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문학/漢詩

허난설헌 의 漢詩

淸潭 2018. 10. 29. 18:20


   

허난설헌 영정(2차)


[생애]

 

 허난설헌(許蘭雪軒)은 1563년(명종 18년)에 태어나서 1589년(선조 22년) 3월 19일, 27세로 사망했다. 본관은 양천(陽川), 이름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이다. 경번이라는 자는 난설헌 자신이 중국에서 옛부터 전해내려오는 여선(女仙)인 번부인(樊夫人)을 사모하여 지은 것이라고 한다. 난설헌이라는 호의 유래는 직접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고 다만 난초(蘭)의 이미지와 눈(雪)의 이미지에서 지어진 것이라 생각된다. 그녀의 시에 나오는 꽃 가운데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이 난초이고, 눈이라는 단어도 아홉 번이나 나왔다.

 

 난설헌은 임영(臨瀛-지금의 강릉) 초당리에서 아버지 허엽(許曄)과 어머니 김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나 7세 무렵까지 인접한 사천면 화평리의 외가(외조부-김광철)를 오가며 유년기를 보냈다. 이후 서울 건천동에서 장성했고 결혼 생활도 서울에서 한 것으로 보인다. 건천동은 김종서, 정인지, 이순신, 유성룡을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된 곳이라 한다.

 

 허엽(1517-1580)은 호가 초당(草堂)으로 후에 경상감사를 역임하였고 동서분당 때 동인의 영수가 된 인물이다. 어머니 김씨는 허엽의 둘째 부인이었으며 허엽은 첫째 부인인 한씨 부인과의 사이에 두 딸과 아들 성(筬)을 두었고 김씨 부인과의 사이에는 봉(?), 난설헌(許蘭雪軒), 허균(許筠)의 2남 1녀를 두었다. 

 

난설헌보다 15세 위였던 큰오빠 허성(許筬, 1548-1612)은 호가 악록(岳麓)이고 이조·병조판서까지 지냈다. 황윤길과 함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 온 뒤 풍신수길이 침략할 것을 미리 밝히기도 했다.

 

 작은오빠 허봉(許?, 1551-1588)은 호가 하곡(荷谷)이고 자가 미숙(美叔)인데 홍문관 전한을 지냈고 강직한 성격으로 임금에게 직언을 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허봉은 1583년, 난설헌 21세 때 율곡 이이의 잘못을 탄핵하다가 귀양 갔다가 3년 후 방면되지만 불우하게 지내다가 술로 몸을 망쳐서 난설헌이 26세 때 객사했다. 그는 난설헌보다 12세나 위였지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오빠인 동시에 글과 삶을 가르쳐 준 스승이기도 했다.

 

 동생 허균(許筠, 1569-1618)은 난설헌보다 여섯 살 아래로 호는 교산(蛟山)이고 형조·예조판서까지 지냈다. 어려서부터 조숙했으며 특히 기억력이 뛰어나 한 번 읽으면 그대로 외곤 했다. 유교와 도교를 포함한 제자백가뿐만 아니라 불교 및 천주교까지 널리 익혔으며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가 뚜렸했다. 봉건적 사회제도의 개혁을 부르짖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작자이며, 후일 혁명을 준비하다 역적의 누명을 쓰고 50세에 능지처참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봉, 난설헌, 균은 모두 자유분방한 예술가적 기질을 갖고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모두 불행하게 죽었다.

 

 허엽은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화담 서경덕 등에게 문장을 배웠다. 화담 서경덕에게서 배운 것이 난설헌에게도 영향을 주어 도교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만들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난설헌은 8세 때인 1570년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어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그 글은 신선 이야기에 나오는 달(月)의 광한전에 백옥루를 새로 짓는다고 상상하고 그 건물의 상량문을 쓴 것이었다.

 

 "글을 읽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다. 여자가 이에 힘쓰면 그 해로움이 끝없을 것이다."

실학파의 대가인 이익의 말이다. 이럴 정도로 그 당시는 여성에게는 문필적 교양이 가로막혀 있던 시대였다. 난설헌의 아버지 허엽도 딸에게 글을 가르쳐 주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지만 그의 천부적인 재질은 어쩔 수 없어서 그토록 뛰어난 남매들 가운데서도 단연코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작은오빠 허봉도 난설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봉은 자기의 글벗인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글을 배우게 해주었다. 이달은 삼당시인(이달, 최경창, 백광훈)의 한 명으로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는데 서얼로 태어났기에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상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고 떠돌이 생활을 했으며 틀에 박히지 않은 당시(唐詩)풍의 글을 썼다. 난설헌은 이달에게서 자유분방한 성격을 지닌 당나라 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난설헌은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14세나 15세에 시집을 갔다. 남편은 안동 김씨 집안의 김성립(金誠立)이었다. 그의 집안은 5대나 계속 문과에 급제한 문벌이었다. 김성립은 허난설헌보다 한 살 위였고, 자는 여견(汝見)·여현(汝賢), 호는 서당(西堂)이다. 그는 나름대로 문장을 했지만 난설헌의 경지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던 것 같다. 1589년(선조 22), 난설헌이 죽던 해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는 후처로 남양홍씨(南陽洪氏)를 맞아들였다. 난설헌이 죽고 3년 후인 그의 나이 31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병으로 싸우다 사망하였다. 당시 그의 벼슬은 정9품의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이었다. 시체를 찾지 못해 의복으로만 장례를 치루었다. 그는 자식이 없이 죽어서 집안에서 양자를 들였다.

 

 김성립은 신혼 초부터 아내 난설헌을 내버리고 한강 서재에서 과거 공부를 하였다. 

 





寄夫江舍讀書

 

燕掠斜?兩兩飛

洛花?亂撲羅衣

洞房極目傷春意

草綠江南人未歸

  강사에서 글을 읽는 낭군에게

 

기울어진 처마 스쳐 짝지어 제비 날고

낙화는 분분하게 비단옷을 치고 있네

동방 깊은 곳에 임 생각 상한 마음

푸른 강남 가신 임은 돌아오질 아니하네


 

 한강가 서당에서 글을 읽는 남편을 생각하면서 난설헌이 쓴 시이다. 그러나 김성립은 과거 공부에 힘쓰지 않고 기생집만 즐겨 찾았다. 결혼하고도 10년 이상이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다. 허균의 기록에 의하면 부부간의 사이는 좋지 않았고, 고부간 갈등도 심했던 것 같다. 시어머니쪽에서 보자면 선대의 명성에 반하여 자꾸 낙방하는 아들과 달리, 글쓰기를 좋아하는 재능있는 며느리가 예뻐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난설헌에게 힘이 되어준 것은 그녀가 낳은 두 아이와 시작(詩作)이었다.

 

 1579년 5월(난설헌 17세)에 아버지 허엽이 경상감사가 되어 내려갔다. 다음해인 1580년 2월(난설헌 18세), 아버지가 병에 걸려 서울로 올라오다 상주 객관에서 사망했다. 이때부터 허씨 집안이 기울기 시작한다.

 

 난설헌에게는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었는데 아들의 이름이 희윤(喜胤)이었다. 그러나 딸을 먼저 잃고 다음 해에 아들을 잃었다. 이들이 태어나고 죽은 연도는 명확하지 않다. 희윤의 묘비명을 허봉이 지어준 것을 보면 모두 허봉이 귀양(난설헌 21세 때) 가기 전의 일들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강직한 성격의 허봉은 1583년(난설헌 21세)에 율곡 이이를 탄핵하다가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1585년 봄 (난설헌 23세)에 방면되지만 서울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떠돌아다녔다. 1588년 9월(난설헌 26세), 금강산에서 황달과 폐병으로, 향년 38세의 나이로 객사를 한다.







 

送荷谷謫甲山

 

遠謫甲山客

咸原行色忙

臣同賈太傅

主豈楚懷王


河水平秋岸

關雲欲夕陽

霜風吹雁去

中斷不成行

 

 

갑산으로 귀양가는 하곡 오라버니께

 

멀리 갑산으로 귀양가는 나그네여

함경도 가느라고 마음 더욱 바쁘시네

쫓겨나는 신하야 가태부시지만

임금이야 어찌 초나라 회왕이시랴

가을 비낀 언덕엔 강물이 찰랑이고

변방의 구름은 저녁노을 물드는데

서릿바람 받으며 기러기 울어 예니

걸음이 멎어진 채 차마 길을 못 가시네

 





 

 난설헌은 몰락해 가는 집안에 대한 안타까움과 자식을 잃은 아픔, 부부간의 우애가 좋지 못함과 고부간의 갈등, 그리고 사회의 여성에 대한 억압 등등을 창작으로 승화시켰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항상 화관(花冠)을 쓰고 향안(香案: 향로나 향합 따위를 올려놓는 상)과 마주앉아 시사(詩詞)를 지었다고 한다(이능화李能和,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 자신의 세계에서 이미 신선이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난설헌이 지은 시와 문장이 집 한 간에 가득 찼다고 한다.

 

 난설헌의 죽음은 신비롭다. 4년 전에 죽는 해를 암시하는 시를 쓴다.

 

"을유년(1585년) 봄에 나는 상을 당해 외삼촌댁에 있었다. 하루는 꿈 속에서 바다 가운데 있는 산에 올랐는데, 산이 온통 오색이 영롱한 구슬과 옥으로 되어 있었다. 그곳에 두 여인이 있었는데 나이는 스물쯤 되어 보이고, 얼굴도 뛰어났다. 그 여인들을 따라 산꼭대기에 올라가니, 그만한 절경이 없었다. 두 여인은 내게 이곳은 신선 세계 십주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광산산이니, 시를 한 수 지어 이 곳에 기록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절구 한 수를 읊었다. 두 여인이 크게 기뻐하며 '한 자 한 자 모두 신선의 글이다.'고 했다. 그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한 떨기 붉은 구름이 떨어져 봉우리에 걸렸다. 북을 둥둥 치는 소리에 그만 꿈에서 깨었다. 베개 밑에는 아직도 아지랑이 기운이 자욱했다."  

 

 꿈 속에서 지은 시가 다음 시이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넘노니 (碧海浸瑤海)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와 어울렸구나. (靑鸞倚彩鸞)

아름다운 연꽃 스물일곱 송이 (芙蓉三九朶)

붉게 떨어져 달밤 서리에 싸늘하네. (紅墮月霜寒) 

 

 그 뒤에 그녀의 나이 27세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9수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今年乃三九之數, 今日霜墮紅)‘하고는 유연히 눈을 감았다. 3·9는 27이라, 난설헌이 세상에 살다 간 세월과 같다. 집안에 가득 찼던 그녀의 작품들은 다비(茶毗: 불교용어로 불태우는 것. 화장.)에 부치라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모두 불태워졌다.

 

 누이의 작품을 아깝게 여긴 허균은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작품과 기억하고 있던 작품들을 추려 모아서 임진왜란시 지원군과 함께 온 명나라 사신이며 시인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일부를 주었다. 주지번은 중국으로 돌아가 시집 <난설헌집>을 간행했고, 세상 사람들의 격찬을 받으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 후 명나라 사신이 중국에 올 때마다 난설헌의 시를 얻기 위해 허균의 집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1711년에는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 간행되어 애송되었다.

 

 중국에서 얻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이 조선에 역출간된 것은 100년도 더 지나서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출간된 난설헌의 작품집은 찬사 대신 수많은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품행이 방정해야 할 규방 여인이 점잖지 못하게 남녀 간의 연애시나 썼다는 이유에서였다. 심지어는 깨인 학자라 일컬어지는 연암 박지원마저 ‘열하일기’에서 난설헌에 대하여 좋지 않게 평하였다.

 

‘규중 여인이 시를 짓는다는 것이 원래부터 좋은 일은 아니다.

조선의 한 여자 이름이 중국에까지 퍼졌으니 대단히 유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부인들은 일찍이 이름이나 자를 찾아볼 수 없으니,

난설헌의 호 하나만으로 과분한 일이다.

후에 재능있는 여자들이 이를 밝혀 경계의 거울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평가로 보아 난설헌이 살았을 때 그녀의 삶은 얼마나 고달팠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살아 생전 세 가지 한을 품고 살았다고 한다.

 

첫째, 이 넓은 세상에 하필이면 조선에서 태어났는가.

둘째, 왜 조선에서 여자로 태어났는가.

셋째, 왜 수많은 남자 가운데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

 

유고집에 <난설헌집>이 있고, 국문학가사 <규원가(閨怨歌)>와 <봉선화가(鳳仙花歌)>가 있으나, <규원가>는 허균의 첩 무옥(巫玉)이, 봉선화가는 정일당김씨(貞一堂金氏)가 지었다고도 한다.

 

묘는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산 29-5 경수마을뒷산 안동김씨 선영(先塋)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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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난설헌의 초상화

             규원가(閨怨歌)

 

엊그제 젊었더니 어찌 벌써 이렇게 늙어버렸나
어릴적 즐겁게 지내던 일을 생각하니 말해야 뭣하랴
이렇게 늙은 뒤에 설운 사연 말하자니 목이 멘다.
(나이 먹어감을 아쉬워함)

 

부모님이 이몸 낳아 기르며 몹시 고생하며  길러낼 때
높은 벼슬아치의 배필은 바라지 못할지라도
군자의 좋은 짝이 되기를 바랬는데

 

전생에 무슨 원망스러운 업보가 있었길래
방탕하면서도 경박한 사람을 꿈같이 만나
시집간 뒤에 남편 시중들면서 조심하기를

마치 살얼음 디디듯 하였다.
(출가하던 지난 날을 회상함)

 

열 다섯, 열 여섯살을 겨우 지나

타고난 아름다운 모습 저절로 타고나니
이 얼굴 이 태도로 평생을 약속하였더니
세월이 빨리 지나고 하늘 마져 다 시기하여

봄 바람 가을 물 곧 세월이

베틀사이에 북이 지나가듯 빨리 지나가
꽃같이 아름다운 얼굴 어디 두고 모습이 밉게도 되었구나

내 얼굴을 내가 보고 알거니와 어느 님이 사랑 할 것인가
스스로 부끄러워 하니 누구를 원망 할 것인가
(늙어가는 자신에 대한 한탄)

 

여러 사람이 떼지어 다니는 기방에 새 기생이 나타났다는 말인가?
꽃 피고 새 울 때 정처 없이 나가서
호사스러운 행장을 하고서 어디에 머물러 노는고
집안에만 있어서 원근 지리를 모르는데 님의 소식은 어히야 알 수 있으랴
(기방에 출입하는 남편에 대한 경멸과 괴로움)

 

그녀는 세 가지의 한을 입버릇 처럼 말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
다른 하나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

    

겉으로는 인연을 끊었다 하지만 님에 대한 생각이야 없을 것인가?
님의 얼굴을 못 보거니 그립기나 말았으면 좋으련만
하루가 길기도 길구나 한달 곧 서른 날이 이다지도 지루하랴

규방 앞에 심은 매화 몇 번이나 피었다 졌는고?

 

겨울밤 차고 찬 때 자국 섞여 내리고,
여름날 길고 긴 때 궂은비는 무슨 일인고?
봄날 온갖 꽃피고 버들잎이 돋아나는 좋은 시절에
아름다운 경치를 보아도 아무런 생각이 없네

 

가을 달 방에 들이 비추고 귀뜨라미 침상에서 울 때
긴 한숨 흘리는 눈물 헛되이 생각만 많다.
아마도 모진 목숨 죽기도 어렵구나
(4계절 내내 끊임없는 님에 대한 그리움)

 

돌이켜 여러 가지 일을 하나하나 생각하니
이렇게 살아서 어찌 할 것인가?
등불을 돌려놓고 푸른 거문고를 비스듬히 안아

 

벽련화곡을 시름에 겨워 타니
소상강 밤비에 댓잎 소리가 섞여 들리는 듯
망주석에 천 년만에 찾아온 고고한 학이 울고 있는 듯

 

아름다운 손으로 타는 솜씨는 옛 가락이 아직 남아있지만
연꽃 무늬가 있는 휘장을 친 방이 텅 비어있으니

누구의 귀에 들릴 것인가?
마음속이 굽이굽이 끊어 지누나
(거문고로 시름을 달래보지만 적막함은 애를끊나니)

 

차라리 잠이 들어 꿈에나 님을 보려하니
바람에 지는 잎과 풀속에서 우는 벌레는
무슨 일이 원수가 되어 잠마져 깨우는가?

 

하늘의 견우성과 직녀성은 은하수가 막혔을지라도
칠월 칠석 일년에 한번씩 때를 어기지 않고 만나는데
우리 님 가신 후는 무슨 장애물이 가리었기에
오고 가는 소식마져 그쳤는고?

 

난간에 기대어 서서 님 가신 데를 바라보니
풀 이슬은 맺혀있고 저녁구름이 지나갈 때
수풀 우거진 푸른 곳에 새소리가 더욱 서럽다.

 

세상에 서런 사람 많다고 하려니와
운명이 기구한 여자여 나 같은 이가 또 있을까?
아마도 이 님의 탓으로 살동 말동 하여라
(잠을 자지 못하고 님을 기다리는 마음)

 

 허난설헌의 생가. 이 집에서 그 유명한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이 씌여졌다.

 

그녀의 작품 규원가는

우리 국문학사(史)에 길이남을 위대한 작품이며

가사문학의 정수이고

규방문학의 진수이며

우리 문학의 금자탑이다.

 

여자로 태어나서 부모님 슬하에 곱게자라

시집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남자로 인해서 피었다 스러지는 여자의 한(恨)을

 

목화에서 실을 뽑아 올리듯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이 또 있을까?

 

숨소리마져 제대로 못내고 숨죽여 살아야하는

남성 우위의 조선 사회에서

 

기방(妓房)문학은 있고 규방(閨房)문학은 없다는

남존 여비의 조선 사회에서

 

허난설헌의 출현은 사건이었고

허난설헌의 작품은 쿠데타였다.

 

'규방에 심은 매화 몇번이나 피었다 졌는고...'

'소상강 밤비에 댓잎소리가 들리는듯...'

 

400년 전에 살다 간

허난설헌의 목소리가 들리는것 같고

숨소리가 들리는것 같다.

 

시공(時空)을 뛰어 넘어

디지털이 춤추는 이 시대

 

지금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작품이다.

 

그녀는 1563년(명종18년).
경상감사를 지내고 동인의 영수(領袖)이던 허엽(許曄)의 둘째딸로
강릉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허난설헌의 본명은 초희(許楚姬). 별호는 경번(景樊)

 

그녀의 큰 오빠 허성은 이조, 병조 판서를
둘째 오빠 허봉 역시 홍문관 전한.

 

홍길동전의 저자로 우리에게 알려진 허균 역시
형조와 예조 판서를 지냈으며 그녀의 동생이다

 

 생가 안채 뜰. 치마 자락 여미고 댕기머리 휘날리며 뛰어 놀던 허초희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그녀가 일곱 살 때 지은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은
그녀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대 문장이었다.

 

일곱 살밖에 안된 어린 소녀가
선녀가 살고있다는 상상속의 달세계의 궁전이라는 광한전을 생각하고 

상상속의 하늘의 황재가 살고있다는 백옥루를 연상하며

 

그 궁전을 건축하는 상량문을 지었다는 것은 
그 당시 문인 재사들을 뒤집어지게 하는 사건이었다.

 

 

 생가 솔밭터. 얼마나 맑은 향기였기에 그토록 고운 시를 뽑아 올릴 수 있었을까

 

 

이러한 그녀도 아직 피지도 않은 나이 15세에
명문가의 김성립과 혼인하면서 불행을 잉태하게 된다.

 

남편 김성립은 당대의 5대 문장가이며 그 집안 출신인
자신의 부인 난설헌에게 열등의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방탕한 생활과 기방 출입은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남편의 학대와 시집살이의 고단함이
그녀의 시상(詩想)을 북돋았는지 모른다.

 

 

비단 띠 비단 치마 눈물 흔적 쌓였음은
임 그린 1년 방초의 원한의 자국
거문고 옆에 끼고 강남곡 뜯을 재
배꽃은 비에 지고 낮에 문은 닫혔구나

 

달뜬 다락 가을 깊고 옥병풍 허전한데
서리 친 갈밭 저녁에 기러기 앉네
거문고 아무리 타도 임은 안 오고
연못 속에 연꽃만 맥없이 지고있네

 

그녀의 결혼생활은 불행할 수밖에 없었고
시댁에서는 밖으로만 도는 아들과
아들보다 뛰어난 며느리를 곱게 보지 않았다.

 

 



출처: 초희 허난설헌홈 / 류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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