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할 줄 알기 30운 〔知足 三十韻〕/ 서형수(徐瀅修)
명고전집 제2권 / 시(詩)
사람들은 참으로 만족할 줄 모르네 / 人誠不知足
만족할 줄 안다면 무엇을 원망하랴 / 知足何怨尤
내게는 하늘이 준 행운이 많으니 / 吾生多天幸
하늘이 준 행운 지금 헤일 수 있네 / 天幸今可籌
다행히 소나 말로 태어나지 않았어라 / 幸不爲牛馬
코뚜레를 하거나 재갈 물리는 / 穿鼻與絡頭
다행히 여자로 태어나지 않았어라 / 幸不爲女子
양잠과 길쌈에다 부엌일까지 하는 / 蚕織又爨厨
‘주(厨)’는 협운자(協韻字)이다.
다행히 노비에 끼지 않았고 / 幸不編傭僕
다행히 군역을 지지 않으며 / 幸不枕戈矛
풍채 좋은 일곱 자 건장한 몸에 / 軒軒七尺軀
다행히 종기 따위 나지 않았네 / 竝幸無瘡疣
어려서 글공부 익힐 수 있어 / 幼能攻書史
장성하여 무식을 면하였으니 / 長且辨魯魚
‘어(魚)’는 협운자이다.
재주는 짧으나 포부가 커서 / 才短心欲長
옛사람과 짝하리라 큰소리쳤네 / 嘐嘐古人儔
경학으로 근본을 배양하고 / 經學培其本
문장으로 형식을 가다듬으니 / 文章潤厥修
예악과 군정(軍政) 형정(刑政) 등등의 일이 / 禮樂兵刑事
모두 내 본분 안에 걱정할 일들 / 皆吾分內憂
등용되면 나라의 치세(治世) 이루고 / 用之爲東周
버려져도 천추에 이름을 전하리라며 / 舍爾傳千秋
세월이 다 가도록 올올히 매진했네 / 兀兀窮年華
늙음이 닥칠 줄을 모르는 듯이 / 若忘老將投
우리네 동방에는 참다운 유자가 드물어 / 東方少眞儒
근거 없는 설들만 시끌시끌 어지럽네 / 蓬問紛啁啾
원문의 ‘봉문(蓬問)’은 《관자(管子)》의 “근거 없는 간언(諫言)은 따르지 않는다.[飛蓬之問, 不在所賓.]”라는 말에서 나왔다.
경전의 주석서론《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를 아는 이 없고 / 疏無知十三
원문의 ‘십삼(十三)’은 《십삼경주소》를 말한다.
시문집은 오로지 한유와 구양수 등 팔가(八家)의 것만 보네 / 集但披韓歐
통상적인 범위 밖의 말 한번 냈다 하면 / 一涉度外言
깜짝 놀라 쳐다보고 원수처럼 적대하네 / 蒿目驚相讎
그래도 성인의 학문을 하는 무리인데 / 然猶聖人徒
그 어찌 시정의 잡배들에 견주리오 / 豈比市井曹
‘조(曹)’는 협운자이다.
허나 요즘 유행하는 어떤 습속은 / 近日一種俗
옛 협객 주가가 수치로 여길 만하네 / 都是朱家羞
원문의 ‘주가수(朱家羞)’ 3자는 《사기(史記)》 〈자객전(刺客傳)〉에서 나왔다.
명분과 의리가 무슨 상관이리오 / 名義干甚事
아첨 능한 관리가 곧 영걸인 것을 / 巧宦卽英流
남의 결점 찾아내면 가려운 곳 긁어낸 듯 / 索瘢癢得搔
남의 장점 보게 되면 가슴에 화살 다발 꽂힌 듯 / 見善胸攢鍭
몰래 서로 엿보고 부릅떠 노려보며 / 竊竊相睒眒
사소한 원한까지 기어코 갚으려 하네 / 睚眦要必酬
여종이 놀랄 만큼 이익 계산 철저하고 / 揲縑令婢仆
유 복야(柳僕射)의 여종이 개거원(蓋巨源)에게 팔려갔다. 거원이 비단 묶음 속에서 끝부분을 찾아 두께를 품평하는 것을 보고 그 여종이 낯빛이 변하며 거꾸러졌다.
돈을 쥐면 행여 남이 훔쳐갈까 걱정하니 / 據錢恐人偸
꿈속의 말인들 어찌 일찍이 / 何曾夢裡語
명성과 이익에서 벗어나 보았으랴 / 或脫聲利區
이런 자들과 함께 활동해야 하는 / 此輩與周旋
이내 삶이 참으로 걱정스러웠지만 / 我生良亦愁
임금님의 은혜가 두터웠기에 / 秪緣主恩厚
함부로 관직을 떠나지 못했더니 / 未遽簪籍抽
오만과 태만이 비방을 불러 / 敖惰仍招謗
거듭 배척받고 곤경에 빠졌네 / 擠排積困咻
이제는 이루었네 평소에 바라던 일 / 而今成宿願
남과 내가 각기 원하던 걸 얻었어라 / 物我同得求
조그만 오두막도 생활하기 충분하고 / 蝸廬足容膝
원문의 ‘용슬(容膝)’은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오두막 생활이 편안함을 잘 아네.[審容膝之易安.]”에서 나왔다.
좀먹은 서책도 초학(初學)에는 충분할사 / 蠧書足箕裘
원문의 ‘기구(箕裘)’는 《예기》 〈학기(學記)〉의 “훌륭한 대장장이의 자식은 반드시 먼저 갖옷 만들기를 배우고, 훌륭한 활 장인의 자식은 반드시 먼저 키 만들기를 배운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에서 나왔다.
당상관 통정대부로 임금님을 곁에서 모셨으니 / 通政官近密
이름 앞에 붙일 관함(官銜) 충분하고 넘치누나 / 頭啣足且浮
하늘이 내린 행운 이제부터 잘 지켜 / 從此天幸葆
새로운 학설들을 부지런히 모으리니 / 俛焉新說裒
그런 뒤에 만족이 비로소 충분해져 / 然後足方足
지난날의 기약을 저버리지 않게 되리 / 不負宿昔期
‘기(期)’는 협운자이다.
[주-D001] 만족할 줄 알기 :
【작품해제】 제26연 이후의 내용으로 보아 명고가 승지(承旨)를 역임한 뒤, 그리고 파직당한 직후의 작품이다. 명고가 처음 승지를 지낸 것은 1786년(정조10)이고, 1791년(정조15, 43세) 6월에 성천 부사(成川府使)에 임명되었다가 개인적인 관계 때문에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하직 인사를 하지 않아 파직된 일이 있으므로, 그 직후일 가능성이 높다.
명고는 ‘만족을 알면 원망이 없다.’라는 명제를 전제로 자신의 타고난 행운들을 짚어보았다. 그리고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참다운 학문을 닦는 삶의 가치를, 기존의 학설만 답습하며 명예와 이익에 매달려 시기 질투를 일삼는 세태와 대비하여 드러내었으며, 정계(政界)에서 밀려나 학문에 매진할 수 있게 된 것을 만족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 작품에는 명고의 학문관과 문장관이 드러나 있으니, 경학은 성리학적 해석에 국한된 송대(宋代)의 주석을 넘어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의 고주(古註)와 청대(淸代)의 새로운 학설까지 아울러야 하고, 문장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국한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평성 ‘尤’ 운 30운으로 구성된 일운도저격(一韻到底格)의 수구불용운체(首句不用韻體) 오언고시이다.
[주-D002] 【校】 蚕織又 :
교정고 수정사항으로, 원글자는 ‘▨▨與’이다.
[주-D003] 魯魚 :
본디 형태가 유사한 ‘노(魯)’ 자와 ‘어(魚)’ 자를 혼동한다는 말로, 흔히 전사(轉寫) 또는 간각(刊刻) 과정에서 글자가 잘못된다는 뜻으로 쓰인다. 여기서는 ‘변(辨)’과 함께 쓰여, 글자를 구분할 만큼은 무식을 면했음을 뜻한다.
[주-D004] 옛사람과 짝하리라 큰소리쳤네 :
맹자가 ‘뜻이 커서 걸핏하면 「옛사람, 옛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그 행실을 살펴보면 말과 일치하지 않는 사람[其志嘐嘐然, 曰‘古之人, 古之人’, 夷考其行而不掩焉者]’이라고 묘사한 광자(狂者)에 자신을 견준 것이다. 《孟子 盡心下》 이때 옛사람이란 요(堯)ㆍ순(舜)과 같은 옛 성인들을 말한다.
[주-D005] 爲東周 :
본디 ‘동방에 주(周)나라의 치도(治道)를 부흥시킨다.’라는 말로, 공자가 공산불요(公山弗擾)의 부름에 응하려 하면서 “어찌 나를 별 뜻 없이 불렀겠는가. 만약 나를 등용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동방에 주나라의 치도를 부흥시키겠다.[夫召我者而豈徒哉. 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라고 한 말을 원용한 표현이다. 《論語 陽貨》
[주-D006] 【校】 세월이 …… 매진하네 :
이 구 뒤에 본디 1차 가필된 원주 “▨▨▨兀兀以窮年”이 있었는데 삭제되었다. 시의 ‘兀兀窮年’이 한유의 〈진학해(進學解)〉의 “올올히 매진하며 해를 마친다[兀兀以窮年]”에서 나왔음을 밝혔던 것으로 생각된다.
[주-D007] 【校】 원문의 …… 나왔다 :
교정고 가필사항이다. 인용문은 《관자》 〈형세(形勢)〉의 문구이다.
[주-D008] 【校】 원문의 …… 말한다 :
교정고 가필사항이다.
[주-D009] 옛 …… 만하네 :
한(漢)나라 초기의 협객 주가(朱家)는 검소한 생활,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도움, 남을 돕는 헌신성,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을 우선한 도움의 손길 등으로 인해 당대에 존경을 받았다. 사마천은 《사기(史記)》 〈유협열전(遊俠列傳)〉에서 주가처럼 존경받은 협객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말미에 장안 북쪽 지방의 요씨(姚氏) 등을 민간의 도척과 같은 무리로 평하면서 “이들은 옛날 협객 주가가 수치스럽게 여길 만한 자들이었다.”라고 하였다. 명고는 명분과 의리를 팽개치고 명예와 이익만 좇는 조선의 양반들도 이와 같다고 한 것이다.
[주-D010] 【校】 원문의 …… 나왔다 :
교정고 가필사항이다. 출전을 《사기》로 밝히는 데 그친 1차 가필에 〈자객전(刺客傳)〉을 보충한 2차 가필이 더해졌다.
[주-D011] 유 복야(柳僕射)의 …… 거꾸러졌다 :
《북몽쇄언(北夢瑣言)》 권4에 보인다.
【校】 교정고 수정사항이다. 원래는 “유 복야(柳僕射)의 여종이 개거원(蓋巨源)에게 팔려갔다. 거원이 비단 묶음 속에서 끝부분을 찾아 ‘두루마리를 풀어 길이를 재고[舒卷揲之]’ 두께를 품평하며 ‘가부를 흥정하는[酬酢可否]’ 것을 보고 그 여종이 낯빛이 변하며 거꾸러졌다.”였는데, 교정고의 교정자가 ‘舒卷揲之’와 ‘酬酢可否’ 8자에 점을 찍어 삭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원주는 원문의 ‘揲縑令婢仆’에 대한 출전을 밝히기 위한 것이므로, 원문 ‘설(揲)’ 자의 유래를 드러낼 수 있는 ‘舒卷揲之’를 삭제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또 이익을 철저히 따지는 장사꾼 같은 면모가 단적으로 드러난 ‘酬酢可否’를 삭제하는 것 역시 타당성이 적다고 판단된다.
[주-D012] 【校】 容膝 :
교정고 수정사항이다. 원글자는 판독할 수 없다.
[주-D013] 【校】 원문의 …… 나왔다 :
교정고 가필사항이다. 이 원주는 1차 가필 후에 2차에 걸친 수정이 가해졌다. 1차 가필은 출전이 〈귀거래사(歸去來辭)〉임을 밝히는 데 그쳤는데, 여기에 ‘오두막 생활이 편안함[容膝之易安]’이 보충되고, 다시 ‘잘 아네[審]’가 보충되었다.
[주-D014] 【校】 원문의 …… 나왔다 :
교정고 가필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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