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스님들 소식

“무엇이 저 山을 만신창이 만드나”

淸潭 2007. 5. 24. 12:42

 

[수경스님에게 듣는다] “무엇이 저 山을 만신창이 만드나”
 
부처님오신날(24일)을 맞는 삼각산(북한산) 화계사의 신록이 눈부실 정도로 곱다. 푸름과 어울린 오색 연등이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드러내는 마음의 등불로 걸려있다. 지난 20일 수원대 인문대 이주향 교수가 화계사 보화루(寶華樓) 다각실로 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인 수경스님(화계사 주지)을 찾아갔다. 수경스님의 ‘새만금 살리기 삼보일배’를 계기로 알게 된 두 사람은 부처님오신날의 의미와 환경·수행문제 등을 놓고 지극한 차담(茶談)을 나누었다.

이주향 교수=부처님오신날입니다. 부처님 오신 참뜻은 무엇인지요.

수경스님=사실 부처는 오고 가는 존재가 아니지요. 진리 그 자체이자 생명의 본질이니까요. 우리가 진정으로 부처님의 출세(出世)를 찬탄하는 길은 일체 생명이 다 부처님의 화신임을 투철히 자각하는 일이지요. 과연 우리는 이웃을, 자연을, 뭇 생명을 부처님처럼 대하고 공경하고 있는가, 하고 물어야 합니다.

이=지난 몇 년간 ‘지리산 살리기’부터 새만금 살리기 삼보일배, 그리고 지금은 서산 가야산 문제에 이르기까지 생태문제에 지극한 관심을 보이고 계십니다.

수경=한 생명이 사는 건 만 생명의 은혜를 입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갯벌, 산, 강물의 그 만 생명을 죽이고 있단 말이에요. 잘못 왔다 싶을 때는 멈추는 것이 도리고, 허물을 돌아볼 줄 알아야겠지요. 이런 성찰이 없는 한 물질은 결코 인간을 행복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진정으로 부처님이 오신 뜻을 기리는 일이겠지요.

이=스님께서 최근 불교계의 잡지에 조계종단을 비판하는 글을 쓰신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먼저 불교 교단이 바뀌어야 한다는 취지이신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개혁의 동력은 무엇으로 보십니까.

수경=종교 개혁은 종교의 정신에서 오는 겁니다. 수행하는 마음에서 오는 거지요. 불교식으로 말하면 무아(無我)를 보고 실천할 수 있는 수행력에서 오는 겁니다.

이=무아를 본다니요.

수경=무아를 본다는 것은 만물의 유기성과 관계성을 투철히 깨닫는 겁니다. 산이 헐리고 수천 그루의 나무가 잘려나가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감성이나, 수백만 평의 갯벌이 자본의 놀이터가 되어도 무감각한 감성으로는 만물의 관계성을 볼 수 없습니다. 진정한 수행자라면 만 생명을 부처님으로 섬겨야 합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우리 사회의 생명 감수성부터 길러나가야겠지요.

이=어쩌면 현대의 인간들은 부처를 죽이면서 스스로도 죽어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서산 가야산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수경=가야산은 100개의 절들이 있었던 곳입니다.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는 마애삼존불의 오묘한 미소가 거기 있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이=그러고 보니까 가야산은 박해를 피해 천주교 신자들이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고, 동학군들이 ‘홍익인간’의 꿈을 접은 곳이기도 합니다. 자연적으로 깊고 깊어서 역사적으로도 깊어진 산이 가야산입니다.

수경=그런데 그 온화한 기품으로 인간을 안아주는 그 산 곳곳에 송전탑을 세운다는 겁니다. 어쩌면 저리도 아름다운 곳만 골라서 만신창이로 만들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이=저도 가 보고 놀랐습니다. 일제 때 조선의 기를 빼앗겠다고 쇠말뚝을 박았음직한 자리마다 송전탑을 세우겠다고 파헤쳐 놓았더군요.

수경=송전 철탑과 비교하면 일제가 박아 넣은 쇠말뚝은 그래도 애교가 있는 편이에요. 송전탑은 흉물스러운 게 육중하기까지 하잖아요.

이=그러면 개발을 하지 말자는 거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수경=현대 사회에서 개발을 반대할 수 있나요. 그런데 그 자체로 보물인 산을 망치는 걸 개발이라 할 수 있을까요. 21세기형 개발의 중심에는 문화·생명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이=이제 우리는 자본과 효율성, 무한경쟁에 갇힌 그 성장의 감옥에서 나와야 할 때가 됐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명상을 하는 사람이 많이 늘었습니다. 그런데 한쪽에선 그것을 삶에 대한 도피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삶에 지치고, 인간 사이의 갈등을 풀어낼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내 탓이오’를 외며, ‘내 탓’도 아닌 것을 내 탓으로 받아들인다는 비판이지요.

수경=세상에 내 탓 아닌 것이 있나요.

이=어찌 모든 것이 내 탓이겠습니까.

수경=내 탓이라는 생각이 안 들면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만 생명이 다 내 얼굴이고 내 몸인데, 어찌 내 탓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마음자리에서 진짜 자비심도 생기는 겁니다. 명상이나 기도는 ‘나’를 바꾸는 힘의 원천이지요. 세상이 바뀐다고 내가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뀌는 법이니까. 불교가 할 일은 바로 이런 겁니다. 세계와 나, 너와 나, 자연과 나의 경계를 허물고 만 생명의 불성을 현현하게 하는 것이지요.

이=화계사는 어떻습니까.

수경=처음으로 주지를 맡고 보니, 제대로 하려면 이 일도 보통이 아니에요. 적어도 화계사만은 부처님처럼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위한 안식처와 도시 공동체로 가꾸어 볼 생각입니다. 앞으로 화계사를 공동체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위한 집으로 열어둘 것입니다.

이=저도 자주 들러야겠습니다.

수경=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참 좋은 때입니다.

〈정리=김석종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