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의 산책
- 재미 삼아 지은 시(詩)
- 운초(雲楚),戱題
芙蓉花發滿池紅 人道芙蓉勝妾容
부용화발만지홍 인도부용승첩용
朝日妾從堤上過 如何人不看芙蓉
조일첩종제상과 여하인불간부용
부용꽃이 피어서
연못 가득 붉으니
사람들은 부용꽃이
나보다 더 낫다지만
아침 해 떠 제방따라
이 몸이 지나가니
어째서 사람들이
부용꽃은 보지 않나?
*
연꽃(부용꽃)이
연못 가득 활짝 피자
평소에 자기를
예쁘게 여기던 사람들이
연꽃이 더 아름답다고
말들을 해댄다.
자존심이 상한 이 여자,
아침 햇살 아래
제방 위를 따라
맵시를 내며 걸어 가 본다.
어스름 달빛이나 등잔불빛 같은
'조명발'이 아니라
밝은 해 아래서
당당하게 겨뤄보자는 자신감이다.
과연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린다.
이 여자 속으로 ..
' 흥! 연꽃이 더 예쁘다면서
왜 꽃은 안보고 나만 쳐다보나?' 하면서
자신의 판정승을
한껏 즐긴다.
시문(詩文)에 뛰어난
조선의 명기(名妓)로
중기에 황진이(黃眞伊)가 있다면
후기에는 운초(雲楚)가 있다.
세상에 많이 알려진 것으로 치면
황진이가 훨씬 유명하지만
한시에 있어서는
운초가 한 수 윗길이다.
황진이는 파란 많은 삶을 살았지만
운초는 이조,병조,호조 판서 등
높은 벼슬을 지낸
김이양(金履陽)의 소실이 되어
그에게 지기(知己)와도 같은
아낌과 사랑을 받으며 비교적
안온한 여생을 보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시는 구김살없이
밝고 명랑한 것이 주조를 이룬다.
특히 이 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재기 발랄함과 자부심에 있어 황진이 못지 않다.
황진이가 박연폭포와
서화담을 포함하여
"송도삼절(松都三節)"이라고 자부심을
드러낸 것은 유명한 일이다.
운초라고 뒤질 리 없다.
평안도 영변(寧邊)에 "사절정(四絶亭)"이 있는데
산, 바람, 물, 달이
뛰어난 풍광을 이룬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운초가 여기에 올라
참지 못하고 한 수 읊기를
"정자 이름 사절(四絶)이 도리어 의심가니,
사절이란 옳지 않고 오절(五絶)이 마땅하네.
산과 바람, 물과 달이
서로 어울리는 곳에,
가인(佳人)이 더 있어서
절세에 뛰어나니" 하였다.
절세미인인 자신까지 합쳐
"오절정(五絶亭)"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공주병도 이 정도면
경지에 오른 셈이다.
그러나 이만한 재색겸비(才色兼備)라면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김부용(운초)은 평남 선천 출신이다.
1850년대 40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황진이, 이매창(李梅窓)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시기(詩妓-시에 능한 기생)였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읽기 어려운 한시(漢詩)만을 남겨
잘 알려져 있지 않다.
20대 후반에
자신보다 50세가량 많았던
전 예조판서(禮曹判書)
김이양(金履陽1755~1845)을 만난 부용은
시를 통해 사랑을 나누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대표작 '부용 상사곡(芙蓉相思曲)'도
이런 흠모(欽慕)의 사랑(情)을 담고 있다.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한다면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읍니까?
세상에는 삼십객 노인이 있는 반면
팔십객 청춘도 있는 법입니다.`
이 멋진 말은 조선시대 순조임금 때
1820년~1869년까지 한 세상을 살다간
여류시인으로 유명한
운초 김부용(雲楚 金芙容)이 남긴 말이다.
그녀는 평안도 선천에서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고 한다.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 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에 통하였다고 하니
아마도 여간한 문재가
아니였던 모양이다.
열 살 때 부친을 여의고
그 다음해 어머니마저 잃으니,
부용은 어쩔 수 없이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시명(詩名)을 운초(雲楚)라고 하는 부용은
한번 배우면 둘을 깨우칠 만큼 영특하였고,
용모도 몹시 고와서
뭇 사내들의 가슴을 태웠다고 한다.
열두 살에 기적에 오르고,
열다섯 살엔 시문과 노래와 춤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얼굴마저 고와 천하의 명기로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다.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자
많은 풍류객이 찾아와 재기를 칭찬하고,
수령의 수청을 독차지해
동료 기생의 시샘을 받았다.
열아홉 살이 되었을 때
운초에게 일생의 전환기가 왔으니
선천(善川)에 신임 사또가
부임해 온 것이다.
그는 정사에만 힘쓰는 명관(名官)으로
운초의 특출한 용모와 재색을 아껴
자기 스승인 평양감사
김이양(金履陽)에게 소개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서
요즈음의 성상납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할 터이다.
선천부사(善川府使)쯤이야 하루 아침에
목을 뎅겅 날려버릴 만한 권세를 가진 것이
평양감사라는 요직이고
매관 매직이 판을 치던 시대이니만치
자기 출세를 위해서
기생을 바쳤다는게 적당한 표현이다.
김이양(金履陽),
그가 젊었을 때
몹시도 가난하여 굶기를 밥먹듯하였다.
하루는 저녘도 못 먹고 굶고 자는데,
도둑이 들어 쌀이 없자
부뚜막을 헐고
솥을 떼어가는 소리가 났다.
부인이 남편을 깨워 살림살이의 전부인
솥을 가져 간다고 하자
김이양은, `오죽 가난하면 남의 집 솥을 떼어가겠소.
우리보다 못한 사람인 것 같으니 내버려 둡시다` 하였다고 한다.
이 소리를 들은 도둑은
크게 깨달아 솥을 그냥 두고 갔으며,
그 후로 열심히 일하여
부자가 되었다.
훗날 김이양이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옥당 학사(玉堂學士)로 있을때
은혜를 갚고자 찾아와
둘은 그 후 백년지기처럼 친하게 지냈다하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남긴 사람이다.
그 김이양(金履陽1755∼1845)은
호가 연천(淵泉)으로,
풍채가 뛰어나고 시문에 능하였으며,
예조 판서를 거쳐 평안감사를 역임하고 있었다.
그 때 선천부사로 부임해온 사또가 있었는데
신임 사또는 정무가 대략 파악되자
운초를 데리고
평양으로 김이양을 찾아갔다.
특별히 아끼는 제자가 오자
김이양은 그를 위해 대동강가 `연광정(練光亭-북한국보 제16호)`에서
환영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이 자리에서 신임 사또는
부용을 소개하였는데,
그 때 김대감의 나이는 이미 77세였고,
그녀의 나이는 겨우 19세였다.
시문을 통해 일찍이
김이양의 인품을 흠모해 온 부용은
평양에 머물면서
김이양의 신변을 돌보아 드리라는 사또의 명에
기쁜 마음으로 따랐다고 하는데
천거에 대해 김이양이 거절하자,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한다면
연세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세상에는 삼십객 노인이 있는 반면
팔십객 청춘도 있는 법입니다.` 라고 말하여
부용을 거두게 되었다고 한다.
김이양은 총명하고
아름다운 부용을 끔찍히 사랑하였고,
부용 역시 연만한 늙은
감사의 공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두사람은 비록 김이양이 나이가 들어
남자 구실은 못해도
서로 마음을 나누며
정답게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김이양이 호조 판서가 되어
한양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이별을 하게 되자
김이양은 직분을 이용하여
부용을 기적에서 빼내
양인의 신분으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정식 부실(室)로 삼고는
훗날을 기약하며
혼자서 한양으로 떠나 갔다.
생이별을 한 운초는 재회의 날만 기다리며
외로움과 그리움의 나날을 보냈다.
몇달이 가도 소식이 없자
원망도 많이 하였다.
멀리 있는 님을 생각하니
때로는 보고도 싶고,
때론 잊지나 않았나
의심도 하고,
때론 걷잡을 수 없는 이별의 슬픔으로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부용은 피를 토하는 듯한
애절한 시를 써서 인편으로 보냈다.
모양이 △ 탑 모양으로 지은 시는
부용이 남긴 가장 아름다운
`부용상사곡(芙蓉相思曲)`이라는
보탑시(寶塔詩)이다.
別 思 路遠 信遲 念在彼 身留玆 紗巾有淚 雁書無期 香閣鍾鳴夜 鍊亭月上時 依孤枕驚殘夢 望歸雲 遠離 日待佳期愁屈指 晨開情札泣支 容貌憔悴把鏡下淚 歌聲鳴咽對人含悲 銀刀斷弱腸非難事 珠履送遠眸更多疑 朝遠望暮遠望郎何無信 昨不來今不來妾獨見欺 浿江成平陸後鞭馬 過否 長林變大海初乘船欲渡之 見時少別時多世情無人可測 好緣短惡緣長天意有誰能知 一片香雲楚臺夜神女之夢在某 數聲良甥柰樓月弄玉之情屬誰 欲忘難忘强登浮碧樓可惜紅顔老 不思自思乍倚牡丹峯每歎綠髮衰 獨宿空房下淚如雨三生佳約寧有變 孤處香閨頭雖欲雪百年貞心自不移 罷春夢開竹窓迎花柳少年總是無情客 推玉枕攬香衣送歌舞者 莫非可憎兒 千里待人難待人難甚矣君子薄情豈如是 三時出門望出門望悲哉賤妾苦懷果何其 惟願寬仁大丈夫決意渡江舊緣燭下欣相對 勿使軟弱兒女子含淚歸泉哀魂月中泣相隨
이별하옵니다
(別-별)
그립습니다
(思-사)
길은 멀고
(路遠-노원)
글월은 더디옵니다
(信遲-신지)
생각은 님께 있으나
(念在彼-념재피)
몸은 이 곳에 머뭅니다
(身留玆-신유자)
비단 수건은 눈물에 젖었건만
(紗巾有淚-사건유루)
가까이 모실 날은 기약이 없습니다
(雁書無期-안서무기)
향각서 종소리 들려 오는
(香閣鍾鳴夜-향각종명야)
이 밤 연광정에서 달이 떠오르는
(鍊亭月上時-연정월상시)
이 때 쓸쓸한 베게에 의지했다가
(依孤枕驚殘夢-의고침경잔몽)
잔몽에 놀라 깨어 돌아오는 구름을 바라보니 멀리 떨어져 있음이 슬픔니다
(望歸雲 遠離-망귀운원리)
만날 날 수심으로 날마다 손꼽아 기다리며
(日待佳期愁屈指-일대가기수굴지)
새벽이면 정다운 글월 펴 들고 턱을 괴고 우옵니다
(晨開情札泣支-신개정찰읍지)
용모는 초췌해져 거울을 대하니 눈물 뿐이고
(容貌憔悴把鏡下淚-용모초췌파경하루)
목소리도 흐느끼니 사람 기다리기가 이다지도 슬픔니다
(歌聲鳴咽對人含悲-가성명인대인함비)
은장도로 장을 끊어 죽는 일은 어렵지 않으나
(銀刀斷弱腸非難事-은도단약장비난사)
비단신 끌며 먼 하늘 바라보니 의심도 많습니다
(珠履送遠眸更多疑-주리송원모경다의)
어제도 안 오시고 오늘도 안 오시니 낭군님께서 어찌 그리 신의가 없습니까
(朝遠望暮遠望郎何無信-조원망모원망낭하무신)
아침에도 멀리 바라보고 저녘에도 멀리 바라 보니 첩만 홀로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昨不來今不來妾獨見欺-작불래금불래첩독견기)
대동강이 평지가 된 뒤에나 말을 몰고 오시려 합니까
(浿江成平陸後鞭馬 過否-패강성평육후편마과부)
장림이 바다로 변한 뒤 노를 저어 배를 타고 오렵니까
(長林變大海初乘船欲渡之-장림변대해초승선욕도지)
이별은 많고 만남은 적으니 세상사를 누가 알 수 있으며
(見時少別時多世情無人可測-견시소별시다세정무인가측)
악연은 길고 호연은 짧으니 하늘의 뜻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好緣短惡緣長天意有誰能知-호연단악연장천의유수능지)
운우무산에 행적이 끊기었으니 선녀의 꿈을 어느 여자와 즐기시나요
(一片香雲楚臺夜神女之夢在某-일편향운초대야신녀지몽재모)
월하봉대에 피리 소리 끊기었으니 농옥의 정을 어떤 여자와 나누고 계십니까
(數聲良甥柰樓月弄玉之情屬誰-수성양생내루월농옥지정속수)
잊고자해도 잊기가 어려워 억지로 부벽루에 오르니 홍안만 늙어가고
(欲忘難忘强登浮碧樓可惜紅顔老-욕망난망강등부벽루가석홍안노)
생각치 말자해도 절로 생각나 몸을 모란봉에 의지하니 슬프도다. 검은 머리 자꾸 쇠해가고
(不思自思乍倚牡丹峯每歎綠髮衰-불사자사사의모란봉매탄녹발쇠)
홀로 빈 방에 누우니 눈물이 비오 듯하나 삼생의 가약이야 어찌 변할 수 있으며
(獨宿空房下淚如雨三生佳約寧有變-독숙공방하누여우삼생가약녕유변)
혼자 잠자리에 누었으나 검은 머리 파뿌리 된들 백년 정심이야 어찌 바꿀 수 있으랴
(孤處香閨頭雖欲雪百年貞心自不移-고처향규두수욕설백년정심자불이)
낮잠을 깨어 창을 열고 화류소년을 맞아들여 즐기기도 했으나 모두 정 없는 나그네 뿐이고
(罷春夢開竹窓迎花柳少年總是無情客-파춘몽개죽창영화류소년총시무정객)
베게를 밀고 향내 나는 옷으로 춤을 춰 보았으나 모두가 가증한 사내 뿐 입니다.
(推玉枕攬香衣送歌舞者 莫非可憎兒-추옥침람향의송가무자막비가증아)
천리에 사람 기다리기 이토록 어려우니 군자의 박정은 어찌 이다지도 심하십니까
(千里待人難待人難甚矣君子薄情豈如是-천리대인난대인난심의군자박정기여시)
삼시에 문을 나가 멀리 바라보니 애처로운 천첩의 심정은 과연어떠하겠습니까
(三時出門望出門望悲哉賤妾苦懷果何其-삼시출문망출문망비재천첩고회과하기)
오직 바라건데 관인하신 대장부께서 강을 건너오셔 구연의 촛불아래 흔연히 대해 주시고
(惟願寬仁大丈夫決意渡江舊緣燭下欣相對-유원관인대장부결의도강구연촉하흔상대)
연약한 아녀자가 슬픔을 머금고 황천객이 되어 외로운 혼이 달 가운데서 길이 울지않게 해 주옵소서
(勿使軟弱兒女子含淚歸泉哀魂月中泣相隨-물사연약아녀자함루귀천애혼월중읍상수)
학수고대하던 김이양이
사람을 보내 부용을 부르니,
부용은 한양 남산 중턱에
신방을 꾸몄다.
그 집은 단촐하였지만
숲이 우거졌고,
기화요초로 정원을 꾸며
'녹천당(祿泉堂)'이라 하였다.
이 곳을 찾아 온 김이양의 친구는
부용을 '초당마마(草堂)'라 불렸다.
김이양이 83세로 벼슬에서 물러나자
임금은 그에게 '봉조하(奉朝賀)'라는 벼슬을 제수하였다.
그 벼슬은 종신토록
품격에 해당하는 녹을 받고
국가의 의식이 있을 때는
조복(朝服)을 입고 참여할 수 있는
특별한 예우직(職)이다.
김이양이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한 생활을 하자
그들은 원앙새처럼 다정하게 지냈다.
과거에 급제한지 60년이 되는
회방(回榜)잔치가 89세에 있자,
김이양은 부용을 데리고
천안 조상의 묘를 참배하였다.
그러나 회자정리(會者定離)라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는 법,
그들이 깊은 인연을 맺은 지
15년이 되는 1845년 이른 봄
김이양은 92세의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임종 시 김이양은 부용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았는데,
이 때 부용의 나이는
겨우 33세였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님을 잃자
부용은 방안에 제단을 모시고 밤낮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며
애통한 심정을 시로 달랬다.
風流氣槪湖山主
풍류기개호산주
經術文章宰相材
경술문장재상재
十五年來今日淚
십오년래금일루
峨洋一斷復誰栽
아양일단복수재
풍류와 기개는 호산의 주인/
경술과 문장은 재상의 기틀/
십오 년 정든 님 오늘의 눈물/
끊어진 우리 인연 누가 다시 이어줄고../
부용은 고인과의 인연을 회상하면서
일체 외부와의 교류를 끊고,
오로지 고인의 명복만을 빌며
16년을 더 살았고,
그녀 역시 님을 보낸
녹천당에서 눈을 감았다.
부용은 어느날 꿈에서
그리운 님을 뵙고
다정한 시간을 함께 보낸 후
시를 읊었는데,
二十年前夢裡人
이십년전몽리인
海天相對白頭新
해천상대백두신
從此無心傷歲暮
종차무심상세모
一樽談笑別生春
일준담소별생춘
20년간 그리던 님을/ 이제사 꿈에 보니/
서로간 상대하니/ 백발이 새로 났네/
이제라도 헤어진다면/ 서러워 말고/
잔 들어 담소하며/ 봄을 보내소서../
그녀는 임종이 다가오자
유언으로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대감마님이 있는
천안 태화산 기슭에 묻어주오." 라며
다시 못 올 불귀의 객이 되었다.
천안의 테화산 산마루에
김이양의 무덤이 있다.
조금 아래에 또 하나의
정갈한 작은 무덤이 있다.
그 옆 묘비에는
'詩人 雲楚 金芙蓉之墓'라 쓰여 있다.
무덤은 조그맣고 동그라니
부용의 얼굴처럼 예쁘기만하다.
생전 그토록 사랑하였던 김이양을
죽어서도 가까운 산기슭에서 모시니,
부용의 사랑은
끝나지 않은 것인가?
그의 문집인
<운초시(雲楚詩ㆍ일명 芙蓉集)>에는
약 백오십여 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보탑시(寶塔詩) 한 구(句)를
다시 읽어본다.
浿江成平陸後鞭馬 過否
패강성평육후편마 과부
대동강이 평지가 된 뒤에나/
말을 몰고 오시려 합니까/
그리움이 쌓이면
미움이 되는가.
기다림에 지치면
서러움이 되는가.
기다리는 애절한 마음이
가슴을 후벼판다.
*
운초(雲楚):
송도의 황진이(黃眞伊)와 부안의 이매창(李梅窓),
그리고 운초 김부용(金芙蓉)을 조선 시대를 통털어 시 잘 짓고
노래 잘하는 조선의 3대 명기라고 칭한다.
♡
- 사맛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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