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고시(十孤詩) - 이식/택당속집6권
소싯적에 술사(術士)가 나의 사주팔자를 따져 보고는 말하기를 “두 번이나 고진(孤辰)을 만나게 되니, 주인의 일생 역시 고단(孤單)하여 위태로운 곤경을 겪게 될 것이다.” 하였다. 지금 내가 노경(老境)에 접어들수록 낭패를 당하는 것이 더욱 심해지기만 하는데, 평생 동안 나의 신변에 일어난 일을 뒤돌아보건대, 고(孤)라는 글자 하나가 빌미로 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느낌이 들기에, 그저 애오라지(오로지) 자조(自嘲)하는 뜻으로 십고(十孤)의 절구시를 짓게 되었다.
고죽(孤竹)
기원의 일만 그루 대나무 숲엔 못 비해도 / 淇園不比萬株槍
뭇 풀들 옆에 간들간들 서 있는 하나의 대 / 隻簳依依衆卉傍
한겨울에 한 치의 푸름 끝내 간직하려는가 / 擬向歲寒留寸碧
세찬 바람 쌓인 눈에 부러지면 어떡하지 / 風掀雪壓奈摧傷
고송(孤松)
부끄러워라 봄 모습 다투는 천자만홍(千紫萬紅) / 羞將紅紫競春容
초목 사이에 홀로 서서 짙푸름 오연(傲然)히 고수하네 / 獨保靑蔥傲衆茸
앉으려다 몸 뒤집어 날아가는 저녁 참새 / 暮雀欲投翻却去
차디찬 나뭇가지 서리와 눈이 엉겼네 / 凍枝其奈雪霜封
고란(孤蘭)
산에 가득 홍록들이 봄빛에 화사하니 / 滿山紅綠麗春陽
홀로 숨어 향기 뿜는 난초를 누가 알아보랴 / 誰辨幽叢獨抱芳
가을에 시인이 와서 차 주기를 기다리나 / 擬待騷人秋紉佩
난감하네 뜨락에 잡초들만 꽉 찼으니 / 不堪蕭艾已充堂
고안(孤雁)
떼를 지어 날아온 형양의 일천 군진(軍陣) / 衡陽千陣自群飛
일망무제(一望無際) 하늘에서 짝을 잃고 말았는가 / 一望雲霄舊侶違
달도 없는 깜깜한 밤 모래톱 망에 혹 걸릴라 / 月黑汀洲罾弋在
날도 차가운 밭고랑에 이삭도 별로 없을 텐데 / 天寒畦壟稻粱微
고학(孤鶴)
헌지에서 가지런히 날개 펴고 조금 날다 / 軒墀簉羽一分飛
수향(水鄕)의 풍상에 늘어뜨린 채색 깃털 / 水國風霜彩翮垂
한밤중에 몇 차례 맑은 울음 토한다만 / 淸唳數聲中夜發
수풀 가득 잡새들은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 / 滿林烏鵲不曾知
고검(孤劍)
교룡과 코뿔소 벨 때에는 정채(精彩)를 발하지만 / 剸兕誅蛟自有精
충성과 약수에는 둘 다 모두 뜻이 없네 / 衝星躍水兩無情
먼지 낀 벽의 괴구 그 누가 알아보랴 / 蒯緱塵壁無人識
삼라한 무고라는 별명만 괜히 얻었다오 / 武庫森羅漫得名
고주(孤舟)
천 척의 배들 꼬리 물고 강을 내려가는데 / 千艘銜尾下江關
무슨 일로 거룻배 하나 물굽이에 묶여 있노 / 何許孤篷繫曲灣
길손의 발길 끊어진 해 넘어가는 나루터 / 一暮渡頭行旅絶
한가로이 모랫가에 해오리하고만 노니누나 / 沙邊惟伴鷺絲閑
고운(孤雲)
금새 몸을 바꾸는 백의와 창구 속에 / 白衣蒼狗變斯須
어여뻐라 공중의 한 조각 고운(孤雲)이여 / 可愛當空一片孤
산에서 나와 산으로 들어간들 어떠랴만 / 出岫不妨還入岫
어느 때나 비 퍼부어 마른 땅 적셔 줄까 / 幾時霖霔與蘇枯
고서(孤嶼)
구천(九泉) 깊이 그 뿌리 서려 있기에 / 爲有蟠根九地深
천고토록 우뚝 솟아 강 문턱을 지키도다 / 江門千古立崟岑
무심하게 지나가는 장사꾼 배 관원의 배 / 商帆官舶從他過
눈이 퍼붓든 우레가 치든 그냥 내맡겨 두려무나 / 雪礮雷車任爾侵
고월(孤月)
구름 걷힌 가을 하늘 티끌 한 점 없는데 / 雲捲秋空點翳銷
찬 하늘에 솟구친 한 조각 얼음 수레바퀴 / 氷輪一片湧寒霄
고요해라 깊은 산골 은자(隱者) 홀로 높이 누워 / 幽人獨臥窮山靜
적요한 뜨락 비쳐 주는 고마운 달빛을 만끽하네 / 贏得餘光照寂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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