한 일이다.
후에 재능있는 여자들이 이를 밝혀 경계의 거울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평가로 보아 난설헌이 살았을 때 그녀의 삶은 얼마나 고달팠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살아 생전 세 가지 한을 품고 살았다고 한다.
첫째, 이 넓은 세상에 하필이면 조선에서 태어났는가.
둘째, 왜 조선에서 여자로 태어났는가.
셋째, 왜 수많은 남자 가운데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
유고집에 <난설헌집>이 있고, 국문학가사 <규원가(閨怨歌)>와 <봉선화가(鳳仙花歌)>가 있으나, <규원가>는 허균의 첩 무옥(巫玉)이, 봉선화가는 정일당김씨(貞一堂金氏)가 지었다고도 한다.
묘는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산 29-5 경수마을뒷산 안동김씨 선영(先塋)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되어 있다.
...............................................................................................
'글,문학 > 漢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용(芙蓉) (0) | 2018.11.02 |
---|---|
여종출신 시인 雪竹 (0) | 2018.10.30 |
<紅柿2 : 홍시> (0) | 2018.10.21 |
[스크랩] [명상음악] 마음이 마음을 안다 (0) | 2018.10.17 |
雞鳴(계명) (0) | 2018.1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