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문학/古典散文

선비가 고백하는 노동의 즐거움

淸潭 2020. 11. 18. 10:32

선비가 고백하는 노동의 즐거움

 
 
 

사랑이 있든지 없든지 방 하나를 따로 차지하고 들어앉아서 폐포파립(弊袍破笠)이나마 의관을 정제하고, 대개는 꿇어앉아서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비롯한 수많은 유교 전적을 얼음에 박 밀듯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내리외는 것이 날마다 그의 과업이다. 이런 친구들은 집안 살림살이와는 아랑곳없다. 가다가 굴뚝에 연기를 내는 것도, 안으로서 그 부인이 전당을 잡히든지 빚을 내든지 이웃에서 꾸어 오든지 하여 겨우 연명이나 하는 것이다.

 

이희승 선생의 ‘딸깍발이’ 중 한 대목이다. 지난 시대 선비들에게 생계와 일에 서툴다는 것은 은근한 자랑이고 칭찬이었다. 겉으로야 재주 없고 물정 모르는 오활한 사람이라고 겸손을 떨며 손사래를 치지만 속으로는 시속의 이끗을 멀리하는 문사로의 삶에 자부심이 자못 높았다. 자신의 가난한 살림을 안연의 단표(簞瓢)에 슬쩍 투사하며 안빈낙도를 자처하였다. 냉담가계(冷淡家計)란 경전 공부를 뜻하는 말이지만, 경전 공부에 잠심하다가 가계가 참으로 냉담해졌으니 영 틀린 말도 아니다.

 

단지에 쌀이 떨어져 굶어도 땔나무가 없어 오들오들 떨어도 국화를 읊고 대나무를 노래할 뿐 선비는 일을 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선각적 지식인으로 알려진 최한기(崔漢綺) 역시 손의 쓰임에 대해 논하며 백성을 인도하는 사대부의 손은 ‘귀한 자의 손의 쓰임’이라 하고, 기계를 제작하고 노동을 하는 손은 ‘천한 자의 손의 쓰임’이라고 하였다. 시행에 귀천이 없다고 단서를 달기는 하였으나, 의식의 심연에 ‘노동은 천한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안동 내앞에서 태어나 밀암(密庵) 이재(李栽)의 수제자로서 퇴계학맥의 중심에 서 있었던 구사당 김낙행은 전형적인 영남 선비였다. 평생토록 벼슬에 나가지 않고 사랑에 단정히 앉아 얼음에 박 밀듯이 경전을 내리읽는 것이 그의 소업이었다. 그런 그에게 빈둥거리지 말고 자리라도 짜보라고 부인이 성화를 댔다. 하는 수 없이 자리를 짜던 구사당은 짧은 시간이지만 삶에서 참으로 색다른 경험을 했다. 노동의 즐거움과 보람을 몸으로 느낀 것이다.

 

할 일 없이 빈둥거린다는 무소용심(無所用心)은 『논어』에 나오는 표현으로 공자가 일찍이 장기나 바둑보다 못한 한심한 짓이라 핀잔을 준 적이 있다. 그런데 구사당은 자신의 독서행위를 그저 밥이나 축내며 빈둥거리는 행위로 표현하는 한편 직접 손을 놀려 자리를 짠 일을 두고 비로소 밥값을 했노라고 자랑하고 있다. 난생처음으로 가계에 무언가 보탬을 주었다는 뿌듯함에 의식하지 못한 사이 사유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고단함을 잊고 일에 빠져 식사나 손님을 맞을 때가 아니면 놓지 않았다고 고백하였으니, 발분망식(發憤忘食)에야 비길 수 없지만 굉장한 즐거움을 경험한 것만은 틀림없다. 그리고 즐거움에 들떠 고상한 선비의 체면 따윈 잊어버리고 손을 놀려 일하는 보람을 글로 써서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그중 제일 길게 서술된 것은 다섯 번째인데, 평생 처음으로 밥값을 해본 자가 자신의 손으로 어머니와 처자식에게 기쁨을 선사한 것에 대한 만족감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구사당이 자신의 학문 행위를 진정으로 무가치한 것이라 여겼다고 보기는 어렵다. 성화에 못 이겨 시작한 자리 짜기를 계기로 우연히 노동의 즐거움과 보람을 깨달았다고 보는 편이 옳겠다. 그러나 이러한 작은 사유의 전환이 새로운 변화를 만든다. 세상은 또 이렇게 한 걸음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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