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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곡잡영(愚谷雜詠) 절구 이십 수 / 정경세(鄭經世)

淸潭 2025. 5. 19. 11:30

우곡잡영(愚谷雜詠) 절구 이십 수 / 정경세(鄭經世)

 

복집 제1 / ()

우곡잡영(愚谷雜詠) 절구 이십 수 병오년(1606, 선조39)

 

서실(書室)

성현께선 가셨으나 책은 남아 있으니 / 聖賢往矣書猶在

마음 쏟아 이해하면 공효 바로 드러나리 / 窮到心融卽見功

이 속에 들어앉아 부지런히 힘 쏟으며 / 好向此中勤着力

윤편이 환공 보고 비웃은 걸 혐의 말라 / 莫嫌輪扁笑桓公

 

계정(溪亭)

만 골짜기 바람과 물 속에 홀로 살아가매 / 萬壑風泉獨掩扃

긴긴 해에 계정에는 찾아오는 사람 없네 / 日長無客到溪亭

늙어가매 뜻 나른해 책을 놓고 나가보니 / 晩來意倦抛書出

눈 안 가득 신록이라 뜰 안 온통 푸르르네 / 潑眼新陰綠滿庭

 

회원대(懷遠臺)

천척 높은 바위 위서 옥거문고 끌어안고 / 巖臺千尺抱瑤琴

날 저물어 어둑토록 황우 음악 노래하네 / 詠歎黃虞坐暮陰

산은 멀고 물은 긴데 사람은 아니 오매 / 山遠水長人不到

물고기와 새가 응당 나의 지음 친구이네 / 只應魚鳥是知音

 

오봉당(五峯塘)

돌을 쌓고 물 끌어와 작은 연못 만드니 / 疊石留泉作小池

산 그림자 물속 비쳐 아주 잘 어울리네 / 鏡中峯影絶相宜

먼젓번에 연 심는 법 시험해 보았나니 / 昨來更試栽荷法

마침 열 길 되는 연꽃 필 때를 만났구나 / 會見開花十丈時

 

오로대(五老臺)

다섯 용이 바위 끝에 위태롭게 서렸는데 / 五龍蟠屈石頭危

무서리와 천년 싸운 늙은 모습 기이하네 / 歷戰千霜老更奇

그때 당시 도끼질한 사람을 원망 말라 / 莫向當年怨斤斧

나무꾼이 어찌 곧은 자태 아낄 줄을 알리 / 樵翁那解惜貞姿

예전에 점촌(占村)을 맡고 있을 적에 촌 노인네가 그 가운데 한 그루를 베어 낸 탓에 지금은 곁가지만 남아서 기울어진 일산(日傘) 모양을 하고 있다.

 

상봉대(翔鳳臺)

천길 높은 언덕 위서 홀로 옷깃 펼치니 / 千仞岡頭獨振衣

가는 구름 오는 새 평평하게 나는구나 / 去雲來鳥看平飛

뜻 유연해 할 말을 모두 다 잊었는데 / 悠然意得都忘語

저문 해에 긴 노래는 푸른 산을 울리네 / 日暮長吟弄翠微

 

오주석(鰲柱石)

하늘의 축이 되어 절로 빙빙 도는데도 / 樞軸穹窿自轉旋

기인은 어리석게 하늘 꺼짐 걱정했네 / 杞人癡絶謾憂天

못난 나는 버티는 데 힘 보탤 수 없으니 / 區區莫效支撑力

산문이나 지키면서 늙은 신선이나 되리 / 好鎭山門作老仙

 

우화암(羽化巖)

허공 밟고 걸어가매 흥취가 끝없나니 / 步步凌虛興未窮

육근은 참 아니고 빈 것 또한 아니네 / 六根非實又非空

전에 잘못 《참동계》를 시험해 보았는데 / 從前枉試參同契

오늘에는 하늘 유람 그 속에 절로 있네 / 今日天遊自在中

 

어풍대(御風臺)

맑을세라 신선 세계 티끌세상 벗어나니 / 泠然眞界出氛埃

만리토록 부는 바람 겨드랑이 아래 부네 / 萬里剛風腋下來

단지 고향 그리는 맘 잊을 수가 없기에 / 只爲故鄕忘不得

훨훨 날아올라 곧장 봉래산을 향해 가네 / 翩翩直可到蓬萊

 

만송주(萬松洲)

해그림자 지나가고 구름 낮게 드리우며 / 日將影過雲垂地

바람 멀리 불어오고 바닷물은 허공 솟네 / 風得聲來海撼空

젤 좋은 건 온 세상에 눈이 듬뿍 쌓였을 때 / 最好世間三丈雪

만 그루의 푸른빛이 온통 섬을 덮은 거네 / 萬株春色一洲中

 

산영담(山影潭)

연못 위의 산빛은 사방이 다 푸르른데 / 潭上山光碧四圍

연못 속에 산 잠기매 더욱 맑고 기이하네 / 來潭底較淸奇

모름지기 봄비 더해 하늘 비추도록 하고 / 須添好雨涵虛靜

살랑바람 불어 보내 물결 일게 하지 마소 / 莫遣輕風漾綠漪

 

수륜석(垂綸石)

옛사람은 낚시하며 미끼 달지 않았지만 / 古人垂釣還忘餌

나는 낚시 없거니와 어찌 줄이 있으리오 / 我本無鉤豈有綸

본디부터 호량 기쁨 안 지 이미 오래거니 / 自是濠梁知樂久

막대 짚고 종일토록 노는 고기 바라보네 / 終日玩遊鱗

 

선암(船巖)

귀신같이 도끼질해 만곡 싣는 배 만든 건 / 神斧鑱成萬斛舟

조화옹이 응당 사람 건네주려 한 것이리 / 化工應爲濟人謀

세간에는 이 배 띄울 만한 물이 없는 탓에 / 世間水乏行渠力

텅 빈 물가 버려진 채 오래도록 쉬고 있네 / 閣在空洲爛合休

 

화서()

날씨 좋고 모래 맑고 물은 굽어 감도는데 / 日暄沙淨水縈回

철쭉꽃은 산 이루어 양쪽 물가 피어 있네 / 躑躅成山夾岸開

다행히도 물결 따라 떠내려가지 않아 / 幸爾不隨波浪去

사람들이 이 사이를 찾아오게 하는구나 / 惹人尋逐此間來

 

운금석(雲錦石)

반들대는 반석 위에 이끼 어찌 자라리오 / 瑩滑那容一點苔

펼쳐놓은 구름 비단 상제께서 마른 거네 / 幾張雲錦帝親裁

억만겁을 물과 모래 씻어 주지 않았다면 / 不因萬劫濤沙

어찌 저리 밝은 광채 낼 수가 있었으랴 / 爭得晶光許好來

 

쌍벽단(雙壁壇)

양쪽 절벽 물가에서 푸른 병풍 펼쳤으매 / 雙崖臨水翠屛開

열 이랑의 소나무 숲 티끌이 하나 없네 / 十畝松陰絶點埃

좋은 경치 안 아끼고 반쪽 나눠 준다 한들 / 佳境不慳分一半

지금 사람 어느 누가 이 산을 찾아오랴 / 今人誰肯爲山來

 

청산촌(靑山村)

붉은 단애(斷崖)와 푸른 나무와 하얀 모래와 맑은 담()이 있어 보기에 아주 좋은 곳인데, 예전에 청산(靑山)이라는 야인(野人)이 이곳에 살았으므로 지금은 그 지역을 청산촌이라고 부른다.

 

야인의 맘속 계획 엉성하지 전혀 않아 / 野人心計未全疎

이곳 와서 수석 사이 자리 잡고 살았어라 / 此地來依水石居

오늘 홀로 찾아오매 모두 폐허 되었거니 / 今日獨來墟落盡

어디에서 함께 밭 갈 장저를 찾으리오 / 耦耕何處覓長沮

 

화도암(畫圖巖)

그림 같은 얼굴에다 옥과 같은 정신으로 / 丹靑顔面玉精神

못가에 둘이 서로 어우러져 서 있구나 - 양쪽 바위가 나란히 서 있다. - / 潭濱德有隣

이 사이에 작은 초가 얽어 짓고 내 산다면 / 擬向此間棲小屋

사람들 날 그림 속의 신선이라 부르리라 / 看人呼我畫中人

 

이곳에다가 오래전부터 정사(精舍)를 지으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공선봉(拱仙峯)

백 길 되는 푸른 절벽 열 길 되는 신선들아 / 百丈蒼厓十丈仙

내 묻노니 몇 년이나 팔짱낀 채 서 있었나 / 問君高拱幾何年

세상일에 마음과 뜻 조금치도 없는 탓에 / 應緣與世無情意

흥망성쇠 다 거치며 홀로 아니 기운 거리 / 閱盡興亡獨不騫

 

수회동(水回洞)

병풍 허공 걸려 있고 뭇 신선들 공수한단 / 畫障懸空拱列仙

창옹의 글 글자마다 모두 전할 만하구나 / 蒼翁文字字堪傳

 

창석공(蒼石公)이 일찍이 이곳에서 노닐면서 지은 기승록(記勝錄) 한 편()이 있는데, 첫 번째 구절은 그 글 가운데에서 산봉우리를 표현한 말을 뽑아내어 지은 것이다.

 

단지 혐의스런 건 조물주가 유독 아껴 / 只嫌造物慳偏甚

현가 소리 동천 안에 들이지 않는 거네 / 不許絃歌入洞天

 

처음에 이곳에 서원(書院)을 짓기로 의논하였는데, 여러 사람들의 뜻이 깊고 궁벽진 것을 싫어하여 그 의논이 마침내 폐기되었다.

 

내가 천석(泉石)을 몹시도 좋아하여 스스로 이곳에다 집을 짓고 살면서 날마다 관동(冠童) 몇 명을 데리고서 기이한 경치를 찾아다녔는데, 상하(上下) 십여 리 사이에 있는 깎아지른 절벽과 굽이진 물가와 깊은 골짜기와 깊은 숲에 발길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에 바야흐로 흔연히 정취를 얻어서 스스로 이 세상 사이에 그 어느 것도 나의 이 즐거움과는 바꾸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면서 장차 이렇게 살면서 늙어 죽을 계획을 하였다. 그런데 한두 해 전부터 내 몸에 질병이 찾아들어 근력이 떨어진 탓에 높은 곳에 올라가고 아름다운 경치를 찾는 흥이 점차 쇠해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또한 이와 같이 분란스럽게 보내는 것 역시 뜻을 손상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다시 문을 닫아걸고 조용히 살면서 심신을 편안하게 하고, 때때로 경전(經典)을 다시금 찾아 읽으면서 글 뜻을 완미하노라니, 해는 짧고 길은 멀다는 걱정이 들었는바, 지난날에 이른바 즐거움이란 것은 능히 하지 못할 바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렇게 할 겨를도 없었다. 병든 가운데 눈을 감은 채 묵묵히 지난날에 노닐던 곳을 생각해 보다가 절구 20수를 얻어서 벽에다 써 붙여 놓고는 한가한 가운데 누워서 유람하는 흥을 부쳤다. 병오년(1606, 선조39) 모춘(暮春) 하완(下浣)에 석중병인(病人)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